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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
이 만화 그림을 본 경험이 있습니까? 고슴도치 (porkypine)와 원숭이(포고)이가 대화합니다.
그림 1: 고슴도치, “헤이! 포고, 원시림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단 말이야!”
(오염되지 않은 숲속은 내 마음을 감동케한다!)
포고 (원숭이), “그래 고슴도치야, 나도 그 아름아움을 발로 느껴!”
그림 2: 고슴도치, 이 잡동산이 위로 걸어 나디는 것이 너무 힘들어!
포고 (고슴도치), “그래, 친구야, 우린 지금 적을 만난거여, 이 enemy는 우리들이야!”[1]
이 만화 그림은 미국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이 “우리의 적은 내부에 있다”입니다. 만화 작가인 월트 켈리 (Walt Kelly)는, 국회 의원들이 국가의 번영과 백성들의 행복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보고 비판합니다. 만약 미국이 멸망한다면, 그 원인은 외부의 테러리스트들이나 다른 국가의 침공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대신, 민주주의를 잘못 보호하는 국회의원들 때문이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국가를 무너지게 하는 원인은 외부의 힘이 아닌,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Yep, Son, 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 그래 친구야, 우린 지금 적을 만나거야. 그 적은 우리들 자신이야!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미국 국가에 제한 된 것이 아닙니다. 내부 갈등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모든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큰 회사이든, 작은 사업장이든, 교회이든,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룬 가정에서도 갈등은 존재합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공동체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는 서로의 의견대립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성품이나 가치 기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골을 이루는 길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 문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입니다.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고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사명을 이루는 이 과정에서 내부의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갈등없는 공동체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직면한 갈등을 친밀한 하나됨으로 바꾸는 지혜입니다. 내부의 갈등을 오히려 사명을 이루는 기회로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내부 갈등을 새로운 기회로 The Principle Changing Inner Conflict into New Opportunity”로 정했습니다 (Nehemiah 5:1-13). 내부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 갈등을 기회로 전환 시키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Nehemiah 5:1-13
1그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6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사명의 길에 갈등이 존재합니다. .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 생활이 오래 지속 되면서 자신들의 민족은 독립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무너졌던 신앙과 민족 정신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성벽 재건이 시작됩다 (2:18, 20). 민족이 일어납니다. 그 때, 외부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4:1-3). 동서남부, 4개국이 연합해서 공격했습니다(4:7). 온갖 잔인안 수법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합니다.[2] 외부 공격이 심할 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똘똘 뭉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십니다!”가 있었습니다 (4:20).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 밖에서 쳐들어 오는 외부 공격을 이겨 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발생합니까? 내부적 공격이 일어납니다. 본문 1절을 읽습니다.
그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Now there was a great outcry of the people and of their wives against their Jewish kin [NRSV].
백성들이 하나되어 외부 세력을 무리쳤을 때,[3] 성벽이 중간 이상 재건 되어 갈 때에, 가정이 있는 남자들이 자신들의 아내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 느헤미아를 찾아 옵니다. 이유는 불평을 늘어 놓기 위한 것입니다. 대상은 그들의 형제인 유다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친척들입니다. 자기 친척들을 원망합니다. 교회로 비유하면,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뒤에서 남을 원망합니다. 회사로 따지만, 직원들이 서로 비방합니다. 가정으로 비유하면, 아내가 밖에서 남편의 흉을 보고, 남편은 아내를 비방합니다. 내부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4] 사명을 잃을 수 있는 비참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아쉬운 위기의 순간입니다.
본문은 불평하고 원망을 일으키는 세 가지 요인을 밝힙니다. 첫째는 2절에,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겠다”고 불평합니다. 성전 재건에 모든 힘을 쏟다 보니, 농사 짓는 일을 지속하지 못해 수확을 못한 가정들이 생겼습니다.[5] 두번째은, 3절에,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어야 한다”고 불평합니다. 먹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이 없어진다고 불평합니다. 경제적 어려운 때를 이용해서, 돈 있는 탐심가들이 기회를 만들 것입니다.[6] 셋째는, 4절에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다”고 불평합니다. 세금을 낸 돈이 없어서 땅을 저당 잡히고 은행 빚을 냈다고 불평합니다.[7] 먹고 사는 문제, 땅문제, 세금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돈에 관한 문제입니다. 백성들이 민족의 숙원이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집중했었는데, 반이상이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5절 뒤 부분만 함께 읽습니다.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We are helpless to do anything about it, for our fields and vineyards are already mortgaged to others [NLT].
“우리는 아무 힘이 없다.” “We are helpless to do anything우리는 무엇하나 할 수 있는 도움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지금까지 똘똘 뭉쳐 그 무시무시한 외부의 공격도 이겨 내고, 공사의 절반을 해 냈습니다 (4:6).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불평을 쏟나 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서로를 향해서 원망을 풀어 놓습니까?
어려운 순간일수록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봐야합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갈등을 새로운 기회로 변화 시키기 위해서 살펴 봐야할 내용입니다. 갈등을 피하고, 하나님의 목적을이루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이 일의 성취는 시작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우리들의 인생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대신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느 2:20절을 읽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I replied, "The God of heaven will help us succeed. We, his servants, will start rebuilding this wall [NLT].
외부의 공격이 일어났을 때, 느헤미아가 적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시니리.” 성벽은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문제들도 해결됩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약속을 믿고 하나되어 온 맘으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함께 4:20절도을 읽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Our God will fight for us [NRSV].
오랜 식민지 생활로 인해 약하고 부족한 상태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힘이 되어 싸워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재건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직면했던 공격과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어려울수록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지도층의 불순종이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사실,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벽 재건 때문에 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행하는 과정에 드러났을 뿐입니다. 지도층 인사들이 탐욕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난한 자들이 와서 하소연하기 전까지 그들의 심각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느헤미아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함께 6절을 읽습니다.
“그들의 불평하는 말을 듣고, 나 역시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When I heard their complaints, I was very angry [NLT].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스런 불만을 들은 느헤미야가 크게 분노합니다. 분명한 것은 느헤미아가 분을 냈던 것은 단지 사람을 향한 노여움이 아니었습니다.[8] 자기 친척과 형제들이 외국나라의 포로가 되고, 신앙과 정신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있는 이 현실에서도, 지도층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 느헤미아는 분이 치밀어 올라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많이 가진 사람들을 향한 분노였더라면, 느헤미아는 현재 예루살렘의 총독이기 때문에, 총독의 이름으로 이들을 감옥에 넣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마음 속에 거룩한 분노가 치솟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 백성들이 가난한 사람과 있는 사람들로 마음이 갈려 있습니다. 지도층들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폭리를 취합니다. 출애굽기 22:25-26절에,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고 말씀합니다.[9] 그런데, 이스라엘의 가진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함께 7절을 읽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After serious thought, I rebuked the nobles and rulers, and said to them, “Each of you is exacting usury from his brother.” So I called a great assembly against them [NKJV].
귀족과 민장들, 즉 사회의 고위 관리와 지도자들이 시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이 돈을 빌려 주는 부유층과 돈을 꿔야하는 서민층으로 갈리고, 서민층에서 불평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인권과 삶을 보장하기 위한 재산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10] 가난한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면 채권자처럼 이자를 받지 말고, 이웃의 물건을 전당 잡혔다고 해도, 해지기 전에 돌려 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 가지 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은 받으신 분들이 신앙의 본이 되지 않으면, 불만이 나옵니다. “목사님도 하지 않는데, 내가 합니까?”
어려울수록 경건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 후에, 느헤미야는 사회 지도계층이 한 행동을 인하여 크게 분노합니다. 성경과 다르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불러서 호되게 꾸짖습니다. 지도층의 탐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백성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아는 그들에게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함께 9절을 읽습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Then I pressed further, "What you are doing is not right! Should you not walk in the fear of our God in order to avoid being mocked by enemy nations? [NLT].
당신들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 옳지 않소! 그런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게 되요!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고, 나의 행위에 따라서 벌을 내리시고, 상을 주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삶입니다.[11] 절대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왜, 경건된 삶을 제안합니까? 함께 시편 34:7절을 읽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 도다
The angel of the LORD encamps around those who fear him, and delivers them.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여호와의 천사가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십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영혼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때, 갈등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간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살이고 아내 사라가 90살 일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하하나님께서 이삭을 제사의 희생 재물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이유를 말하지 않고, 이삭을 재물로 드립니다.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창 22:11).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 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느라” (창 22:12). 인생의 위기에 아브라함이 보여 줬던 말씀의 실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따라 옵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말씀합니다. 함께 창세기 22: 16-17절을 읽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아들을 잃게 되는 인생의 위기 가운데, 아브라함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꿨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합니다. 그릇된 신자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경건되 삶을 살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런 용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후원하는 가슴이 있는 리더자가 갖고 있는 특성입니다.[12] 결국 느히메아의 이 결단과 태도는 갈등을 기회로 삼는 비결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귀족들과 벼슬하는 사람들이 느헤이마의 말에 아무 이유를 달지 않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단을 12절에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느헤미아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13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느헤미아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멘”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느헤미아가 말한대로 행합니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느헤미아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내 돈으로 내가 사업을 하는데, 왜 당신이 시비를 겁니까라고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내부적 갈등이 고조 되었던 이 상황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 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이들이 다시 진행됩니다. 왜 법을 어겼던 지도층들이 느헤미의 충고를 듣고 순종을 결단했습니까? 10절을 함께 읽습니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I myself, as well as my brothers and my workers, have been lending the people money and grain, but now let us stop this business of charging interest [NLT].
자신들을 꾸짖었던 느헤미아가 먼저 솔선수범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아는 “나도 역시, 우리 형제와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과,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결코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느헤미아는 말씀 대로 살아가는 실천가였습니다.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의 높은 질적 실천을 요청했던 느헤미아는, 자신이 먼저 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느헤미아의 솔선수범하는 삶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메시였던 것입니다.[13] 리더자의 실천적인 삶은 갈등을 잠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비결입니다.[14] 말이 아니라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하면, 주변은 변화 되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함께 요한 일서 3:18절을 읽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s not merely say that we love each other; let us show the truth by our actions.
무엇에든지, 말이 앞서지 않고 행동이 먼저라면, 우리의 갈등은 새로운 기회가 됩니다. 모든 상황에서 환경에 빨려들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이 있습니다. 주변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경건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줄 믿슴니다.
449 (377) 예수 따라 가며
공동 기도: 환경과 보이는 세계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건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게 하옵소서
[2]대표적인 적이었던 산발랏, 도비야, 그리고 게셈은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2:19). 외부 공격자들은 중상비방을 통해 힘을 잃게 했다 (4:3). 적들은 내부혼란을 일으켰다 (4:8:12).
[3]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ord Biblical Commentary 16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235. 주석가들 사이에 “그 때”에 관해서 이견이 불일치하는 근본 이유는, 5:1-13에는 성전 재건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을 성전건축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오히려 성전이 다 겉축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Williamson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학적 흐름상, 이장이 잘못 배치된 것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기 때문에 이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에다가 기록했다는 것으ㄹ 의심할 진짜 그럴듯한 이유는 전혀 없다. 더 많은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Williamson의 책 234-36를 참고하라.
[4]Gene A. Getz, Nehemiah: A Man of Prayer and Persistence (Ventura, California: Regal Books, 1981), 104-45. Getz은 당시의 이스라엘 상활이 잘 설명한다. “All of these difficulties created an internal crisis in Israel. And of course it meant double trouble for Nehemiah. Not only were the enemies of Israel a constant threat to their security and state of well-being, but now many in Israel were actually taking advantage of others. ”
[5]J. I. Packer, A Passion for Faithfulness: Wisdom From the Book of Nehemiah (Wheaton: Crossway Books, 1995), 119.
[6]Raymond Brown, The Message of Nehemiah: God’s servant in a time of change, The Bible Speaks Today (Downers Grove, Illinois, U.S.A./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98), 87.
[7]Ibid. 당시, 페르시아 왕은 식민통치하는 지역의 행정 관리를 넓히면서, 포도원과 밭에 부과되는 세금을 인상했다. 결국, 급격히 인상된 세금을 지불못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8]John G. Butler, Nehemiah: The Wall builder (Clinton, Iowa: LBC Publications, 1998), 138.Butler은 느헤미아의 분노를 이렇게 설명한다. “All anger is not evil. Much anger that is expressed is indeed evil, but not all anger is. Scripture verified this fact when is exhorts us, ‘Be ye angry, and sin not’ (Ephesians 4:26). Nehemiah was angry but sinned not in his anger. His anger was a righteous anger. He was angry at greed.”
[9]담보를 제공하고 빚을 꿔 주는 관행에 관한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생활 보장하기 위한것이었다. 특히 이자에 관해서는 “그에게 돈을 빌려 줄 때는 이자를 받거나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에게 이자를 받을 생각을 하고 돈을 빌려 주리 마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레 25:36-37). 그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서 레위기서 25장에서는 돈을 빌려 주는 대상을 “네 형제” 혹은 “네 동족”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11]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volume 1 (Chicago: Moody Press, 1980), 399-400.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레 arey"”인데, 앞에 나타난 장엄한 모슴 때문에 감정이 복받친 두려움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을 두려워하여 산 가까이에 오지 못했다 (신 5:4-5). 높은 산에서 일어나는 불의 존재 앞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마음의 상태가 경외를 나타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반응하는 정직한 삶 혹은 경건되 삶의 태도를 뜻한다.
[13]Clarence E. Macartney, Preaching Without Notes (New York: Abingdon Press, 1946), 178. 한 시대, 미국의 기독교 이끌었던 Dr. Clarence Mccartney는 설교자의 실천적 삶에 관해서 이렇게 나눴다. “The better the man, the better the preacher. When he kneels by the bed of the dying or when he mounts the pulpit stairs, then every self-denial he has made, every Christian forbearance he has shown, every resistance to sin and temptation, will come back to him to strengthen his arm and give conviction to his voice. Likewise every evasion of duty, every indulgence of self, every compromise, with evil, every unworthy thought, word, or deed, will be there at the head of the pulpit stairs to meet the minister on Sunday morning, to take the light from his eye, the power from his blow, the ring from his voice, and the joy form his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