(240425목-0507화) 형이하의 태극 생명과와 선악과
형이하의 태극 생명과와 선악과
생명과(生命果)와 선악과(善惡果)
에덴동산의 생명과와 선악과는 일체성(一切性)과 이원성(二元性) 또는 태극과 이원성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지식이 있는 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와 다른 시각은 둘 다 태극으로 보는 것이다. 태극에서 음양사상팔괘(陰陽四象八卦)가 나온다. 생명과(生命果)는 생명의 순환과 확장을 가리키고 선악과(善惡果)는 죽음의 순환과 확장을 가리킨다. 태극은 기본적으로는 형이하(形而下)의 태극을 가리킨다. 이 태극(太極)은 만물의 근원이다. 주역에서 또 성리학에서 바라보는 태극의 대한 관념이 그렇다. 물론 그 태극을 리(理)라고 하므로써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측면도 있으나 중국이나 한국의 성리학자들은 이 우주 이외의 다른 세계나 차원을 인정한 적이 없다. 물론 무극(無極)이나 무(無)를 말하기도 하지만(도교의 영향으로) 서구와 같은 관념에서는 아니다. 태극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형이상(形而上)의 태극이고 둘째가 형이하(形而下)의 태극이다. 형이상의 태극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형이하의 태극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태극을 가리킨다. 창조의 근원과 만물의 근원의 차이는 근원과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 같은가 다른가에 있다. 본질이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입장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질이 같다고 하면 이것은 무엇이겠는가?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얘기다. 범신론(汎神論)이다. 범신론은 진리가 아니다. 거짓이고 이것은 우상숭배(偶像崇拜)다. 이와 달리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태극은 만물과 본질이 같다. 다르지 않다. 차이가 없다. 똑같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생명과(the tree of life)와 선악과(the tree of good and evil)는 형이하(形而下)의 태극을 가리킨다. 두 개의 태극을 가리킨다. 생명과 죽음, 생명과는 생명의 순환과 확장을 가리키고, 선악과는 죽음의 순환과 확장을 가리킨다. 태극음양사상팔괘(太極陰陽四象八卦)의 선순환과 악순환을 가리킨다. 선순환은 상생(相生)을 가리키고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악순환은 상극(相剋)을 가리키고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음양(陰陽)에 대한 이해를 상생 즉 사랑으로 보는가 상극 즉 믿음으로 보는가를 말한다. 왜 사랑을 상생으로 말하고 믿음을 상극으로 말하는가? 사랑은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와 용서와 관용과 포용이 있지만 믿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와 믿음이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띄우고 화를 내고 분노를 한다. 같이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협력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는다. 믿음이 다른 사람은 배제의 대상이거나 공격에서 물리치거나 파괴의 대상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등을 돌리고 자신이 떠나는 것이다.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서,
음양(陰陽)은 기본적으로 음지(陰地)와 양지(陽地)를 가리킨다. 암명(暗明) : 그림자와 빛을 가리킨다. 내외(內外)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리키고, 냉온(冷溫) : 차가움과 따뜻함을 가리키고, 정동(靜動) : 비활동적인 것과 활동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 밖에 반대와 찬성도 있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수동성과 능동성, 소극성과 적극성도 있다. 여남(女男)도 있고, 이러한 이원성(二元性)을 상생(相生)으로 보는가 상극(相剋)으로 보는가, 사랑과 믿음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이 이원성을 좋게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 말이다. 서로를 해하거나 막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원성(二元性)이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이 없다. 명암(明暗)에 대해서 온냉(溫冷)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여 좋고 나쁜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이 원래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치적으로 받아들여서 상대를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이들이 있다. 나쁘고 악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담부부처럼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것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은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고 하는 것은 선이 아니다. 자신은 이웃을 위하지만 상대는 자신만 위한다는 것은 선이 아니다. 음양(陰陽)이라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순환도 마찬가지다. 양기(陽氣)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고, 음기(陰氣)의 시간은 나쁜 시간이 아니다. 음양이 순환하는 것은 원래가 그런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법칙이다. 자신을 선하게 보는 것은 좋은 것이다. 자신 안에 선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마음 씀씀이다. 그런데 남을 볼 때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에 집중한다. 자신은 성선설로 보고 남은 성악설로 본다.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이 문제의 근원인 것이다. 이런 시각은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좋은 점만 본다. 사랑은 그 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 성선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은 사람의 악이나 잘못에 대해 용서를 한다. 잊어버린다. 치워 버리고 덮어 버린다. 그것들을 넘어서 그 사람 안에 밝게 빛나는 선을 본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래서 용서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에서 진정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것이지, 이분법적인 시각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독자적인 즉 독선적인 믿음일 뿐이다. 이 믿음은 그러므로 미움에서 나온 것이다. 증오에서 나온 것이다.
아담부부는 하나님을 나쁜 존재로 보고 있다.
(창세기 3: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창세기 3:14)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