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청지 연못 잉어
병마용 갱
양귀비 상
연운에서 서안까지(5)화청지,병마용갱,대안탑(8.21)
아침 6시에 울린 모닝콜에 의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밀어내고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 후 일정이 바쁘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의해서 체크아웃을 빨리 하고 호텔을 빠져나갔다. 서안은 황사가 심한 편으로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황사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운이 좋게도 황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가이드는 황사가 발생해서 머리 염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농담까지 해서 한참 웃었다. 가이드의 조건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호텔에서 한참 버스를 타고 가서 드디어 화청지(華淸池)에 닿았다. 화청지는 서안에서 30㎞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온천이다. 중국의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화청지"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가이드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는데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5원이 필요했다. 그 물로 세수를 하였으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얻어갈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연못에는 양귀비의 상이 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4대 미인중 한 명인데 4대 미인에는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그리고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라고 한다.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또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및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 양귀비 등 미인들의 미모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고 한다. 가이드는 양귀비는 키가 180여 센티에 몸무게만도 8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육중한 몸이었다는 것을 듣고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과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곳을 나와서 우리들은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기 위해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에 길 가 에는 석류를 파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중간에 산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제의 능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곳은 관람코스가 아니라 아쉬웠다. 길옆의 밭에는 석류과수원이 있었고 막 익어 가는 석류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한참 동안 버스가 달린 후에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주차장에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그 곳은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관람하기 위해서 와 있었다. 중국의 국민들은 물론 서양 사람들과 다른 동양사람들이 있어 인종의 전시장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나라의 관광지처럼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객행위를 하지만 그대로 지나갔다. 박물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전동차를 타고 갔다.
진시황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자 중국의 국보이기도 하단다. 지금으로부터 6,70년 전부터 농민들이 우물을 파거나 밭을 갈다가 병마용이 나오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쟈오쟈(슝소)촌 농민이 2개의 머리를 조아린 진흙인형을 다시 발견했다고 한다. 불심이 강한 그 농민은 그 모양이 마치 진흙으로 빚은 보살 같다고 여겨 특별히 토지묘를 짓고 봉양했다.
1974년 3월 시양촌의 한 조합원이 우물을 파다가 원형주둥이 모양의 도자기를 하나 발견하고 다시 파 내려가 보니 그것은 도용(憬摸: 도자기 인형)의 몸통 위에 세워진 질항아리였다. 그는 물이 나오지 않자 또 다시 이 "질항아리"를 불길하게 여겨 매달았다. 수질보호원이 린통박물관으로 가져가 감별을 청했으나 아무도 그 진가를 알아내지 못하자 임시로 박물관에 보관하고 2개월 여에 거쳐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세 개의 도용을 복원해 냈다. 후에 고고학자들의 탐사로 이곳이 바로 장방형의 진대 병마용의 갱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1976년 본격적인 탐사를 거쳐 이 갱의 북쪽 20~25m 지점에서 두 곳의 병마용 갱을 더 발견해 냈다.
그들이 발견한 시점에 따라 각각 병마용 1호 갱, 2호 갱, 3호 갱으로 이름이 지어졌으며 세 갱의 총면적은 2만2천7백80m 이다.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고고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병마용 1호 갱은 세 개의 갱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차와 보병이 사이사이 배치된 주력군 진영이다. 1979년 개방되었는데 그 안의 모습은 2천년 전의 고대 대군의 진영으로 완전무장 및 완벽한 진영구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웅장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잠시 역사와의 거리는 사라지고 어떤 신비한 힘이 하늘을 뒤흔드는 피의 함성과 요란한 전차소리로 가득한 고대의 전쟁터에 선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2호 갱은 1호 갱의 북쪽 약 2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6년에 발견되었으며 진용 갱의 정수란 칭호에 걸맞게 고대군 진영의 비밀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이다. 4개 소조의 유기적 조합에 의한 전차, 기병, 노병의 조직편제로 공격과 방어를 적절하고 조직적으로 병행하도록 했다.
3호 갱은 1호 갱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1976년에 발견되었고 1987년에 개방되었으며 규모가 가장 작다. 1호 갱과 약 25m 거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2호 갱이 약 1백20m 떨어져 있었다. 경이로운 것은 1980년 12월 진시황릉 서쪽 20m 지점에서 두 대의 대형 채색 청동마차가 발굴되었으며 복구 후 1983년 10월 1일에 외부에 전시됐다. 두 대의 마차는 네 필의 말이 하나의 끌채에 연결된 형상을 하고 있으며 3천4백 여 개의 크고 작은 부품들로 조립되어 있다고 한다. 마차의 부설도구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며 최상급으로 아주 정교하게 제작된 청동기의 진귀품으로 세계 고고학계에서 발견된 최대의 청동기이기도 하다.
진 병마용 갱에서 출토된 보검과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출토된 돌 구조 건축물이나 석기들을 비교해 보면 당시 중국의 과학기술수준이 얼마나 앞서가고 있었는지 짐작케 할뿐만 아니라 청동검, 청동마차 등이 이를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 곳을 나오면서 '천 원'을 외치는 중국인 상인들의 소리를 뒤로했다. 가이드의 말이 가짜이거나 값이 비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우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털이라니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우리들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중국식의 상술 하나를 발견했다. 가이드는 미리 주문을 받은 병마의 모형을 가져다주었고 그림을 파는 사람들, 주전자를 파는 사람이 우리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들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인 대안탑으로 가기 전에 실크제품 판매장으로 갔다.
가이드의 안내로 간 그 곳은 실크와 옥 제품을 팔고 있었는데 값이 그리 싼 편은 아니었지만 물건의 질은 믿을만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일행들은 많이 구입을 했다. 실크 스카프, 실크 티셔츠, 핸드폰 줄이나 팔지 등을 샀다. 잠시 후에 우리들은 대안탑으로 향했다.
대안탑은 648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일찍 사망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의 명복을 빌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절인 자은사(慈恩寺)에 위치한다. 고종은 절이 완성된 후 매일 조석으로 두 번씩 자은사를 향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대웅보전 뒤의 큰 탑이 바로 서안시의 심볼로 일컬어지는 대안탑이다. 건축물을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여 고급목재를 사용하고, 주옥금취(珠玉金翠)와 오안육색(五顔六色)의 채회를 하였으며, 오도자(吳道子), 윤림(尹琳), 염립본(閻立本), 정건(鄭虔), 왕유(王維) 등 당시 저명한 화가들이 자은사에서 벽화를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당대의 자은사는 당대 말기 전란에 의해 훼손되고, 현재 대안탑만 보존되고 있다. 후대 사원이 여러 번 중수하였지만 모두 당대의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현존의 사원 건축은 당대 자은사의 서원(西院)에 해당된다고 한다.
대안탑이란 명칭의 유래는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기러기 설화가 가장 신빙성 있게 전해진다.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법사가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일어 버렸는데 그 때 어디에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길을 인도해 주었다. 부처님이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여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雁塔, 기러기탑)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대안탑에서 우리들은 서안역으로 향했다. 그리 밀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문제는 낙양역에서는 외국인 전용 대합실이 있었는데 우리들이 이용할 기차는 우리나라의 비둘기호와 같은 것이기에 그저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들이 대합실 한 쪽에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5시 6분 출발 예정인 열차가 연착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답답함이 우리들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