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회복'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주변에서 종종 듣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을 사전적으로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공식적인 정의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이해하고 소화한 '주의 회복'에 대해 조금
교통(제)하고 싶습니다.
한 20여 년간 생활해 오면서 제가 이해한 주의회복은 다음 두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갈라디아서2:20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나 주님을 영접한 사람으로서 바울처럼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그러한 생활을 사는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는 부인하고 말 것도 없이 '자기'를 삽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허다한 분들도 거의 대부분 생활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자기를 삽니다'.
오늘 날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엔 가장 큰 문제요 어려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쳐도 막상 생활 중에 그런 실재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헛 것입니다.
헛 것이란 아는 단계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과녁을 벗어나 멀리 빗나가 버린다면 그 쏘아 댄 화살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추구하는 믿는 이들이 고민하고
알고자 하는 대목입니다. 즉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실재로 '자기를 부인하고-부인하려고
할 수록 사실은 자기가 더 살아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스도를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주의 회복을 진진하게 고려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사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다음 요점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둘째, 요한복음 6: 57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인 우리가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살수 있을까를 가지고 씨름하던 중
사역의 공급을 통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는 위 구절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게 큰 구원이 되었습니다. 아 하 그리스도를 인하여 사는 것은
'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먹음으로 가능하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보니 우리의 육신의 생활도 먹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생활도 원칙이 같았습니다. 많은 때 '나(주 예수님)'를 안
먹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나'외의 것을 먹습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뭔가 밖의
것을 자기 존재 안으로 받아들인다 정도로 생각하면 '예수 먹는다'는 성경의 표현(어떤
사람이나 단체의 주장이 아니라)이 덜 생경하게 들릴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분들에게는 새로울 것이나 이 방을 들어오는 대부분의 분들은
소위 주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로 한 분들임으로 새로울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생활 중에 어떻게 '나를 먹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는지에 대한
체험의 말을 조금 더 하고자 합니다.
현재 어떤 국제 집회에 참석 중인데 오전 8:30부터 오후 3:30 까지 네 번의 집회가
있고 오후에 잠깜 쉬고 저녁에 밤 9:30분까지 또 마지막 집회가 있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또 차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세면하고 하면 어떤 때는 10;30, 어떤 때는 그 후에
잠이 듭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뭔가를 듣고 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배경설명을
드리는 것은 그래야 다음의 사례가 더 실감나고 현장감이 있을 것 같아서 입니다.
이제 집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떠 날 때가 되니까 헤어지기 전에 만나고 교통해야 할
사람들과의 약속이 오후 휴식시간대(3:30-5:30)로 몰렸습니다. 한 지체가 교통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시간에 몇 가지 하려고 했던 일중에 그 일이 포함되게 되었고 주님께 어찌
해야 할지를 묻다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다른 분들은 쉬러 다들
숙소로 돌아가고 저만 혼자 남았습니다. 약속 시간에 오기로 한 분이 안 나타나서 혹시
윗층으로 가셨나 하고 올라갔다가 없어서 혹시 현관문에서 기다리나 가보니 없었습니다.
혹시 뒷쪽으로 문이 있나 해서 가보니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전의 저처럼 '아니 약속을 했으면...'부터 시작해서 생각 속에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상대방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마음이 상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주님께 가져갔습니다. 오 주님 이런 상황을 주께
가져갑니다. 사정을 다 알수 없으나 이 시간 주님을 얻기 원합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이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분에게도 평강을 주소서! 만일 꼭 만나야
할 일이라면 주님이 늦더라도 보내 주소서! 만일 오지 못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더 얻는
기회로 사용하소서! 등등 짧은 기도를 하고 메시지 개요를 꺼내들고 1번 메시지 개요를
다시 말씀중심으로 묵상하고 누려가는데 4시가 조금 넘어서 저 쪽에서 바로 그 지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듣고보니 갑자기 불가피한 일이 생겨서 다른 지체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고 급히 오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남은 시간에 좋은 교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사는 밖의 환경은 늘 복잡하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밖의 환경이 어떠하든 내적으로는 '자기'를 살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살 것
인지의 양자택일입니다. 아침에 참되게 그리스도를 먹었다면 내가 부인되고 그리스도가
살아 표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많아도 '먹는 것'이 부실한 사람은
그냥 생긴대로 자기를 살아 표현할 것입니다. '약속시간을 어기면 어쩌자는 거냐, 그럴 수
가 있나, 나를 무시하는 거냐....' 등등의 말을 직설적인 사람은 직접 상대방에게 쏟아낼
것이고, 종교적인 사람은 꾹 참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 두 경우가
달라 보이지만 둘 다 그리스도를 산 표현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종교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고상하게 보이는지를 알려
주는 교양지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빛입니다. 평강입니다. 안식입니다.
이 '땅의 임금'의 권세를 초월한 분이십니다. 자기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우리 생활 중에 이러한 실재가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주의회복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그분의 인격을 살아 표현하는
한 무리를 얻는 것'입니다. 이 한 무리의 단체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또 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이 창1:26의 성취입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thekingdo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