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국개신교의 우월주의
들어가는 글
한국개신교회는 태생적 우월주의(胎生的 優越主義)사상을 가지고 있다.
모태교인으로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성장한 필자 또한 삶의 반평생을 우월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적교만에 안주했었다.
장로교회의 예정론과 스스로 택함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 유익하고 공동체 결집력에 탁월한 힘을 발휘하며 신앙성장과 발전에 더없는 동인은 되지만, 자신과 다른 믿음의 집단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와 교만으로 기고만장하는 삶을 고착화 시킨다.
청교도 우월주의의 역사적 배경
한국개신교회를 전한 청교도근본주의는 도전적이며 개척정신이 투철한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정착하고 단시간에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동력은 이 같은 청교도 신앙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학문적 고찰을 외면하는 축자영감설을 바탕에 깔고 있는 청교도근본주의는 노아의 세 아들 중에 함의 계열인 흑인을 노예로 부리며 사람을 매매하면서도, 그의 아들 함을 향한 노아의 저주에서 타당성을 찾으며 백인우월주의가 성경적이라 생각한다. (창세기 9:20-27)
20. |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
21. |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23. |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24. |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
25. |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
26. |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
27. |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그리고 흑인노예의 노동력으로 부를 창출했던 미국남부의 지주들은 남북전쟁에 패한 뒤 남부 테네시주의 한 작은 읍(타운)에서 1865년 백인청년 6명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 테러조직 ' 쿠 클럭스 클랜'이라는 집단, 흔히 `케이 케이 케이(K.K.K.)’로 불리는 공포의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한다. 그들은 백인들인 자신들의 가치관과 기독교에서의 상위적 위치를 획득한 것을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의 바탕에는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기 위한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총체적 교조주의가 흐르고 있다.
한국개신교의 우월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증거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4년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이 땅에 찾아온 개신교선교사들도 저들의 자만심인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힘없고 무지하고 가난하여 나라마저 왜구에게 빼앗기는 대한의 민족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한심해 보였을 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식인종의 나라 무식한 나라 암흑의 나라" 장로교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의 한국관 )
( http://cafe.chosun.com/club.menu.pds.read.screen?p_club_id=minijesus&p_menu_id=79&message_id=429703)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우월주의는 도리어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늘 베푸는 자였고 이민족은 수혜자의 위치였다.
이를 증명하는 예가 있다. 초기 이 나라를 찾은 선교사들을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선교사의 이름 아래 “각하!”라는 호칭을 붙여 불렀고 이 같은 일을 선교사들은 당연지사로 받아드렸던 것이다. (박명수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교수) (http://cafe.chosun.com/club.menu.pds.read.screen?page_num=1&p_club_id=minijesus&p_menu_id=79&message_id=420570)
초기선교사들의 모습이 담겨진 당시의 사진 속에서 선교사들이 멋진 중절모에 연미복 을 즐겨 입고 때로는 지팡이마저 손에 든 모습은 헐벗고 굶주린 이 백성의 눈에는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선남선녀 같이 보였을 것이고 병원을 지어주고 대학을 세우며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문물을 전하는 저들에게 거부감 없이 당연하듯 이름아래 “각하!”를 붙여 존경하여도 마음으로는 늘 모자라고 미안하고 고맙기만 했을 것이다.
검은 사제복을 착용하며 신부님 주교님으로 직급을 부르던 가톨릭처럼 호칭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존경하여 높여 부르는데 싫다할 사람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나-,
이것이 우월주의 사상이 바탕에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선교사들이 “각하!”란 호칭을 묵인한 것이다.
저들을 칙사 대접 하느라 당시의 우리나라 교인들은 선교사가 먼 길을 행차하면 가마꾼 뒤에 앉아 용변을 볼 수 있는 의자 형 변기를 지게에 지고 뒤따르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우월주의가 새롭게 기독교를 받아드린 우리 개신교인의 사상에 선민의식과 함께 접목되어 기독교 우월주의가 胎生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교조주의가 근간이 되는 유교사상에 접목된 청교도의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청교도사상이 한국개신교의 우월주의도 당연한 것 처럼 정착되었다. 그 연장선상에 목사는 섬기는 자가 아니고 가르치는 자로, 敎會는 모임의 장소가 아닌 「가르칠 敎」자를 써서 서당의 訓長같은 모습으로 대접받으며 교인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교육받지 못하고 시대흐름에 무지한 민중에게 기독교가 전해짐으로 한발 앞서 개종하고 눈을 뜬 일부 선각자들이 개화파란 집단을 구성하고 그들은 기독교의 선민의식으로 무장되었다. 그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지한 민중과, 다른 종교집단에 대한 우월주의와 자부심이 택정론 신앙으로 무장되고 자만심이 도리어 당연한듯이 한국개신교에 정착된다.
기독교인이 된 것이 바로 개화된 것이고, 시대를 알고 앞서가는 개화파로 토속종교집단을 얕잡아보는 교만이 자연스럽게 자리 매김 하도록 건국초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개신교의 우월주의는 선교사로부터 대물림 받은 태생적 우월주의(胎生的 優越主義)라는 것이다.
성장한 한국개신교 내적성숙으로 변화되어야
우리는 백인우월주의가 바탕에 깔린 청교도 우월주의나 한국개신교 우월주의는 정보혁명이 도래한 이때에 시국관이 뒤진 시대적 착오임을 알아야 한다.
인류사상에서 가히 비길 혁명이 없는 오늘날의 디지털혁명은 새로운 선교방법을 요구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한 내적성숙을 근간으로 인터넷시스템에 적합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함을 말해준다.
원로 목사이신 백호 지정덕님이 고희를 넘기신 연세에 인터넷을 매개로 선교활동을 하시며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인터넷은 이 시대에 쓰시는 하나님의 나팔이다」고 하신 말씀이다.
전도자가 복음을 가지고 달려가야 했던 과거에는 정보의 매체가 발달하지 못하여 직접 저들과 대면하고 전하였으나 지금은 지구촌이 실시간 정보화로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을 활용하여 이미 거점을 선점하고 저들가운데 동고동락하는 선교사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한다. 이미 그들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전도자의 말보다 저들의 삶을 눈여겨보고 있고 이벤트성 선교와 우월주의사상으로 무장된 배타적인 방문선교는 외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저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저들로 제자 삼는 길은 방문비자로 다녀오는 길이 아니고 저들에게 들어가 저들과 같이 살고 그 땅에 뼈를 묻는 삶이되어야 한다.
필자가 교회쇄신론 3. (속편) 한국개신교가 “배타적”이란 인식에 대하여에서 이미 거론 하였듯이 로마가톨릭보다 역사가 앞선 동방정교회가 국교나 다름없는 러시아나, 가톨릭국가인 필리핀에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방문 관광하는 선교를 한국의 개신교단 대부분이 자랑한다면 국민으로부터 개신교는 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교세를 자랑하기 위하여 유럽에 한국유학생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인이 모여 예배드리며 유럽 국가에 파송된 선교사라 칭하고 자랑하는 이런 일과, 재미동포를 위한 한인교회를 세우고 선교사 운운 하며 교세를 자랑하는 기만은 더 용납되지 않고 현지 목사로 당당히 칭하여 정직한 교회와 목회자로 인식이 되어야 한다.
더 바람직한 것은 공부하기 위해 갔던 이민으로 갔던 그 나라에 적응하기 위하여 가능하면 젊은 세대는 현지인과 함께 그들의 교회에 출석하고 빠른 시일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전파된 유럽의 개신교, 구세군과 성공회는 가난한 이웃을 섬기며 성직자가 교인 앞에 군림하지 않음으로 뜻있는 교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을 눈여겨봐야한다.
> 계속 <
2007년 8월 3일
朴 聖 培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