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당귀신
문일선
화장실 앞이다. 모자를 공손히 벗어들고, 옷깃을 여미고 나서, 용변을 보고 나왔다. 옆에서 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마누라가, 화장실 가는데 무슨 모자까지 벗고, 그러냐. 면서 픽, 하고 웃는다. 어 허! 어른 앞에서 모자 쓰고 인사하는 것 봤소? 밖에서 붙어오는 온갖 잡신들을 떼어주시는 주당귀신께 깍듯이 례를 갖추어 야지요. 나는 짐짓, 점잖은 표정으로 마누라를 쳐다보며 화장실에 계시는 주당귀신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우리 집은 원래 귀신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지난날 어머님은 집을 지키는 성주귀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귀신, 집터를 지키는 터주귀신, 뒷간(화장실)을 지키는 주당 귀신, 삼신할머니, 축신 등등... 여러 귀신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셨다. 아침이면 제일먼저 광으로 들어가 배가 불룩 나온 쌀 찻독(항아리)에서 하얀 쌀을 바가지에 퍼 담아 성주단지에 한줌의 쌀을 넣고, 성주 신에게 집안에 운을 비셨다. 희미한 여명 속에 나무 정재문(부엌문)이 삐거덕 소리로 아침이 열리고 어머님은 부뚜막위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가셨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스며있는 새벽, 첫 두레박의 우물물을 큰방 아궁이 선반에 얹혀있는 물그릇에다가 아침마다 새로운 물로 같이 주시면서 부엌 조왕귀신에게 가족에 안녕을 비셨다. 하얀 사기물그릇은 연기에 까맣게 그을려져 있었지만 어머니의 손때로 항상 반들거렸다.
섣달 동짓날은 동지 팥죽을... 정월 대보름에는 가마솥 큰 시루에 찐 찰밥을 행랑채와 창고, 외양간, 장독대, 우물가등 집안 곳곳에 여러 귀신들을 위해서 정성스레 차려 놓으셨다. 또한 가족 중에서 누가 몸져 눕기라도 하면 주당살(周堂煞)을 맞았다고 지체 없이 이웃집으로 달려가서 마을에서 가새(가위)점으로 유명한 이웃집의 허리 굽은 할머니를 모셔다가 큰방 아궁이 앞에서 푸닥거리로 살을 풀어내셨다. 그 무렵 우리 집은 큰 고개 넘어 30리길의 의원영감님 보다는 가위 점의 명의인 이웃집 할머니가 우리 집의 단골 주치의였다.
어머님은 행여, 자식들 몸에 조금만 이상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삼신할머니한테 매달려서 우리새끼 눈 씻은 듯이 낫게 해 주시라고, 싹싹 빌고, 또 비셨다. 그 애절한 몸짓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나 깨나 자식들을 위해서 집안에 귀신들을 섬기시던, 어머니의 아들이 자식을 낳고, 귀여운 증손여가 태어나는 동안, 나는 어머님이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섬기시던 집안에 귀신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직장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미신이라고 터부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내가 어느덧 정년퇴임을 하고, 서울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이 육아휴직 3년이 끝나자,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 본적이 없는 4살짜리 손녀를 우리 시골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한사코, 울며불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어린것을 화장실 잠깐 다녀온다며 억지로 떼어놓고, 돌아서 가는 딸도 울고,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에 달구 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에 두 노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무리 얼레고 달래본들 그 여린 마음을 어찌 채울 수 있었을까? 난방시설이 형편없는 우리 시골집은 비상이 걸렸다.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몸에 조금만 열이 나면, 전전긍긍 이였다. 그 무렵 우리부부는 지금껏 잊고 살았던 집안귀신들을 어느 순간부터 의지하고 있었다.
특히 내가 장례예식장을 다녀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밖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문 앞에 가까이 다가서면 옷깃을 여미고 나서 조폭처럼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생리현상 상관없이 조심스럽게 용변을 본다. 흘리지 말아야 할게 어디 눈물뿐이겠는가?
으레 배뇨(排尿)뒤에는 몸이 움찔, 움츠러들지만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움찔거리며 흔들어댄다. 내몸에 붙어 있는 잡신들을 주당귀신이 쉽게 떼어주시라는 내 얄팍한 생각에서다. 그래도 양이 안차면, 안채로 들어가기 전에 저만치 화장실 쪽을 향하여 가볍게 묵례를 올리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간다. 사진 속에 어머님이 나를 빤히 보고 계신다. 순간 어머니는 나를 향해 “아나 미신,” 하시며 입을 삐쭉 하실 것만 같아서 얼른 눈길을 피해보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 부터인지 면면히 이어 내려온 어머님의 믿음이 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