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클라이머들에게 인수봉은 바위, 혹은 암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인수봉을 보며 바위를 동경했고, 인수봉에서 첫 바위를 경험했다. 그래서 인수봉은 한국 클라이밍의 상징이고, 클라이머들에게는 모암(母巖)이다.
완연한 봄기운으로 본격적인 암벽시즌이 시작된 지난 4월5일, 봄꽃 소식만큼이나 반가운 손님이 인수봉을 찾았다. 제1회 아나사지 국제 볼더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주)에델바이스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클라이머 크리스 샤마(미국·25)와 로렌 리(미국·25)가 한국 클라이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인수봉 등반에 나선 것이다. 실력과 외모 모두 뛰어난 팔방미인
사실 이 날 인수봉 등반이 무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아시아 투어 중인 그들은 전날 중국 상해와 북경에서 볼더링 대회를 마치고, 바로 한국으로 이동한 터라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강연회가 예정된 21야영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안쓰러울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주최측은 전날 예정된 일정을 최대한 간소화하고 휴식을 취하게 했지만, 고도의 집중력과 컨디션을 요하는 암벽등반은 무리가 아니겠느냐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역시 프로는 달랐다. 산장에서의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애타게 기다리던 취재진과 클라이머들 앞에 나타났다.
크리스 샤마와 로렌 리는 빼어난 외모로도 유명하다. 샤마는 ‘미국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 20인’에 선정됐고, 중국계 미국인인 로렌은 동서양이 잘 조화된 미모로 여러 매체의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클라이머로서 이룩한 성과를 보면 그들이 누리는 인기가 화려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이 이루어낸 등반성과는 세계 정상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다.
샤마는 2001년 프랑스 세유즈에서 세계 최초로 5.15a급에 성공했고, 유럽 선수들이 거의 독차지해온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번 투어가 끝나는 대로 지금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마의 5.15b, c급에 도전해 새로운 신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렌은 클라이머로서는 늦은 나이인 19세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미국 선수권 대회인 PCA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등반 시작 3년만인 2002년 당시 여자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5.13d급을 연달아 두 개나 성공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자세 돋보여
이 날 인수봉에 오르는 길은 남면의 거룡길을 택했다. 거룡길은 페이스 구간은 없어도 난이도 높은 슬랩과 크랙이 적당히 섞여 있어 제대로 된 암벽등반을 체험할 수 있지만 보통 실력으로는 오르기 힘들다. 두 사람의 몸 상태를 고려해 조금 더 짦고 쉬운 길로 코스를 변경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날의 등반대장을 맡은 김용기씨는 완강했다. 평생을 클라이머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기량보다 너무 낮은 난이도의 길을 오르게 하는 것은 클라이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두 사람도 지도상으로 오를 루트에 대한 경로와 길이, 난이도에 대한 설명을 듣자 문제없이 오를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오히려 선등에 서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기분을 내지 못하는 것을 더 아쉬워했다.
김용기씨가 선등을 맡았고, 그 뒤를 샤마와 로렌이, 마지막에는 이애숙씨가 확보물을 회수하며 올랐다. 처음 자일을 묶는 데다 한 자일에 붙는 인원이 많아 한 피치씩 끊어서 등반했다. 제1, 제2피치까지는 무난히 등반해나갔다. 로렌은 제1피치 상단의 급경사 슬랩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볼트에 래더를 걸고 인공등반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등반능력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로렌이 슬랩에 조금 약하다는 인상을 주었을 뿐 발디딤이나 손자세 모두 고난도 등반자다웠다. 또한 어려운 바위에 많이 도전해봐서인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보조도구를 이용하거나 우회하는 등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신속히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 김용기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리그리를 이용한 1피치짜리 고난도 등반만 주로 훈련한 터라 자기확보 능력이나 자일처리 등 멀티피치 등반에 필요한 능력에서는 미숙함을 드러냈다. 특히 쌍볼트에 여러 사람이 확보할 때는 무척 불안해하며 여러 번 안전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들은 6피치로 끊어 인수봉 정상에 닿았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모두 완숙한 클라이머이기 때문에 곧 해결됐다. 김용기씨는 거룡길만 고집하지 않고 중앙길, 청맥길의 슬랩, 크로니 크랙 직상 등 다양한 인수봉의 루트에서 슬랩과 크랙 등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두 사람도 코스와 난이도에 상당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상에 서자 그들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에 감탄하며 “뷰티풀!”을 연발했다. 또한 예의바르고 매너 있는 행동으로 톱클라이머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낯선 사람들이 말을 걸어와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고 상냥한 웃음으로 대했으며, 기념사진을 원하는 30여 명의 사람들과 모두 사진을 찍어주었다. 자일파트너인 김용기씨와 이애숙씨에게도 감사의 인사와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샤마, 매드락(V11) 온사이트로 오르는 괴력 보여 비둘기길로 하강해 숙소 백운산장으로 돌아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샤마는 부모님이 불교 신자이고, 로렌은 아버지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모두 동양 문화와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편이다. 김치도 맛있게 먹었고 젓가락 사용도 꽤 잘했다. 샤마에게 이번 방한 중 가장 아쉬웠던 것은 사찰 체험을 못한 것이고, 로렌은 한국 음식을 충분히 먹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점심을 마치고 바로 수덕암 일대의 볼더링장으로 이동했다. 볼더링은 등반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두 사람의 주 종목도 볼더링이기 때문에 한층 관심이 높았다. 처음 도전한 바위는 V11급의 매드락. 손상원씨가 이틀만에 성공한 국내 최고난도 볼더다. 당연히 관심은 샤마의 성공 여부였는데, 놀랍게도 단 한 번의 도전에 성공하는 괴력을 선보여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국내 클라이머들이 세계 정상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하는 벽을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로렌도 볼더에서의 파워와 유연성이 국내 남자 선수들에 버금간다는 평가다. 이날 함께 볼더링을 했던 김희조씨(29?아나사지 클라이밍팀)는 “두 사람 모두 신체조건도 좋지만 더 훌륭한 것은 후천적인 훈련으로 길러진 파워, 유연성, 밸런스다. 인공 암장보다 자연암에서 훈련을 많이 한 선수들답게 작은 홀드에 대한 감각도 탁월하다”며 두 사람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장 감탄한 것은 두 사람이 보여준 집중력과 바위에 붙었을 때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불과 서너 시간동안 그들은 놀라운 숫자의 바위에 놀라운 횟수로 도전했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한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등반에는 목적도 끝도 없다는 것이었는데, 단 하루만에 그들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에게 그걸 납득시켰다. 그들을 기다렸던 클라이머들은 입을 모아 그들과 함께 한 존재감에 압도당했다고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하루를 통해 자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느낄 정도로….
바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의 삶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자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난도 바위에 대한 도전은 바위와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으로만 보였다. 그 아름다운 삶과 싸움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래본다.
글 홍순우 기자 사진 김용기·김승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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