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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중국사 만약에 원소가 유비의 말대로 허도를 공략했다면?
多爾袞 추천 0 조회 1,203 12.11.01 04:25 댓글 3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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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1.01 05:32

    첫댓글 허도를 찾아서 천자를 내 빼오는 동시에 불을 지른다던지 하는 방법으로 초토화를 시켜버리면 조조 입장에서는 알거지가 되는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 12.11.01 07:08

    그대로 조조가 GG치는 거죠. 명분과 실리(본거지 상실) 동시에 사라지는건데 더이상 희망이 없음

  • 12.11.01 09:10

    원소가 어지간히 삽질하지 않는 한 허도를 잃을 정도면 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셔야. 허도를 잃는 건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는거죠. 물론 조조가 여포의 기습으로 연주를 한번 빼앗겼다가 되찾은 적이 있습니다만 애초에 방랑군이었다가 서주대학살의 빈 틈을 노려 연주를 차지한 여포 세력과 황하 이북 4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는 원소가 본거지까지 작살내었다면 조조가 아니라 제갈량이라도 답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쯤되면 조조는 그저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원소한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하는 수 밖에 없거나 아예 남쪽으로 튀어서 유비 포지션 먹거나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12.11.01 15:21

    저때 원소가 움직였으면 조조 포위망이 완성되죠. 북쪽의 원소, 동쪽의 유비, 남쪽의 장수. 장수의 경우 가후의 진언으로 조조에게 항복했습니다만 만약 저때 원소가 움직여서 남하해왔으면 오히려 남쪽에서 조조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기에 내부에는 후한의 관료들이 헌제는 허수아비 취급받고 조조가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에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으니 안팎으로 공격당해서 조조의 세력 자체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크죠.

  • 12.11.01 18:03

    저기서 원소가 들이치면 조조 못막습니다.

  • 12.11.01 22:24

    남쪽은 손책아닌가요? 제리형이지만 그래도 소패왕인대ㅜ

  • 12.11.01 22:38

    유비 상대로 군을 움직였는데 원소가 움직이면 조조는 이도저도 못갑니다. 백마전투 당시 원소 본진 도하에 시간이 걸린건 조조가 황하를 방어선삼아 전력을 다해 도하를 저지 시도했기 때문이지 그냥 도하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지요. 그나마도 만단위에 달하는 안랑군, 문추군의 도하는 손쉬웠고. 조조의 방해가 약해지거나 없는 상태에서 원소가 황하를 건널 생각을 가진다면 그닥 조조가 잘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12.11.02 08:28

    조조가 그때 움직인 건 설사 원소가 움직이면 다 끝장이라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유비를 끝장내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그나마 서주 공략하고 장수가 조조 쪽으로 붙으면서 원소와의 1:1 대결로 몰고 가고 황하 지역에 방어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지(그럼에도 결국 뚫렸지만) 위에서 말한데로 조조 포위망이 되면서 1:3 대결로 가버리면 조조는 끝장이죠.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무리해서라도 서주 공격을 강행한거지 그거 하면서 원소 막을 자신이 있어서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12.11.02 10:56

    조조가 전력을 기울여 황하를 방패막 삼고 막았는데도 막지 못하고 안랑이 강을 건너와 한달여간 백마를 포위하는데도 손도 못쓰고 있었고, 대원소전 이전까지 조조는 모든 주요 전선을 그가 직접 관장하면서 부차적인 전선에 대해서만 휘하 제장들에게 제한된 임무를 맡기는 게 일반적이였는데, 조조가 정예병을 이끌고 서주로 가 있는 동안 원소가 남하해도 막을 수 있을 것이 보긴 힘들죠. 실제로 조조가 서주의 유비를 공격한 것 자체도 원소의 남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 한 것이며, 이는 조조가 휘하 정병을 이끌고 움직인다면 그 구멍을 메꿀 수 없다는 인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조조가 직접 움직이는 데 군이 소수인 경우는

  • 12.11.02 11:00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조조은 대원소전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적과 대등 이상의 전력을 끌고 움직였으며, 서주의 유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비의 전력 이상을 끌고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게 조조가 보여준 일반적인 군 운용이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서주가 여러 전란으로 피해를 입었고 유비가 다시 서주를 장악한 지 얼마 안되는 시기라 하더라도, 과연 조조가 유비를 치는 데 동원한 전력이 전체 조조군 내에서 적은 수준일까요.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핵심이라 할 만한 전력을 이끌고 유비를 들이친 것이라 보아야 할 듯 보입니다.

  • 12.11.02 11:47

    과연 저 시대에 병사 개개인에게 특정 세력에 대한 '소속감' 이 얼마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다 조조에게서 받아 자신의 것으로 한 병력+현지 호족군 의 합은 결코 작은 규모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며 이를 조조가 들이치고자 한다면 최소한 만단위 이상의 전력을 투입해야 하겠다는 견적이 나올 텐데, 당시의 조조군이 이러한 공백을 매꿀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하다 봅니다.

    그리고 원소는 실제로 황하 남안의 도하 거점을 마련하자마자 빠르게 남하, 조조 세력권의 절반을 조조의 통제 밖에 떼어냅니다. 조조가 직접 총력을 기울여 막아 이정도인데, 조조가 없는 시점의 방어전은 솔직히 가망이...

  • 12.11.02 12:10

    당시의 시대상 조조의 사병(이 또한 따져볼 일입니다. 열전을 살피면 초기에는 개인 사병을 이끌고 참가한 인물들 내지는 현지 기반 호족이 아닌가 의심되는 인물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이아고 해서 소속감을 크게 가진다는 건 그닥 현실적이지 않고, 굳이 따지자면 한 횡실에 대한 소속감이 있을 것이나 유비의 황족이 가지는 상징성 내지는 선전 등을 통해 커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세력들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찾기 힘든데 가장 대인에 대한 친화력이 있는 군웅인 유비에게사 그럴 수 있다는 건 억측으로 보입니다.

  • 12.11.02 12:14

    그리고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영향력을 끼친 건 연주와 예주 대부분이었고, 이는 거듭된 원소의 승전 때문이라기보단 원소가 그 일대에서 쌓아놓은 명망과 인지도의 영향에 더 가깝습니다. 아니, 순수 교전만 따진다면 그렇게 원소의 위명이 퍼지는 교전결과였는지 의문입니다. 거기다 조조가 빠진 구멍을 뚫고 들어온다면 조조가 뒤늦게 달려와도 각개격파입니다.

  • 12.11.02 12:25

    그것을 추정이 아니라 사실로 하고자 하려면 여타 세력에도 비슷한 탈영병 등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만, 그런 것은 듣지 못했군요. 거기다 직후에 원소가 유비를 직접 마중나온 데서 알수 있듯 유비의 명성은 벌써 상당했는데 그런 인물 하에서 여타 세력에도 일어나지 않은 '특이한' 사례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건 근거가 없이는 무리입니다.

  • 12.11.02 12:33

    그때에 열세인 전력으로도 어쨌든 관도에서 방어선이 성립된 건 조조가 직접 지휘를 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조가 없고, 정예부대라 할만한 전략이 만단위나 빠져나간 시점에서 같은 결과를 이끌어낼 지는 알수 없지만, 그닥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입니다. 조조가 제때에 돌아올 수는 있을까요. 부정적으로 여겨집니다.

  • 12.11.02 13:08

    당시 관우군은 오랫동안 형주를 진수하면서 지냈고, 연고지가 강릉 일대라는 것도 이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저때의 조조군은 저때의 관우군처럼 장기간에 걸처 특정 지역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자신의 연고지로 하였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단순히 조조군이니까 조조 세력권에 연고지가 있었다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랑민, 여타 호족들의 사병군이었던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거기다, 여몽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자 대규모 탈영이 벌어진 건 그만큼 그 방식이 특이했고 그 결과가 유례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일이 많았다면 기록은 간략하고 사례는 많았을 것입니다. 조조가 비슷하게 인질로 잡아 탈영을 유도했다는 근

  • 12.11.02 13:16

    거가 될만한 기록도 없습니다. 위서는 가장 치밀한 기록이 남아있어 자잘한 도적떼 토벌 기록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도 말이죠.

    또한 백마 이후 관도까지 밀려나는 데 시간이 걸린 건 조조가 지휘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했다 보입니다. 당시 조조는 대부분의 주전선 지휘를 직접 했고 조조 이상가는 지휘관이 세역 내에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조조가 저 멀리 서주에 가 있다면? 이건 막기 힘들죠. 조조는 후방을 위협받아 군 운용에 어려움이 생길 가능성도 크고, 조조 없는 방어선이 버틸 수 있을지는 더더윽 의심스럽습니다.

    이상태에서 말씀처럼 이루어질지는 그닥 가능성이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 12.11.02 14:18

    청주병의 사례어서 알 수 있듯 당시 조조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웅 군사력은 전란으로 발생한 유랑민들을 모아 구축되었습니다. 거기다 조조의 연주 진수 후에도 여포와 치열한 대결을 벌여야 했고 이후에도 연주 접경 및 서주, 예주 일대에서 주전역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흡수한 타 세력 병사들이 조조군 내에서 적지 않습니다. 이런 구성을 생각하면 뒷시대의 그것을 가져다 붙여 추정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전체를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유비가 전력으로 쓸 수 있늗 부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조조의 평소대로의 치밀함, 이라고 이야기하시나 조조는 자기 없어도 막을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원소가 움직이

  • 12.11.02 14:27

    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하에 위험을 감수하고 들이친 것입니다.

    관도대전 당시 조조군이 1만여였다는 것은 관도로 밀려 들어가 농성상태에 들어갔을때의 상황입니다. 당시 조조군은 최대한으로 집결시키면 원소군 본군에 맞서 못지 않은 규모의 전열을 늘어세울 수 있는 정도의 전력이 있었으나 관도로 밀려 들어간데다 원소의 연예주, 여남 공략에 맞서 없는 병력을 나누어 별동대(서황, 사환, 이통 등)을 파견하고, 여남에서 준동하는 유비의 허도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여 조인을 떼어 놓아야 했으며, 서주 유지를 위해 장패도 놔두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전력을 나누고 나눈 후 남은게 1만여라는 기록이고, 그래사 배송지도 심하

  • 12.11.02 14:38

    게 비판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원소만은 못해도 대규모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이 조조이고, 따라서 조조군 규모가 적다는것은성립되지 않습니디. 유비가 조조의 대장기를 보고 도주한 것은 조조의 군 지휘 특성상 조조군가 직접 왔다면 조조군은 자신의 군이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라는 뜻이라는 것을 조조와 여러 전장에서 같이 싸운 적 있는 유비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만여에 달했다는 유비군이,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이 그 전체는 아니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이라면 결코 적은 규모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전력이 빠져나갔다면, 그리고 그때에 원소가 움직였다면 과연 조조 없이

  • 12.11.02 14:40

    그걸 막을 수 있을까요. 조조가 직접 지휘하여 전력을 기울이고도 결국 밀려난 것을? 힘들다 봅니다. 단순히 어디어디서 어떤 조치를 취하라고 말해둔 것만으로 막을 수 있었다면 관도까지 밀려나지도 않았겠지요.

  • 12.11.01 20:22

    어쨌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때 원간지가 허도를 공격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다는 '왜' 공격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이 더 중요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애가 아파서' 라는 이유였지만 사실 원소는 거병때 낙양에서 일가가 몰살당하고 흑산적에 의해 자신과 가신들의 가족이 인질로 잡혀도 눈 하나 깜짝안하는 강심장에 냉혈한이거든요.
    왜 공격을 안했는지 정말 미스테리합니다

  • 12.11.01 23:06

    그러게요...애가아파서...는 너무 개드립인거 같고...왜 공격을 안했을까요; 모든사람이 허도 공격했으면 조조 멸망 이랬는데 말입죠 ㅇ_ㅇ...

  • 12.11.02 08:30

    어쩌면 유비가 그렇게 쉽게 패퇴할 거라 생각못하고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 본대를 묶어두면 자기는 준비 좀 더 해서 아예 끝장을 내보겠다는 심사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 12.11.01 21:41

    그러면 조조 GG 아닌가요?
    병력도 원소가 앞서고
    경제력도 원소가 앞서고(원소가 먹은 땅의 생산량이 조조를 압도했을텐데)

    거기에 본거지 털리면
    아무리 조조라도 그의 군대를 뭘로 먹일 것이며 무슨 돈을 끌어모아 무장시킬까요?

  • 12.11.02 11:38

    실제로 허도 털지 않았어도 압박에 성공하고 있었고 각지에서 원소에 호응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는 걸요.
    관도때 털리긴 했었도 여전히 원소의 우위고 원소생전에는 조조가 화북땅 밟아 보지도 못한걸로..

  • 12.11.04 12:15

    관도의 대전이라는 것이 하남과 하북의 대결이고 조조가 황하를 이용해서 원소를 막는 싸움이죠. 유비세력은 지명상 하남은 아니지만 황하 남쪽에 있고 원소가 허도를 못 턴다해도 황하 남쪽에 유비세력이 잔존하는 것만으로 사면초가입니다. 강을 통해서 막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조조는 그리 급하게 유비를 들이친 것이고, 원소의 이른 출정은 이러한 조조의 전략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조조가 유비를 급하게 들이치는 만큼 원정스케줄을 앞당기는 것은 매우 자명한 수순이죠.

    다만 정치적 이해에 의해서 원소가 유비를 돕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죠.

  • 12.11.04 12:22

    연의에서는 유비가 우여곡절끝에 서주를 접수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엄연히 주목이라는 직위는 당시 13개주중에 하나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것이므로 그 실질적 권위는 황제에 맞먹습니다. 훗날 팔왕영가의 난엔 주목급도 안되는 것들도 황제되겠다고 덤비는 구도를 생각하면 유비가 차지한 위치가 그렇게 만만히 볼 위치는 아니었음은 확실하죠.

    그런 구도하에서 원소가 남하합니다. => 황하를 경계로 조조와 원소가 대립합니다. => 유비가 조조 옆구리 쑤십니다. => 조조 좃망, 유비 천자와 옥새확보후 같은 유씨로써 선양받아 후한황제등극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분명히 가능한 옵션이거든요.

  • 12.11.04 12:29

    참고로 칭따오나 서주성에서 하남으로 가는 길은 아무 장애물도 없는 평지입니다.

    그러므로 조조대 원소, 유비군이 대립하면 조조는 원소군은 막아도 유비군은 못막습니다. 게다가 서주란 자리가 남으로는 강소일대, 해안으로는 오월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위치라서, 유비군의 조조토벌이 슬로건화 되면 후일 역덕도당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손씨집안이나 유요, 원술 이런 놈들이 유비군에 붙을 수도 있고, 그럼 정세가 겉잡을 수 없게 되겠죠.

    매우 바람직한 가정으로 유비가 황제가 되고 유방의 한을 전한 유수의 한을 중한, 유비의 한을 후한 이렇게 역사가 되버릴 수도 있는 경우의 수조차 달린 게 당시 정세라고 보면,

  • 12.11.04 12:42

    원소입장에서는 유비가 조조토벌의 주도적 역할을 할 경우, 끽해야 조조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삼공집안으로의 희귀 아니면 토사구팽당할 수도 있는데 유비가 마냥 잘 나가게 할 수는 없는거죠.

    아마도 원소는 유비의 역할은 제후연합당시 유우가 추대된 정도의 자신이 승상인 왕조에서 허수아비왕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고의로 유비세력 몰락을 방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보더라도 원소와 조조 모두 젊었을 때는 기울어가는 왕조를 구원하는 역할을 꿈꾸지만 늙어갈수록 야심가로 변모해가죠. 원소도 뭐 유협을 끼고 협천하령제후하는 조조마냥 어린 협보단 원숙한 비를 추대하는 자신이 한황조의

  • 12.11.04 12:43

    충신임을 들어서 유비끼고 협천하령제후하고 싶었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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