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좀 길지만 문장이 간결해서 읽기는 부담없을겁니다. 뉴비인 저로써는 재밌게 읽었네요...
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을 ‘허락’했는가?
Ⅰ.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이유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종전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도 치유되기는커녕 더 큰 고
통으로 살아 있다. 과거청산, 북핵 및 통일문제, 반미문제, 무수한 개혁 관련 이슈들, 그리
고 심지어 일상에서조차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전쟁이라는 인식의 ‘심사대’를 통과해
야만 한다. 한국전쟁의 인식문제는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그들의 존재 정당성과 현실적
이해에 그만큼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우리사
회의 기본구조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 고유한 메커니즘으로 작동
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의 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과거사
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전쟁인 셈이다.
한국전쟁에서 각별히 연구자와 일반인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한국전쟁의 원인에 관한 것
이다. 원인의 문제가 한국전쟁의 성격과 현실적 이해를 판별하고 평가하는데 만이 아니라
냉전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데도 적절한 준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전
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 특히 냉전해체 이후 구동
구권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그 동안 추측 수준에 머물던 중요한 문제들의 실상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
년 8월 38선 획정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은 좌절되고 3년 뒤 남과 북에는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분단정권이 들어섰다. 이승만과 김일성 정권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통일을 고려했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자 남북간의 무력충돌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직접충
돌을 우려하여 약속이나 한 듯이 이승만과 김일성의 도발적 군사행동을 억제했다. 미국의
노력은 성공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국 억제노력을 포기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락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무력통일을 시도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된 쟁점들 가운데서 특히 스탈린이 왜 계속 거부해 왔던
김일성의 무력통일요구를 결국 허락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의 대
상이 되고 있다. 이 문제가 한국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연구자들에 의하면 스탈린의 한국전쟁 목적은 그의 일관된 세계혁명전략에 따라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1949년 3월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요구에‘원칙적으로’반대하지 않으면서 국제적 상황이‘유리한 시점’을 기다리다 중
국혁명의 성공과 중소동맹조약의 체결 이후 곧바로 한국전쟁을 시작했다는 웨더스비
(Weathersby), 한반도를 장차 있을 일본에 대한 ‘공격의 발판’으로 만들고자 남한을 지배
하려했다는 곤차로프(Gonchrov), 중국혁명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스탈린이“일지역사회주
의에 기초한 단기적 평화공존과 영향력범위의 상호인정에서 일탈”하여 한국전쟁을 시작했
다는 박명림, 중소동맹조약으로 상실된 소련의 이권에 대한 보상으로서 인천, 부산, 제주
등에서 ‘부동항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스튜에크(Stueck), 일본의 재건과 미일단독강화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오프너(Offner)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스탈린의 전략적 유
연성에 대해서는 다소 견해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의 전쟁목적이 한반도 지배에 있었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한다.
이들 연구는 한국전쟁의 허락유무를 놓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전문이나 스탈
린과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결정하면서 나눈 대화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이용했기 때문에 전
쟁결정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제 마침표를 찍을
단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의 성과와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전
쟁목적은 아직 속 시원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본고의 목적은 이런 판단에 근거하여 기존의 연구를 최대한 수용하면서 그들과는 다른 시
각에서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허락한 또 다른 이유를 찾는데 있다. 이 목적에 효과적으로 접
근하기 위해 필자는 스탈린의 전쟁목적이 ‘한반도 전체의 지배가 아니라 자신과 소련의 전
략적 이익을 지키는데 있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다음의 사항들을
고려할 것이다.
첫째, 중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소련에 더욱 의존케 한다.
둘째, 스탈린은김일성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혁명지도부로서 자신과 소련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다.
셋째, 김일성 방식의 무력동원이 무모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넷째, 스탈린의 두려움의 실체는 미군의 개입 자체가 아니라 소련이 관리할 수 없는 방식의 개입이었다.
다섯째,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대결할 의사가 없음을 미국에게 분명히 알리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