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헌 논의가 도마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여야간 핵심 쟁점중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것이 '야'쪽의 입장이고, '여'쪽에서는 국민들의 뜻을 수렴하는 개헌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개헌하려 하고 있고, 교회는 개혁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정치글이 아니라 교회개혁의 취지에서 쓰는 글임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제목에 제왕적 목사제도라고 표기한 의도는 그 타이틀만으로서도 충분히 줄거리와 생각거리를 회원 여러분에게 제공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목사제도의 불합리성이 개혁의 취지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래도 또 한번 짚고 넘어가지요.
1. 내 양을 먹이라 목사 제도의 성경적 뿌리와 정당성을 간혹 이 말씀에 빗대는 경우가 많습니다(요한복음 21:17). 한발 더 나아가 '먹이라'는 것은 곧 말씀을 먹이라는 뜻이라고 되도 않는 논리를 붙여가며 설교의 정당성을 보수하려는 입장을 얘기합니다만 이것은 "take care(돌봄)"하라는 것으로 설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여튼 갖다 붙이기도 잘붙여....
원문에서 접근하면 내 양을 먹이라. 또는 내 양을 치라는 것은 헬라어 'poimaino'인대 여기서 파생한 것이 '포이멘'으로서 '양치기' 입니다.
세 번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를 묻고 세 번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뭔가 매우 중대한 의미가 담긴 장면으로 보입니다. 이 물음의 시점은 베드로의 철저한 그리스도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가 생업(어부)을 위해 갈릴리(디베랴) 호수에서 자기 먹을 것에 충실한 삶으로 되돌아가버린 때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받고, 세 번이나 대답을 들은 다음, 세 번 연속으로 '그렇다면 너는 내 양을 먹여야 한다'라는 이 심각한 대화 속에서 어쩌면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재설정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먹을것을 위해 살지말고 '내 양을 치라'(예수님의 양)는 것은 삶의 목적을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내 양이 의미하는 것은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나 리더로서 베드로에게 그들의 통솔을 위임하는 공적인 선언이 필요했을 것으로도 보입니다(제자들이 있는 현장에서).
자연인으로 되돌아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뜻(예수님이 맡긴 하나님나라의 사명:누가복음 22장)을 따라서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어' 목적을 이루라는 요구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너희에게 맡긴다(누가복음 22장)
- 이들(제자들)이 하나되게 하소서(요한복음 17장) - 내 양을 보살펴라(요한복음 21장)는 것은 일련의 연속된 메시지이며 흩어지지 말고 약속된 보혜사가 오기까지 베드로에게 위임된 하나님나라의 통솔 책임으로써 유효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사도행전 초기에 보면 똘똘 뭉쳐서 제자들과 기타 사람들이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음, 그리고 마침내 성령 강림의 마가의 다락방 사건이 일어나게 됨).
이것을 억지로 현대의 목사 제도의 역할과 힘들여서 맞추려 하는 것은 억지 춘향식 성경 해석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현재성은 제자들에게 국한됩니다. 여기에 자꾸 현대적 의미의 교인 양육 같은 것을 가져다 붙이면 그렇게 목사님나라의 강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2. 하나님나라에 정면으로 반하는 목사님나라 제가 교회개혁 현상에 접근하면서 근원적 현대교회의 병폐를 진단하던중 핵심적으로 접근하고 매달렸던 것은 교회에 대한 정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호함, 예배의 성경적 기원등에 대해서 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탐색하는 세월을 가졌습니다. 이단 혐의를 받은 90년대 초 시점부터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이 정립되기까지 무려 20년의 세월이 소모되었습니다. 기존 개신교의 먹물이 빠지기까지 그렇게 걸린 것입니다.
이점은 솔직히 의아한대 교회개혁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개혁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들)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그 나라속에서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할 사람임을 선언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동안 짝퉁예배, 짝퉁교회 속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계시록이 뚜렷하게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애써 비껴가려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적 하나님나라의 회복은 개인에게도 필요하지만 교회개혁 차원에서 반드시 비중있게 다루어야 할 지향점인대도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종교구조속으로 빠져버린 교회를 바른길로 가게 할 대안은 오직 하나님나라 밖에 없습니다.
제왕적 목사제도의 근원적 문제점은 바로 하나님나라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만인제사장설이라고 하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다(베드로전서 2장)"의 선언은 화석화된 유물로 골방에 쳐박아두고 현재의 종교 구조 개신교는 갈수록 '목사님 나라'만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종교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복음화 전략을 이끌 수 있는 차세대 교회의 대안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종교의 껍질을 벗고 다시금 예수증거 일환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입을 때에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일이 실현 될 것입니다. 교회개혁의 궁극은 하나님나라입니다. 계시록이 그렇게 될 것임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주도적 양치기와 삯군 양치기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은 그 속에 주도적 양치기 즉, 주인 자격으로서 양을 쳐야될 입장을 쉽게 정리해 줍니다. 주인자격으로서의 양치기는 누구에게 월급이나 댓가를 받지 않습니다. 삯꾼 양치기는 양이 도망가버리거나 사나운 늑대가 나타나 해치면 대충 대충 할뿐 목숨걸고 양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댓가(품삯)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인 역할로써의 양치기는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양을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월급이나 댓가를 받고서 양을 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삯꾼입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내 양을 치라'는 유지를 이어 받았으면서도 초대교회, 즉 사도행전적 흔적 속에서는 '재산을 축적하거나호의호식하는 직업적' 선교를 하지 않았음은 적나라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월급 목사 제도는 곧 주도적 양치기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4. 양치기의 참 목적 가축을 키우는 목적은 그중에서 골라 제사 제물이 되게 하거나 식용 또는 젖을 내는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 양이라는 동물은 6개월이면 이미 젖을 뗍니다. 성체가 되면 번식 능력(새끼를 낳을 수 있는)이 생깁니다. 교회에서도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포유류 가축들은 일정기간 젖을 먹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도 최장 3년 정도 젖을 먹습니다. 그런데 젖먹던 아이가 5년이고 6년이고 젖을 먹겠다고 어미 젖꼭지를 계속 찾으면 매우 답답할 노릇입니다. 젖을 먹이는 이유는 거친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어느정도 자라면 이유식을 먹여서 입맛을 들이게 합니다. 그러는 동안 단단한 것을 먹고서 배탈이 나지 않고 잘 소화하면 더 이상 젖을 먹을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현대교회 제도는 마치 양계장의 닭과 유사합니다. 닭장속의 닭은 때를 맞춰 주인이 주는 사료를 먹으며 주인을 위해 알과 고기를 생산합니다. 그리고 양계장 주인은 그 수입을 짭짤하게 챙기지요. 그래서 주일마다 예배당에 가서 성직자의 설교를 듣는 것을 '영적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양계장 닭들은 그 양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영원히 그 닭장 속을 떠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예배당 시스템은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요 사람을 위한것도 아닌 성직자를 위한 구실이 너무나 선명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에 감히 항거하지 못합니다.평생을 젖먹이 신앙인으로 살도록 하는 수동적 신앙인은 결국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목사만 빼고).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젖을 먹을 필요가 있는 시기에는 젖이 필요하지만 더 이상 젖이 필요없으면 보호된 울타리를 떠나 거친 음식을 스스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개신교적 양치기 방법은 평생 젖만 먹도록, 또는 주는 사료만 먹도록 울 안에 가둬 놓습니다.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5. 제왕적 목사의 문제점 지금까지 성경적 양치기의 역할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삯꾼 시스템인 목사왕국의 예배당은 실로 개혁되지 않고서는 안되는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인 물은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이 투기와 부동산 전쟁의 대상이 되고 권력 싸움의 온상이 되고 성폭력의 문제점이 계속해서 불거지는등의 근본적 이유는 목사제도 자체가 성경적 맥락 가운데서 행사되지 않는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목사'가 되면 예배당에서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권력의 달콤함에 취하게 되면 그 무엇도 뺏을 수 없는 행복감(목사 자신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너무나 좋기 때문에 아들이나 사위 또는 자식에게 그것(사유화된 예배당)을 대물림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 목자이셨던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들로 산으로 떠돌다가 가셨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제왕적 목사제도를 극복하는 길은 없을까요? 그것은 이미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제사장으로써의 신분을 부여 받았고 스스로가 산 제물이 되어 이웃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부여 받았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