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추수가 끝난 후
번안부락은 볏집 타는 냄새로 그을린 감꼭지에 메달린 붉은 홍시처럼 설레이게 한다.
집안 여기저기 가을 추수로 걷어 드린 볏가마. 고구마토광 등이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것보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가 화로에 구운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입에 넣어 주는 그 맛에 30리길을 걸어 외갓집에 온다.
친손자를 얻고 찰떡과 멧떡으로 구분되기 까지는 외할머니가 큰 딸이 낳은 외손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가을 끝에서 얻는 주전부리에 30리길은 결코 먼길이 아니었다.
저녁나절 마을에서 갑자기 "꽤애 ! 액"하며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 온다.
오늘은 돼지 돈부리 하는 날인가 보다.
나는 얼른 방문을 열고 삼용이 아저씨네 집으로 달려 갔다.
삼용이 아저씨는 돼지 잡는 일 말고도 초상집 염 등 동네 궂은 일은 도 맡아 하는 분이다.
번안 부락은 부안임씨 집성촌으로 몇 집이 타성받이가 있지만 그래도 이리걸리고 저리 걸려 다 집안이고 친척들이다.
아저씨 집 마당에는 벌써 선지를 담은 고무다라가 있고 끓는 물에 검은 털을 뽑고 있었다.
돼지를 잡으면 내장등 부속물은 모두 돼지를 잡는 품삯으로 삼용이 아저씨 차지다.
그러나 돼지 간. 허파등은 잡는 그 자리에서 함께 거드는 사람은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서 소금에 찍어 먹는다.
돼지 잡는 것을 거들 던 작은 외삼촌이 아직 온기가 있어 더운 김이 나는 간을 칼로 베어 나에게 건넨다.
난 그렇게 외갓집 동네 돼지돈부리 하는 날 부터 생간 먹는 법을 배웠다.
돼지 돈부리하는 날은 생간만 얻어 먹는 게 아니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 커다란 솥에 넣고 끓이는 선지며 내장은 삼용이 아저씨가
동네에 베푸는 선심이다.
아이들은 벌써 돼지 오줌통에 물을 넣어 축구를 한다.
돼지를 잡아 대여섯 근씩 동네 사람들이 나눠 가져 갈 때까지 아이들은 돼지오줌통을 축구공 삼아 축구를 한다.
"집에 가자!"
작은 외삼촌은 돼지다리 한 짝을 짚으로 고리를 만들어 들고 "자 가자! 집에가서 할머니보고 고깃국 끓여 달래서 맛있게 먹자!"
어렸을 적 삼겹살이 어떠니하며 돼지고기를 구워 먹어 본 적이 없다.
그 때는 먹을 것들이 귀하던 시절이라 돼지고기도 대부분 국으로 끓이거나 찌개로하여 나눠 먹었다.
돼지비개가 떠 있는 기름진 고깃국 지금 그 어떤 돼지요리집에서 먹는 맛에 비할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이다.
이 시절 기름진 고기맛을 보지 못했던 분들이 오랜만에 고기국을 먹으면 이내 설사를 하여 몰골이 핼슥하기 일쑤였다.
외각집 동네에 '돼지돈부리' 하는 날 난 어렸을 적 부터 먹을 복이 있었는지 외갓집 가는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김영복-
첫댓글 정이 넘칩니다.외갓집은 따뜻하고 情이 흐르는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