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님이 윗글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5대 사명으로 예배, 전도, 교육, 섬김, 교제를 말하고 교회의 3대 기능으로 선포(케리그마), 봉사(디아코니아), 교제(코이노이아)를 꼽습니다. 그것이 아니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은 교회의 임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회의 역할 수행이 가능한 인터넷 교회가 가능 할 런지요.
이것은 제가 배우고 어려서부터 젊은 날을 거쳐 믿어온 바와 틀림없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에 대해 제가 속에 키워온 비평적인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것이 과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교회인지, 그리고 사이버교회가 교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 생각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을 토로하지 않고 결론만 공유하는 것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어서요.
저는 우선 교회의 사명이 예배 전도 교육 섬김 교제이며 기능이 선포 봉사 교제라고 나열된 것이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며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도들의 교회 인식과 초대교회의 모습 등을 통하여 제대로 전수되고 또 오늘에 맞게 복원된 교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집단이라는 기능성을 토대로 거꾸로 만들어진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기능주의인 이해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 따라서 개인이 못하는 뭔가를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남기신 조직이다 --> 따라서 뭔가 해야 한다 이런 '집단'이나 '조직' 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교회에 투사해서 조립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체강화되어 온 관념들로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교회는 "나와 함께 하는 너희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자랑스레 누가 나의 모친이며 형제인가 하고 말씀을 듣던 자들을 둘러 보셨습니다. 너희 중에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였으면 거기 내가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기틀이라고 봅니다.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셨으며 이로써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연속이며 증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것이다" 하신 것도 이에 잇닿은 말씀입니다.
정한 시간에 엄숙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서 절을 하듯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하는 예배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발견되지 않고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역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심은 "그것은 안 쓰여 있어도 필수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강한 끌림이 있고 당위성이 있고 공동체의 감성이 있는 예배가 그렇게도 서신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라는 엄숙하고 감성적인 의식이 없어도 재미없지 않은 종교, 그 외에도 할 것이 많은 종교, 즉 종교성이 극히 결여되었으나 살아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형제처럼 묶어주고 그리고 그 믿음을 위해 서로 격려하며 핍박받고 죽어가던 교회, 그것의 비밀을 알려면 바로 이 "예배 없음"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배를 폐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형식에 우리가 중심적으로 부여하는 종교적 의미, 그리고 예배를 주재하는 라이센스로 인식되는 교회 제도 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 너희의 모일 때에... 라는 것은 지금의 일반적 '드리는 예배'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보다 성도의 교제라는 이상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신서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전도자들과 일반 신도들을 명확히 구분하였습니다. 당시에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권유는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와 이웃에 전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신서에서는 전도라는 행위를 독려한 흔적이 없습니다. 전도하라고 재촉한 것은 바로 그 전도자 그룹 내, 즉 디모데나 디도에 쓴 글에만 있습니다. 일반 신자에 대하여는 너희의 믿음이 소문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우리 안에 있고 하나가 되면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씀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성에 대한 세상에 놓인 증거였습니다. 결코 집단의 협력성과 규모의 능력을 이용한 선교활동의 임무가 강조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모든 성도가 바울같으면 더욱 좋지 않은가 하기 이전에 왜 바울이 그렇게 권하지 않았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생각 같으면 반드시 전도가 강조되었어야 하는데 안 그런 것은 이상하게 생각되며, 그러면 오히려 우리는 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는가 하고 돌아볼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예배와 전도가 가장 중요한 교회의 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다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원래 교회의 모습을 복원하기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식당을 갈 때에도 얼른 생각에 옆의 식당이 더 좋아보여도 원조를 굳이 찾아갑니다. 가서도 그 집의 가장 오래된 메뉴를 먼저 시킵니다. 그래야 그 음식을 바로 이해하고 감상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동네에 나폴리출신 셰프가 작은 집을 차렸습니다. 그 집에서 까르보나라를 시키려면 한국식으로 하지 말고 이태리식으로 계란 노른자만 넣고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크림을 많이 넣으면 더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까르보나라가 아니고, 까르보나라가 가진 그 원래의 "일리"있는 맛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 상식적인 집단의 이점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움직이는 교회는 원 교회의 뭔가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은 교회라고 하면 예배와 전도가 떠오르는 우리 생각이 본래 교회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 그러한 변형이 과연 우리 신앙을 더 풍성하게 하는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그 안에서 대체되고 왜곡되어 기독교를 평범한 종교로 퇴축시킨 것이 아는가, 그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약화시키거나 잃었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가르침과 교제와 돌봄의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단호히 생각하며 또 그렇지 않음을 교회의 역사와 우리의 경험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눈이 좋으니 가운데 커튼을 쳐도 영화를 볼 수 있다 하는 말이나 같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듯 복음이 가르쳐지는 교회 (그래서 예수의 말씀보다 예수에 대한 이론, 더 나아가 정체가 이미 불명한 교회 강화를 위한 설교, 더 나아가 시사에 대한 생각이 넘쳐나는 곳이 아닌) 성도가 서로 신앙을 격려하며 믿음의 삶에 필요한 지혜와 인내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교회, 그리고 필요한 지체들과 사회의 아픈 곳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펴는 교회,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현재의 교회는 어떤가? 차를 타고 큰 도시 전역에서 모여온 교회는 이미 사이버(cyber)교회나 다름없습니다. 2천만명이 사는 도시에서 1만명이 모이면 그들은 길에서 만날 확률도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만 만나고, 예배때만 얼굴을 보고, 그나마 1만명 교인이면 같은 교회를 다니는 지도 모르고 구역과 부서 사람 100명을 알아도 많이 안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삶을 나누지 않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같은 목사님을 좋아하는 공통점으로 모였으니 교회라기보다는 동호회입니다. 교회에서의 역할놀이가 주가 된다면 삶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의 의미는 약화됩니다. 장로를 뽑으려도 그가 다른데서 갑질을 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르고 실제 누가 장로감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 사회 지위와 유명세로 뽑습니다. 그걸로 다 채울 수가 없으니 아예 목회측에서 추천을 하고 투표를 합니다. 거기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교회의 모습은 없습니다.
예배를 보지 않느냐, 전도하지 않느냐 ... 그것은 집단 의미의 교회를 기반한 생각이며 교회의 원본의 중심은 아닙니다. 일을 하고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느냐.... 역시 집단의 기능이지 세우신 교회의 중심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느냐...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인정해 드리기 어렵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교제를 하지 않느냐 ... 그런 교제가 교제가 아니지요. 그것은 조직관리형 친분 강제로 만들기입니다. 구제를 하지 않느냐 ... 개인이 돈을 위탁하면 조직이 구제하는 것, 그게 어떻게 '신앙 생활'의 내용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교회는 원래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총회가 인정하지 않았느냐... 그 총회 자체가 예수님의 몸을 대표한다고 인정되는가가 문제입니다. 언제부터 예수께서 조직 정통성과 합법성과 라이센스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게 되었습니까?
주의 말씀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의 모임이요, 제자의 모임이 중심적이라면 그것이 교회일 것입니다. 그 외의 것으로 교회의 간판을 세웠다고 인정해 드리기엔 글쎄요, 오늘의 현상을 직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500년 그럭저럭 통해 왔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해 주기엔 면죄부의 실상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던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더 이상 벌거벗은 임금님이 좋은 옷 입었다고 한소리 보태주는 것은 그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
이하 댓글
참다운 교회는 어떤 모습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나눔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책망하시는데 오히려 그 신자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교회의 정당성으로 연결시키는군요
"너희가 서로사랑하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너희가 어찌 사랑을 하겠느냐?
그럼고로 너흰 버려진 자식이다. 라는 뜻입니다.
필자도 버려진 자식들이 하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증거하고 있네요.
교회론을 펼치기 전에 말씀부터 깊이 상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본문의 예배에 대한 관점이 예수님이 함께하시던, 그리고 로마를 굴복 시킨 예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짜 교회는 그 교회가 가짜임을 증명 할 때 그 순간 진짜교회입니다.
성경 말씀에 초대교회를 통해 제시한 교회의 기준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가 가짜라고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구성원이나 교회가 있을 수가 없다는 고백 즉 복음 위에 서지 않는다면 그냥 가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고로 오히려 진짜임을 증명하려합니다.
우리는 그런 짓 하지 말자든지 안한다고 주장합니다.
다 소경이 모인 곳이라 봐야합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외치면
'임금모독죄'와 '기밀누설죄' 가 적용되지요.
당장에 왕따가 되거나, 안티기독인이 됩니다.
그러니 가나안 교인이 나오는 것이죠.
이런 교회는 예수님 말씀대로 돌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물고 마음의 성전을 세워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