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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8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17장, 사도행전2장
성경낭독: 사도행전1:15-26절
설교본문: 사도행전1:15-26절
설교제목: 주께서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셨다.
예배찬송: 143장(시47), 107장(시36), 89장(시31), 찬송358(시134)
행1장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가룟 유다는 배신하여 자기 길로 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12제자를 불러 세우실 때에는 새로운 이스라엘 곧 새로운 12지파로 형성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구상하고 계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사도직 질서에 한 축이 무너져 있었기에 새롭게 한 사도를 세워 온전하게 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열 두 제자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배반과 배도로 유다 대신 온 열방에 흩어진 새로운 이스라엘을 동일한 하나의 믿음으로 불러 모으실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12라는 숫자는 거룩한 숫자였습니다. 만일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의 거룩한 숫자가 줄어든 채로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비록 유다의 배신으로 주님께서 제정하신 처음 것이 짓밟혔음에도 훼손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인 듯 아닌 듯 가룟 유다와 유일하게 남은 혈통적 이스라엘인 유다는 동일한 명칭입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그 빈자리를 이방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로 참여하는 것처럼, 사도의 직분을 버리고 배도를 통해 달아나 버린 유다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를 세워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배신으로 수포로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1. 유다의 빈자리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모인 무리의 수’가 120여명이었다고 말합니다. ‘모인 무리의 수’를 원문으로 직역하자면 ‘이름들의 무리’입니다. 당시에 이름들은 남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이름 아래에 포괄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보자면, 실제로 모인 숫자는 120명 보다 훨씬 더 많았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더불어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장소는 예루살렘에서도 부자들이 밀집되어 살아가던 지역에 있었던 건물 안으로 추정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회집할 장소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백 명이 훌쩍 넘은 많은 수의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령이 임하기까지 모여서 기도에 힘썼다는 말이 동일한 장소에서 떠나지 않고 내내 머물러 생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큰 무리가 함께 생활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새로운 사도를 선출하기에 앞서 설교하는 모습을 봅니다. 따라서 12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예배로의 회집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한 장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고, 함께 기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리들 가운데 일어섰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사역자로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성경의 예언을 풀어 해석하여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는 점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종말과 옛 언약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종말에 대한 것은 이미 예언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유다의 배도로 인해서 경건한 성도들이 심령에 생겼을 걸림돌과 마음에 슬픈 멍울들을 말끔하게 치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인 무리 중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세우는 일이 공동체 가운데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넘기는 유다의 배신에 대한 것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므로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임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다윗의 혀를 도구로 사용하신 성령의 책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주님도 성경을 통하여 예언의 성취를 말씀하셨고, 베드로 역시 성경을 통해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설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하나님이며,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빈자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17절에서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고 사도의 수 가운데 참여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다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선지자민족으로 온 열방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섭리를 증거 하는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배역과 배도 속에 심판으로 사라져갔고, 마지막 남은 유다조차 배역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름 받아 세워졌던 유다는 주님을 죽이는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배역으로 사도의 직분에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유다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시작부터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와 함께 머물며 함께 지냈던 이들은 큰 실의에 빠졌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한 축을 형성했던 유다의 배반은 큰 충격과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함을 입었던 자가 이토록 곤두박질하여 파멸에 이른 것은 모든 사람들이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신뢰를 받아 제자들 가운데 재정까지 맡았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곤한 일과 즐거운 일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넘어 주님을 팔아넘긴 배역은 교회의 씻기 힘든 상처요 아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큰 슬픔과 근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직분자들만이 아니었고, 믿음이 약한 어린 성도들의 경우에는 신뢰했던 사람의 배반과 배도, 배역은 믿기 힘든 좌절의 마음과 정서를 안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연약함과 죄악성에 대해서 눈을 감기 쉽고, 사람을 신뢰하기 쉽습니다. 든든하게 믿고 신뢰했던 사람의 배역과 무너짐은 교회에서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의 빈자리는 교회를 시작하는 초기부터 컸고, 이 아픔과 좌절의 문제를 씻어내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하여, 유다의 직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20-22절을 다시 봅시다.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성경은 베드로에게 핵심 사도집단은 12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증하게 합니다. 유다를 대체하는 조치는 유다가 경험하는 심판의 일환입니다. 유다의 대체를 요구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배교 때문입니다. 12사도는 확정된 것이며 변함없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둥입니다. 유다가 배교 없이 죽음을 당했다면 다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교는 새로운 사도로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과 함께 채워지는 유다의 빈자리는 맛디아로 채워지지만, 사도행전12:2절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음에 대해서는 다시 채워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열두 보좌를 물려받을 사도의 직위를 소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절에 ‘그의 직분’은 ‘감독직분’, 곧 사도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주님의 배반한 악한 이들에게 닥칠 형벌과 비극적 종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받았고 누려야 했던 있는 것들까지 모두 타인이 취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사를 무시하고 버렸기에 얻게 되는 보응입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빈자리는 채워져야 하고 항상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새로운 직분자를 뽑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교회의 책무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배역과 배도가 일어날 때, 삶과 교리에서 주를 떠나 현저히 무너졌을 때에 그들의 직분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부활의 복음을 선포할 수 없었고, 사도직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데 있어서 목격자가 되는 것은 중요한 요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당연히 포함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과 성령으로의 잉태, 공생애와 승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총체적 복음을 담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구속의 목적이자 완성을 뜻하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빈자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채워져야 했습니다.
2. 유다를 대신할 자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를 세우고자 했을 때 복수로 두 사람이 천거되었습니다. 유다를 대신해서 한 사람만 뽑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을 내세웠습니다. 쟁쟁한 두 사람이 있어 우열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대충 한 사람을 메우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투표와 사람들의 의견모음으로 사도를 세우기를 원치 않고, 결정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자하는 의도에서 두 사람이 천거되었습니다.
12사도와 오늘날의 목회자들과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창립에 참여했다면, 오늘날의 목사들은 교회의 설립과 말씀사역에 참여합니다. 목사들은 교회에 의해서 선택되고 외적인 소명인 청빙을 따라 세워지지만, 사도들은 반드시 주님에 의해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도는 반복될 수 없는 교회 창설의 직분으로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갈1:1). 사도직이 이토록 높고 존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맛디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할 역할을 다했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은 마땅히 주님께 돌려져야 했습니다.
맛디아를 사도로 선택하여 세움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과 주님의 주권적 선택이 함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가장 적합하다고 인정된 두 사람을 천거했고, 주님은 가장 적임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제비뽑기는 우연한 결과에 맞기는 경솔하게 사리에 맞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일이며, 성경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원래 제비뽑기는 잠언16:33절에서 말하는 대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방식으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의 분배문제나 유산의 분배과정에서의 분쟁조절에 있어 제비뽑기가 합법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영토를 분할하거나 형제들이 가문의 기업을 나누기 위해 제비뽑기를 허용했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지만 제비뽑는 일은 악한 데 사용되어졌고, 우연에 맡기는 방식이나 점치는 것으로 사용함으로 사람들은 더렵혔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악한 호기심을 점성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했고, 천문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에 먹칠을 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말해준다는 소위 점쟁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제비’라는 말이 유다가 사도의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다는 것, 즉 할당받은 ‘몫’에 대한 선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빈자리 즉, 유다의 사도직의 몫을 대신할 사람에 대해 주님의 뜻을 물었던 것입니다. 23절에서 천거된 두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요셉이라는 사람이 먼저 언급됩니다. ‘바사바’라는 이름은 ‘바사의 아들’로 아버지가 이름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온의 아들’과 ‘맹세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바사바라는 이름과 연관해서 교회전승에 따르면 그가 뱀의 독을 삼키고도 살아남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 그가 신실한 사람이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스도’라는 이름에서도 그의 정직한 성품과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어느 모로 보나 맛디아보다 훌륭하게 보인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요셉과 달리 천거된 다른 인물은 맛디아로 어떤 부가적인 설명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요셉이 압도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우쭐대거나 교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유일하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 앞에 인정받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는 일시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며, 때때로 속이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판결과 인정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며 사람들에게는 부족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합당한 사람들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서고 넘어지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판결에 달려있습니다. 은사도 직분도 넓게는 우리의 삶의 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때를 따라 우리의 호흡과 일들을 거두어 가심도 주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맛디아는 한 명의 궐난 사도직의 자리, 유다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더 이상 추가되는 자리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로 수납하였습니다. 직분을 밀어내시고 채우심은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