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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ving, Not Just Surviving (Nehemiah 5:14-19)
2005년 8월 말, 미국 남부 지역에 대형 태풍이 몰려왔습니다. 이 태풍의 이름이 “허리케인 카트리나”입니다. 카트리나는 폭우와 함께 시속 280km의 강풍이 뉴오리언스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자연재해로서는 최대의 참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도시의 80%가 물속에 잠겼습니다. 미쳐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은 산더미처럼 밀려 오는 거대한 파도 속에 묻혀서 죽었습니다. 인터넷 위키백과 사전에 보면, 이 태풍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는 1만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경제적 손실은 911때가 200억 달러였는데, 카트리나의 피해 복구비만 1천 500달러였고, 보험청구료가 1000억 달러로, 911의 10배가 넘었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국판 쑤나미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때 남부지역 사람들에게 유행했던 티샤스가 있었는데, 앞 뒤에 “I Survived Hurricane Katrina”쓰여진 옷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이 태풍에 회생되지 않았답니다. 자신들은 살아남았답니다. 살아남은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불행 중에 다행이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태풍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가고, 살아 났던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그 때 , 그 지역 고등학교 중의 하나인 디아이버빌 고등학교 (D’Iberville High School) 교장선생님 엘머 멀린스 (Elmer Mullins)와 보안관 대위 윈디 쉐트만 (Windy Swetman Jr.)은 태풍 대피소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디아이버빌 학교 체육관이 대피소였는데, 300명이 대피해 있었습니다. 대피소라고 해도 바닥은 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풍을 피해서 그 체육관에 떨면서 움추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과 보완관은 여전히 태풍이 불고 있지만, 밖으로 나가서 물에 떠내려 가는 사람들을 구조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 태풍 속에 쭈그려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태풍 속에서 사람들을 살려 냈습니다. 이 두사람은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은 밖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태풍을 정복했습니다.[1] 그 때 이분들의 수고하는 모습이 전 세계 뉴스가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단순히 태풍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태풍 속에서 세계에 감동을 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생의 폭풍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만나게 되면, 주저 앉고 싶은 유혹에 직면합니다. 도전하고 앞으로 나가고 싶은 이런 열망보다는 그냥 내려 놓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지만,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폭풍은, 우리의 신앙을 내려 놓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때를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 날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 사람들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예레미아 17:7-8절을 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인생에 태풍이 불어 오는 그 때에, 사람들은 움추리고 두려워하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복을 받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재난을 직면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결코 환경에 압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걷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어려운 환경을 넘어서 오히려 형통한 삶을 보장받을까요?
Nehemiah 5:14-19
14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드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형통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아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어서, 그 나라 왕궁에서 왕을 위해서 술을 관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조국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신분 상승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느헤미아는 자신의 나라에서 제일 높은 벼슬을 얻었습니다. 본문 14절 앞 부분을 다시 읽습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드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Moreover, from the twentieth year of King Artaxerxes, when I was appointed to be their governor in the land of Judah [NIV],
느헤미아는 자신이 유대땅에 총독이 된 사실을 밝힙니다. 주목해 보면, 궁금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아 자신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는데, 누가 자신을 임명했는지에 관해서 밝히지 않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유대 땅의 총독으로 세움을 받았다고만 기록합니다. “When I was appointed to be their governor.”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명백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쓰는 것이 두려워서 수동태로 표현하여 주체를 생략합니다.[2] 느헤미아는 자신을 총독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수동태로 표현했습니다. 느헤미아서 앞에 나오는 역대상 29: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부귀와 존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느헤미아는 자신이 유대 지역의 제일 높은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아의 인생을 포로 자리에서, 총독으로 옮겼을까입니다. 아니, 우리의 소망없는 힘겨운 삶이, 어떻게 형통하게 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봅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The former governors who were before me laid heavy burdens on the people, and took food and wine from them, besides forty shekels of silver. Even their servants lorded it over the people. But I did not do so, because of the fear of God [NRSV].
느헤미아 전임 총독들은 유다를 다스릴 때,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로부터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빼앗았습니다.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 해서, 자신들의 부를 쌓습니다. 심지어 총독의 종들마저 자신들이 총독의 종들이라고, 특권을 이용해서 백성들 위에서 군림했습니다. 높은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부를 축척하며,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권력을 잡으면 일반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 아닐까요?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 오면 싸워야 하는 이슈들입니다.[3]
척수윈돌 목사님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호화스럽고 안락한 생활에서 자신의 영적이고, 정서적이고, 도덕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갑작스런 신분의 상승은 그 사람을 넉넉한 교만으로 만들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한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우리의 결심이 견고해지고 지는 때는 성공할 때가 아니고, 삶이 무너질 때이다. 한 사람이 진실된 지도자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높은 신분에 있을 때 확인된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이 높은 권력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아는 사람이다.”[4] 그렇다면, 종이 총독으로 신분이 상승한 느헤미아는 누구였습니까? 15절 뒤쪽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But I did not do so, because of the fear of God [NRSV].
느헤미아는 이전 총독들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 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Because of the fear of God!”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환경이 이끌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느헤미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의 사명을 품은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룬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고, 환경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5] 이것이 하나님께서 느헤미아를 형통케 했던 이유였습니다. 느헤미아의 형통함의 비결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것은 단지 무서워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사람을 세우고 높이고 부와 귀를 주시는 분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출 19:16).[6] 잠언 22:4절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히 여호와를 경외하면, 재물과 영예와 형통함을 얻는다” [쉬운 성경].
The reward for humility and fear of the LORD is riches and honor and life [NRSV].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형통해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형통함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관대한 자가 형통합니다.
느헤미아가 살았던 시대는 벼슬하는 사람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총독에게는 매일 잔치할 수 있는 음식이 법적으로 보장되었습니다. 그런데, 14절 뒤 쪽에 보면, 느헤미아는 총독에게 지급되는 음식을 받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 뒤 쪽에도 “나는 총독이 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음식을 한 번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고 기록합니다. 대신에, 느헤미아는 무엇을 했습니까? 본문 17절을 주목합니다.
“게다가 나는 우리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 말고도 유다 사람과 관리 백오십 명을 먹여 살렸습니다.”
I asked for nothing, even though I regularly fed 150 Jewish officials at my table, besides all the visitors from other lands! [NLT].
느헤미아는 자신은 잔치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느헤미아는 총독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그급스런 생활을 거절합니다. 대신 배고픈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사회의 약자와 소외층을 돕습니다.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임자들과 다른 느헤미아의 삶의 태도는 가진 사람들과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줬습니다.[7] 함께 18절 앞부분을 읽습니다.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날마다 황소 한 마리와 기름진 양 여섯 마리와 닭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열흘에 한 번씩 각종 포도주를 준비했습니다.” Every day, one ox, six fine sheep, as well as poultry, were prepared for me; every ten days, skins of wine were brought in bulk [NJB].
이것이 하나님께서 느헤미아를 형통케 했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이었던 느헤미아를 총독으로 세우셨던 이유였습니다. 느헤미아가 하늘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공급 받아 아름다운 일을 이룰 수 있었던 비법이었습니다. 그는 나신의 배만을 챙기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아는 자신은 넉넉하게 살면서, 이웃에게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은 약소하게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풍족하게 했던 리더였습니다.
영국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의과 수련을 마치고, 의사로 되었던 John White는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신학을 공부해서 선교사가 됩니다. 그리고 1965년 캐나다 메니토바 주의 위니팩으로 와서 매니포바 대학교의 교수 생활하면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합니다. 이 분은 느헤미아가 형통한 인생을 살았던 것을 보면서, 자신의 책 『Excellence in Leadership: Reaching Goals with Prayer, Courage & Determination』 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에는 언제나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약속한 온유한 땅을 기업으로 얻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세속적인 것에 도전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겸손합니다. 그들은 양떼를 돌보는 목자 같고,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헌신하되 투덜거리지 않고, 거저 주지만 계산하지 않며, 또한 고통을 감수하지만 결코 끙끙 소리 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잘되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가치는 보석보다 더 귀합니다. 느헤미아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8]
느헤미아는 권력과 벼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했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사람들을 위해서 퍼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아는 높임을 받는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남을 섬기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아는 결국 권위와 명예를 잃었고, 가난한 사람으로 전략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본문 19절을 읽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Remember, O my God, all that I have done for these people, and bless me for it [NLT].
느헤미아의 관심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을 압제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높은 자리로 자랑을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갈망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9] 느헤미아는 하나님 앞에 사는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백성에게 하는 모든 것을 보셨죠?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왜냐고요? 제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느헤미아가 우리에게 전하는 신앙 레슨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베푸는 사람에게 형통한 삶을 허락합니다. 그냥 베푸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자원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인생을 사세요!
크리스토퍼 강 (Christopher Kang)의 간증
우리 아는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이 미국과 수교한 이래, 이민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가정이 지난 2012년에 돌아 가신 강영우 박사 가정이라고 합니다.본인은 맹인이었지만, 일리노주 주립 대학교 교수하다가, 2001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백악관 장애인 정책 차관보가됩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공직이었습니다. 아들이 둘인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강진석인데, 시애틀에서 안과 의사로 일하는데, 미국 안과 의사 협의회 회장이 됩니다. 둘 째 아들은 강진영인데, 미국 이름은 Christopher 강입니다. 이 사람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때,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30대 때, 오바마 대통령의 입법 특별 보좌관이 됩니다. 강영우 박사의 부인인 석은옥 권사님은 요즘 자신의 가정이 왜 형통한지를 간증하고 다닙니다.
이분의 간증 중에 둘 때 아들 크리토퍼 강(Christopher Kang)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부부는 아이들이 성장할 때, 특별한 신앙 교육을 시켰답니다. 어려서부터 “사회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둘째가 시카코 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듀크대학교에서28살에 박사학위를 받더니, 취직은 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민선 변호사가 되더랍니다. 사회와 남을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쳤지만,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자기 아들이 돈벌이도 되지 않는 민선 변호사활동을 하자, 걱정이 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특별히 뽑아 높여 주시는데, 결국 30대 초에 백악관의 높은 자리에 안더랍니다. 이웃에 관대한 자가 형통하는 것은 성경이 인류에 주는 교훈입니다. 잠언 11:24-25절을 읽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Give freely and become more wealthy; be stingy and lose everything. The generous will prosper; those who refresh others will themselves be refreshed [NRSV].
인생은 부메랑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베푸는 사람이 더 부자가 됩니다. 남을 잘되게 하는 사람이 더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형통케 하시줄 믿습니다.
384 (434) 나의 갈길 다 가도록
공동 기도 제목: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 나 자신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이웃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1]Joel Osteen, It’s Your Time: Activate Your Faith, Achieve Your Dreams, and Increase in God’s Favor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Free Press, 2009), 83-84.
[2] Stanley E. Porter, Idioms of the Greek New Testament, second edition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first printed by JSOT Press, 1992), 65. 신적 수동태를 예를 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사용된 표현들 중에, “Blessed are. . .” (마 5:5-11)라고만 표현되어 있지, 축복해 주는 주체는 없다. 신앙이 사회를 통치하던 유대 사회에서 행위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God를 문장에 삽입하지 않았다.
[3]Charles Swindoll, Hand Me Another Brick: how Effective Leaders Motivate Themselves and Others,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Nashville: Thomas Nelson, Inc., 1998), 103-104. 첫 스윈돌은 리더가 직면한 정직성에 관한 이슈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Every person in government, every executive, and every military leader has to wrestle with policies. Constantly they hear ‘It has always been done,’ or ‘It has never been done.’ The leader’ integrity is at stake. That’s why so many people cannot handle the pressures of public office. It’s too heavy, and they succumb.”
[4]Gene A. Getz, Nehemiah: A Man of Prayer and Persistence (Ventura, California: Regal Books, 1981), 126. Getz츤 척스윈돌의 다음 책을 참고 했다. Charles Swindoll, Hand Me Another Brick (Nashville: Thomas Nelson, Inc., 1978), 113.
[5]J. G. McConville, Ezra, Nehemiah and Esther, The Daily Study Bible, Old Testament (Edinburgh: Saint Andrew Pres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5), 101ff.
[6]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volume 1 (Chicago: Moody Press, 1980), 399-400.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을 두려워하여 산 가까이에 오지 못했다 (신 5:4-5). 높은 산에 붙어 있는 불의 존재 앞에 두려움을 가져 왔을 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단어가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레아 arey"”이다.
[7]Raymond Brown, The Message of Nehemiah: God’s servant in a time of change, The Bible Speaks Today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linois, U.S. A.: Inter-Varsity Press, 1998), 97.
[8]John White, Excellence in Leadership: Reaching Goals with Prayer, Courage & Determination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86), 89.
[9]John G. Butler, Nehemiah: The Wall Builder, Bible Biography Series number sixteen (Clinton, Iowa: LBC Publications, 1998),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