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그리는 남자
껍질 비벼 땅콩 까먹듯 살아낸 5월, 이제는 빈껍데기만 남았다. 벽에서 달력을 내려 한 장을 넘긴다. 아직 손때 묻지 않은 6월이 까만 먹물을 뒤집어쓴 채 네모 안에 웅크리고 있다. 시간의 기차는 6월을 끌고 기적을 울리며 오늘이라는 들판을 달려간다. 계절의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진 걸까. 눈 깜짝할 사이 적응도 하기 전 가랏마을 논에는 모내기를 다 마쳤다. 모내기가 끝나면 세월의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남편은 퇴근하고 모내기한 논을 다녀오느라 옅은 어둠을 온몸에 묻히고 들어왔다. 그리고 저녁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약속이 있다며 씻자마자 옷을 갈아입고는 차 시동 켜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휴일이라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였다. 남편은 부엌으로 오더니 달력에 표시했냐고 묻는다. 아직이라고 하니 볼펜을 가져와 숫자 밑에 검은콩 알만한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나서는 이전에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다시 한번 세어본다. 일 갔다 오고 난 후 달력에 표시하는 것이 요즘 들어 남편의 즐거움이 되었다.
남편의 직업은 농사를 지으며 때때로 건설 현장에 나가 일을 한다. 결혼 후 첫아이를 낳고 분윳값이라도 벌자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 어느덧 33년이 되었고 이제는 현장 일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일머리를 훤히 아는 누구나 인정하는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설일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결혼 전까지 집에서 농사일만 했던 남편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걸 자존심 상해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느니 농사일을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 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갈수록 타산이 맞지 않았다. 적은 농가 수입으로 두 아이의 학업 충당은 어림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현장 일을 나가긴 하였지만, 표정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야간을 하며 열심히 살아보려는 내 눈에 그런 모습은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가장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서 큰소리 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19로 지구가 시끄러워졌다.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일상이 무너지고 멈추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예로 자영업자들의 한숨 소리가 하늘을 무너트릴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둘 문을 닫는 곳이 생겨났다. 더욱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한 학교들, 그 타격이 온전히 학원가를 덮쳤다. 친구가 운영하는 학원도 비껴갈 수 없었다. 친구는 많은 고심 끝에 20여 년을 해오던 학원을 접기로 하였다. 친구 부부는 실업자가 되었다.
친구 남편은 그 뒤로 남편을 따라 현장 일을 함께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현장 일을 한다고. 분명 얼마 못 버티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두통을 유발하지 않은 단순노동인 현장 일을 친구 남편은 의외로 재밌어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남편의 불만은 사라졌다. 도리어 출근하는 날을 즐거워하였다.
친구는 말하였다. 남편이 오늘은 어느 현장으로 일을 하러 갔고 무슨 일을 했으며, 한 달에 며칠을 일 갔다는 걸 꿰는 거였다. 출근한 거조차 모르는 나와는 상반된 친구 모습에 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현장 일을 하는 남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응원하고 살뜰히 챙기는 모습은 나에게 귀감(龜鑑)이 되었다.
나는 변하기로 하였다. 친구처럼 남편 일에 관심을 두기로 하였다. 힘든 일을 하러 가는 남편의 아침밥을 정성 다해 차려주었고, 친구처럼 남편의 일간 날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오늘 일간 거 달력에 표시했어?” 그 한마디가 남편한테는 응원의 메시지가 된 걸까. 남편은 퇴근하고 돌아와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로 날짜 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고는 마치 콩의 개수를 세듯 달력에 그려진 동그라미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말이다.
삶의 무게는 언제나 상대방 것보다 더 커 보여 마음의 시야를 가린다. 응원보다 원망이 앞서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보다는 후벼파는 데 더 열중하며 살아왔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칼날을 남편한테 토해냈던가를 되짚어 본다. 한 사람 삶의 소중함을 꽃처럼 바라보는 연습을 할 일이다.
달력 앞에 볼펜을 들고 서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6월의 달력에도 남편이 그려놓은 콩알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첫댓글 훌륭한 남편이십니다.
그 동그라미가 남편 분의 기를 확실히 살려줍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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