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의 긴 세월을 함께 했던 첫 직장을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지
1년 4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전 직장을 떠난 상실감과 새로운 직장의 왜소함에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정형화된 조직과 최고 경영자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자유로움과 모든 것을 내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결과를 정리하는 즐거움이 나로 하여금 새 직장에 열정적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지난 1년 4개월동안 매일
7시반에 출근해서 모임이 있는 날을 빼고는 8시전에 퇴근한
적이 없고, 토요일은 아주 비수기때 현장 생산이 없는 날을 빼고는 한번도 쉬지 않고 출근했고, 평일에 휴가 한번 안 내고 일을 했다. 대우전자 신입사원시절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하는 내가 가끔은 놀랍기도
하였지만, 전 직장 32년 근무하면서 여행도, 휴가도 원없이 다니고 쉬고 해서 그런지 일해도 즐겁고 휴가를 안가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십대 후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다닐 직장이 있음에 감사하며, 내
평생의 경험과 지식이 새 직장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에 즐거움이 있었다. 매출 200억도 안되고, 전직장인 캐리어에 납품하는 비중이 90%가 넘는 전형적인 중소 하청업체이지만, 캐리어의 매출비중을 줄이고 자체 매출을 늘리기 위해 인재 영입에 마다하지 않고 영업을 강화하는 젊은 사장의
패기가 좋았고, 한발 물러서서 자금에만 관여하는 나이든 회장님의 신뢰에도 신바람이 났다.
하지만 나처럼 캐리어에서 물러나서 갈 곳 없는 상태로 와서는 1년도
못 버티고 그만둔 많은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하는 압박감과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직원들과의 융합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나를 더욱
일에만 매몰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중소기업들과는 다르게 인원 5명의 부설 연구소도 있고, 제법 많은 제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제품개발 이력과 도면 데이터베이스도 잘 갖춰져 있지만, 생산 설비들은 20년 넘어 대부분 낡았고, 생산 시스템은 관행으로 구태의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재고는 곳곳에
널려 있고, 생산성이나 원가절감의 개념이 모두 낡은 서랍장속에 꾸겨져 있어 관리개념이 상실되어 있는
회사는 나로 하여금 정리와 관리로부터 새 업무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공장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효율적 관리가 어려웠고, 의욕적으로
영입한 많은 경력직들과 오랜 세월 회사와 함께 성장한 중간 간부들 사이의 두터운 벽은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강철 벽처럼 단단했지만, 30년의 기술과 공장관리의 경험 그리고 합리적인 리더쉽으로 진심을 가지고 다가가니, 서너 달도 채 되지 않아 회사는 효율적으로 관리가 되고 직원들은 하나 둘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일년에 한번, 연말에나 하는 전직원 회식을 훌륭한 부사장을 모셔왔다며
입사한지 1주일만에 환영 회식을 하던 날, 나는 건배사에서
내 모든 열정을 바쳐서 회사를 3년내에 매출 500억, 5년내에 매출 천억을 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며, 먼 훗날 회사의
성장사에서 한 시절 귀인이 와서 회사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는 전설이 되고 싶다고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오로지 열심히 일만 하던 직원들이 매일 생산과 출하현황을 정리하고, 주간 업무 보고회의를 한번도 빠짐없이 진행하고, 주간 출하현황과
월말 매출과 손익보고, 월간 매출과 손익예상을 정리하고 공유하면서 비로서 회사가 지금 무엇을 하고 목표를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직원들은 목표 달성과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 시작하였고, 솔선 수범하며 문제점과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말단부터 대표이사까지 신뢰를 내 보이며
어느새 나는 회사의 귀인이 되고 있었다.
작년 3월에 입사하여 연말이 다가오면서 분기별 매출과 손익을 정리하고
정기 경영회의를 만들고, 부문별 실적과 목표달성 여부를 공유하면서 미래를 위해 영입했다는 서울 영업팀들의
초라한 성적과 마냥 매출을 기다릴 수 없음을 경고하며 회사는 환골탈태를 시도하였고,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과 노동 친화적인 정부에 대한 준비로 베트남 진출을 결정하고, 호치민 인근에 공장부지를 매입하고
새해 들어 공장 건설도 시작하면서 회사는 큰 성장의 기틀을 닦았다.
작년엔 입사한지 만 1년이 안되었지만, 매출은 전년대비 30%의 성장을 이루었고, 올 상반기에도 전년대비 50% 성장을 하였고 비수기 계속되던 적자도
두 달 연속 흑자를 이루었다. 특별히
지난 5월에는 전년대비 매출이 90%이상 늘었고, 사상 처음 월 매출 30억을 넘기면서 제법 큰 폭의 흑자도 이루었다. 물론 매출 급증이 전적으로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사전 준비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매출 차질없이, 손익을 최대화하는 노력을 하였기에 큰 보람이었고, 앞으로도 노력여하에
따라 매출과 손익이 지속될 수 있기에 이제는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최소 3년은 일을 해야 회사의 기반이 튼튼하고 성장을 위한 확실한
동력을 만들 것인데, 뜻밖에도 1년 조금 넘긴 시점에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매출이 지금회사의 세배가 넘는 천억원대에 국내 시장점유율 70%이고
영업이익도 100억이 넘는 회사의 대표이사 사장 제의를 받고 한달 넘게 고민하다가 결심을 했다. 내 지난 34년의 경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잘 아는 분야이고, 우선은 합리적인
리더쉽이 필요하지만, 회사의 미래 사활이 걸려있는 특정 기술 개발이 내가 자신 있는 분야이기에 나의
경험과 경력이 충분하고 앞으로 남은 정열을 쏟아 부을 가치가 충분한 회사이라는 생각으로 결정을 했다.
한달여 고민 끝에 새 회사 회장을 만나 최종 면접을 하고 모든 조건을 결정하고 나니, 이제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리고 회사를 떠나야 하나 걱정이 앞선다.
지금회사 회장님의 사위이며 젊은 사장의 매형인 상무인 친구가 나를 제일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데, 우연히 술자리에서 새회사에 대한 제안을 해온 교수님의 전화를 옆에서 듣고는 가슴앓이를 하더니 한달여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눈치채고 어느 날, 내가 결심을 마치고 얼마 안되어 물어본다. 그리고 내 말에 낙담을 하여 울상이다.
이제 회사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데 떠나면 어떻하냐는 그 친구에게 이제는 시스템이 갖춰졌고, 미래 성장 전략에 대해 늘 함께 공유하며 만들어 왔으니 이제는 당신이 앞장서면 되고, 그리고 내 미래에 대해 얘기를 해 주니 나를 잡을 명분이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젊은 사장과 술 자리를 가지고 얘기를 했다. 베트남 출장을 막 다녀와서 늘 그렇듯이 소주잔을 똑같이 원샷으로 두
병을 마실 때까지 베트남 사업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사장에게, 세병째 소주병 뚜껑을 따고 나서
내 미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미래가 이별임을 알아 차리자 마자 눈물을 흘리는 젊은 사장에게 말문이 막혔지만 그래도 덤덤하게 설명을 하니 휴지를 들어 눈물을 닦더니 쿨하게 말한다. 제가 감히 부사장님을 잡을 수 없겠군요.
내가 떠난 이후의 조직에 대해 한참 얘기를 하는데 방해꾼이 오는 바람에 화장실에 가면서 두번째로 나를 믿고 따르는
생산관리 담당이사에게 전화를 하니 누구를 만나고 있다 길래 간단하게 사장에게 한 얘기를 하고 자세한 얘기는 내일하자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얘기를 들으니 그 친구는 선을 본 여자랑 저녁을 먹다가 내얘기를 듣고는 낙담하여 그 길로 서해안
바닷가로 달려가서 새벽 5시에 돌아왔다며 울먹인다. 겨우 1년하고 몇 개월인데
정을 떼고 이별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보다.
젊은 사장은 그날 밤새 술을 마시고 귀가를 안 하여 사위네 식구들과 사장 아들과 함께 사시는 회장님이 전혀 모른
상태로 다음날 출근하여 평소처럼 차 한잔 마시며 현안 간단히 보고하고 어제 사장에게 한 얘기를 하고는 사장님이 쿨하게 받아들였다는 얘기를 하니
회장님이 허허~하고 웃으신다. 평소 집에서 사위랑 셋이서 회사 얘기하면 항상 아들인 사장보다 부사장을
더 신뢰하신다는 사위의 말 만큼이나 늘 변함없이 회사를 지키며 사실상 회사를 끌고 가는 부사장의 폭탄선언에 넋을 잃은 회장님은 그러잖아도 사장은
영업과 해외사업 맡기고 부사장을 총괄 사장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라며 황당해 한다.
아직 모두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회사의 간부들에게는 개별적으로 모두
내 미래를 얘기했고, 모두가 한결같이 나는 언제까지나 회사를 지킬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첫 반응은 말문이 막히고, 황당해하며 금새 눈망울이 축축해짐이 느껴진다.
귀인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길지
않은 기간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모든 것에 애정이 만들어 졌음이다. 매일 제일 먼저 출근해서 작업복에 작업화를 신고 공장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부문별, 책임자와 담당들과 마음으로
업무를 논의하고 격려를 해 주면서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만들어 졌음이라.
이제는 두 주일 남은 기간, 그 애정을 깊은 인연과
우정으로 만들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나는 떠나야한다. 1년 4개월의 기간이 내
인생의 또 다른 큰 경험이 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기에 이별 준비하기가 참으로 어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