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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로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주현절 마지막 주일 예배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날을 기념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늘로 존재로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모습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친히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이 되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또한 또 다른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며 섭리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며 인도하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주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 말씀을 보면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산에 머물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의 시종 여호수아와 함께 사십일 동안 산위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지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부족 신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전 조상으로부터 구전되어오던 신앙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단지 조상들이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아련한 이야기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에서의 율법과 계명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이 신앙공동체로서의 형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14절의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끝 내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서서 기다리는 것이 진짜 믿음이자 신앙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즘 우주 역사를 140억년 쯤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가 나타난 것은 7000년 전 쯤 입니다. 아주 길게 잡아봐야 20만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주역사 중 인류가 나타난 7000년 전은 우주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보면 기껏해야 0.04초에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한 인간이 아주 오래 사는 100년으로 계산해보면 0.0005초입니다. 시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마치 우리가 사는 100년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생각, 또는 다 기다렸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늘 직면에 있기 때문에 무의식의 영역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또 다른 나의 일 부분을 늘 갖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두렵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고, 내가 욕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고,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심해지면 공격적이게 됩니다. 상대방을 무시해서 공격적이기보다는 내가 두려워서 공격적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과 기다림이 갈등합니다. 두렵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두렵기 때문에 급박하고, 두렵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 있을 동안 분명히 기다리라고 했고, 또한 17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렬한 불같은 현상으로 하나님의 존재이신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이신 영광을 체험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도 확신하지 못하고 죄에 빠지는 모습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지만 자꾸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이 땅에 엉뚱한 우상을 선택하는 우리들이 모습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본문은 박해와 고난으로 신앙의 터전이 흔들리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확인시켜주는 베드로 자신의 신앙경험의 간증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후서 본문과 마가복음 본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말하는 변화산의 경험을 베드로후서 말씀을 통해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갔다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진정한 메시야이자 구원자이심을 발견하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라운 체험을 하였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도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자 구원자임을 체험했으면서도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끝내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 우리를 당신이 구원의 역사에 함께 동참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갈길을 몰라 방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예언자들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약속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요셉을 통해서 자신들을 이집트로 불러주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집트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한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서 노예들이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 시켰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계명과 율법을 주어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을 세우고, 새로운 땅을 허락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결국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해방된 삶을 살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엘리야는 혼자의 몸으로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과 450명의 바알선지자들과 싸워서 이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엘리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4:4-6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호렙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1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오실 예수님께서 오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던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다시 예언된 엘리야로 온 세례요한까지 이들은 예수님이 이루실 큰 온 인류 구원의 과정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임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참 사람이요, 또한 참 하나님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의 공통적인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40이라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40년간 궁전에서 생활했고, 40년간 도망쳐서 광야에서 양을 쳤으며, 마지막에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와 있듯이 시내산에 머문 날도 40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아세라와 바알선지자 850명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아합왕과 왕비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도망치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준 음식을 먹고, 40일 동안을 걸어서 하나님이 산 호렙산으로 이동했다고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0일동안 광야에 가셨고, 그곳에서 시험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40의 숫자는 새로움이 숫자입니다 벗어남, 해방, 탈출을 의미합니다. 옛 세계와의 단절이며,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고난의 시간이자 연단이 시간입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베드로가 이곳에 초막을 짓고 여기에서 살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도리어 산 밑으로 내려오면서 자신이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도리어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너희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냐, 바알을 선택할 것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화려하게 빛나는 눈에 보이는 황금송아지냐?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들을 위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과는 다른 삶, 새롭게 거듭나고 태어난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고난의 길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현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또한 하나님 그 자체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다시 부활하셨고,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삶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두려움과 화려함 영광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과 믿음, 고난을 선택하는 삶임을 늘 기억하며 일상의 삶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영광의 체험들을 잊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