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와 게
우리네 삶의 축소판은 바둑판 위 흰 돌과 검은 돌이 아닐는지.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순간 상황에 따라 검은 돌을 집기도 하고 흰 돌을 집기도 하면서 서로의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 결혼 후 남편 다음으로 가장 언쟁이 많았던 사람은 함께 사는 시어머님이 아닐까. 사는 내내 꽃밭이길 바랐지만, 온실 속이 아니므로 노지 뜰에는 때때로 비가 내리고 태풍이 불어왔다.
치매는 초기, 중기, 말기로 나뉜다. 그리고 치매 증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그중 간략하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난폭한 치매와 얌전한 치매로 구분 짓는다. 시어머님은 현재 중기치매를 앓고 계신다. 그나마 퍽 다행인 것은 두 가지 치매 유형 중 대체로 얌전한 치매에 속한다. 일상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본인 손으로 밥은 먹을 수 있고 변기 물 내리는 건 잊어버렸어도 화장실 사용은 가능하다.
술 포대 남자( 매일 술에 절어 살아서 남편한테 붙여진 별명)는 한식을 맞아 사촌들과 모여 조상님 산소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남을 술로 풀어내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남편은 간데없고 술떡인 사람이 들어왔다.
그날따라 착한 마음이 들어 일요일은 늦잠을 반납하고 이른 아침밥을 차려내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찌개가 다 끓기도 전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먼저 들던 사람이 거실 주위를 뱅뱅 돌기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재차 말하였다. 어서 와서 밥 먹으라고.
전체 틀니를 하는 남편, 틀니가 없어졌다고 한다. 누가 황금도 아니고 입안에 들어있는 걸 일반틀니를 빼간단 말인가. 처음에는 남편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의 입을 보자 합죽이가 되어있었다.
남편의 평소 행적은 재떨이든 담배든 지갑이든 내 눈에 띄게 두지 않는다. 물건의 가격과 상관없이 무조건 내 키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둔다. 무슨 가족끼리 키 자랑하는지 대체로 없어진 물건은 냉장고 위, 장롱 위, 하물며 화장실 선반 위에까지 올려놓는다.
나는 남편의 평소 습관을 따라 냉장고 위 장롱 위를 샅샅이 살폈다. 그런데 틀니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구토하다가 화장실 변기속에 박혔는지 일회용 장갑을 끼고 더듬는 사태까지 벌였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은 아내한테 책잡히는 사건을 저지르고는 미안했는지 온종일 소파에 누워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 5시가 되어 나는 축사로 갔다. 구수에 사료를 주고 짚을 펼쳐주고는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자꾸만 시어머님께서 부르시는 거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테라스로 가보았다. 시어머님은 소가 밥 달라고 자꾸 소리를 지른다고 말씀하셨다. 소 사료는 조금 전에 주고 왔고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님께 소밥은 주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다시 부엌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자꾸만 나를 부르며 소가 소리 지른다고 어서 가서 사료를 주라고 한다. 남편은 소파에 누워있는데 며느리인 나만 불러대셨다.
갑상샘 수술 후 큰 소리로 말을 하게 되면 나는 목 통증이 와서 일주일을 고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를 위해 되도록 부드럽게 조용조용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성화에 인내의 한계는 이미 목울대를 넘어서고 말았다. 집안의 적막이 쇳소리 나는 나의 고함에 찢어지고 말았다.
“소밥 줬다고요. 내 귀에는 안 들리는데 왜 자꾸 운다고 해요. 의자를 치워버리든지 해야지.”
걸음걸이가 불안정해 우리 집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는 시어머님을 위해 나는 밖이라도 보시라고 안락의자를 사드렸다. 그 후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어머님한테는 없어서는 안 될 애착 의자가 되었다. 수면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애착 의자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셨다. 좋은 맘으로 놓아드린 의자였지만 가끔은 마당에서 일하는 며느리를 보시고 시시콜콜 간섭하기도 하였다.
솟구쳤던 불덩이가 가라앉았다. 저녁밥 먹으라는 소리에 시어머님도 남편도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은 연신 수저와 젓가락질을 하며 밥과 반찬을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시어머님은 식탁 앞에 바른 자세로 앉지 않으시고 삐딱하게 앉아 왼쪽으로 시선을 둘뿐 수저를 들지 않으셨다.
시어머님은 아까의 상황이 못내 서운하셨고, 아들이 며느리한테 한마디 하길 바라셨던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난리 났을 상황이지만 지금 남편은 입이 열 개라도 새로운 틀니를 얻으려면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어머님은 그날 저녁 금식을 하셨다. 틀니 잃어버린 가재는 게를 모른 체 하였다.
첫댓글
가재가 게편을 안드는데에도 다 이유가 있군요~ ㅎㅎ
일상을 글로 바꾸니 작품이 되었습니다.
글의 마술사가 되시길...
넵, 마술사가 되고싶네요.
재미있습니다.
이 바다 시스템이면, 가재는 늘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로 일관해야 할 듯합니다.치매 노모를 가정에서 모시는 일은 앞으로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겠습니다. 모셔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심정을 알겠습니까? 무조건 존경합니다.
수연님 오랜만입니다.
치매 시어머님을 모시는 일상을 재미있게 그려주셨군요. 가제는 당연 게 편이지만
상황 판단이 빠른 술 포대 남자가 침목으로 일관하는 삶의 지혜가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