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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스탈린의 한국전쟁: 논리와 조건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성공과 중소동맹조약의 체결, 그리고 김일성의 무력통일 요구를 자
신과 소련의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결국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스탈린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것도 큰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의 선택은 대다
수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련의 숙명적이고 체질적인 팽창주의와 혁명이데올로기 때
문이었을까?
소련이 팽창주의의 역사를 경험했고 혁명이데올로기 역시 그 팽창주의에 한 몫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한국전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다.
첫째, 냉전시기 동안 스탈린은 소련의 세력권을 넘어 팽창을 시도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소련은 군사력을 동원해 팽창을 시도할 의도도 능력도 없었다.
외견상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가 스탈린의 대담한 행동을 고무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
겠다. 스탈린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탈린
은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 이후 오히려 미국의 감시와 견제가 더욱 심해질 것을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원자폭탄을 운반할 수단이나 핵무기 수에서도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
다. 원자폭탄의 보유 자체가 아니라 선제공격 혹은 보복능력을 갖추었느냐가 중요함은
상식이다.
당시 미국의 전략가나 정보기관도 소련의 의도와 능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냉전의
건설자로 알려진 케넌(George F. Kennan)은 1946년 2월 유명한 ‘장문의 전문(Long
Telegram)’에서 소련의 팽창주의가 미국에게 위협이기는 하지만 그 팽창의 수단은 군사적
인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40) 1950년 6월 19일 미국중앙정보국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
할 경우 소련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며, 6월 26일에는 북한의 침
공이 소련의 지원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면서도 소련이 “현시점에서 전면전을 시도하지는 않
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스탈린은 군사적 팽창은커녕 유럽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소련의 안보에 유리하다고 판
단하기조차 했다. 미군이 독일을 관리함으로써 독일이 또다시 소련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아마도 일본 주둔 미군에 대해서도 비
슷한 평가를 했을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소련을 위협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미
군이 일본을 관리해 줌으로써 소련의 안보 위협을 완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주한 미군의 철수를 미국이 남한군에게 북침의 재량권을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두려워했던 것 또한 역설적이게도 미군주둔과 소련의 안보와의 함수관계를 파악하는 스탈린
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스탈린의 사고와 행동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물론 스탈린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어 둘 점은 스탈린의 태도가
기본적으로는 냉전체제의 작동원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정배의 연구에 의하면, 냉전체제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국과 소련이 그들의 세력권
외부로의 팽창보다는 내부로의 팽창을 도모하기 위한 체제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각기 세력
권 외부의 적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그들 체제 내부의 관리와 통제를 시도했다.
다시 말해 냉전체제는 미국과 소련이 진영 외부로 팽창하는 원심력보다는 진영 내부를 통제
하는 구심력의 작용에 의해 작동되었다.
그러므로 소련이 미국의 세력권 내부로 뛰어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북한의 침공은 냉
전체제를 작동시키는 절묘한‘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
을 부각시킴으로써 미국세력권 내부를 공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소련에게는 미
국의 힘과 위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소련세력권 내부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둘째, 스탈린은 냉전체제의 작동 메커니즘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매우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소련은 북한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병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계획과 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의 전쟁지도부간의 이견을
최종적으로 조율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스탈린이 한반도를 장악하고자 했다는 주장이 터
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스탈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자 했음을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
가 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것이 증거라면 한국전쟁 중 스탈린이 보여준 미국에 대한 두려움
과 소극적인 자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을 단순히 스탈린의‘기회주의’탓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스탈린의 그런 모습은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교활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말려든 자신의 난처한 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 점은 김일성의 전
쟁시도가 불러올 미국의 대응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1949년 9월
23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스탈린을 위해 준비한 한 문서는
“인민군의 남진은 미국이 이 문제를 유엔에서 제기하고,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미군
의 남한으로의 진입을 위한 유엔총회의 동의를 얻을 구실을 줄 수 있다.”
고 지적하고 있다. 마치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의 방위선성명의 다른 버전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스탈린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그처럼 두려워했
는지도 모른다.
그런 스탈린이 과연 미국과 유엔이 세운 국가를 지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미국이
그런 도전을 두고 볼 거라 생각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
의 통일전쟁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왜 스탈린은 그 무모하기 짝이 없는
북한의 침공을 허락했는가?
대다수 연구자들은 스탈린이 미군의 개입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신속히 끝내면
미국은 개입할 시간을 갖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서 김일성의 요구를 수락했다고 주장한다.
애치슨이 이미 대만과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선언을 했으며, 김일성과
만나 전쟁을 최종 결정할 때, 스탈린 자신이 미국 내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하면 그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스탈린의 한국전쟁의 ‘정치’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한국전
쟁의 조건과 방식 또한 앞서 필자가 주장한 냉전체제의 속성과 변화된 동아시아정세의 성격
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첫째, 스탈린은 미군의 개입을 전제로 한국전쟁을 결정했다. 그가 정작 두려워 한 것은
미군의 개입 자체가 아니라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의 개입, 즉 전면전 가능성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만나 미국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개입하지 않는 쪽이
라고 말한 시점이 이미 전쟁을 결심한 이후라는 점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하면
서 한 말이 설명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스탈린이 소련은 직접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각별히 미국이 한국에 파병을 감행할 경
우” 한국문제에 “직접 연루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한 말이나 일이 잘못되면 “모
든 도움은 마오쩌둥에게 받아라.”고 한 말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미군개입을 기정사
실로 보고 전쟁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 그 책임을 김일성에게 전가하겠다는 일종의 위협
이었다. 이것은 스탈린의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탈린은 미국의 불개입을 확신한다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둘째, 스탈린은 미국이 소련의 속뜻을 곡해하지나 않을까 극도로 불안해했으며, 그래서
소련이 미국에 맞설 의사가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미국에게 확인해 주었다.
북한의 침공이 시작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소련에게 북한군의 철수에 영향력
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소련은 남한과 그 배후 세력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
장하면서 소련의 전통적인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을 들면서 소련이 한국의 상황과 무관
함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당시 미국 역시 북한 침공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보았음에도 의도적으로 소련의 공식적
인 무관함을 인정하는 쪽으로 밀고 갔다. 소련이 북한의 침공과 관련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한다면 미군의 개입은 곧 소련과의 직접적 대결을 의미할 것이고 미국은 행동의 제약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의 태도는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직접 대
결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7월 1일 트루먼이 미군 파병을 발표하자 스탈린은 슈티코프에게 “조선군사령부의
어떤 종류의 계획에 대해서도 일체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미국에게 이미 소련이 무
관함을 통보한 마당에 소련이 북한의 침공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근거가 노출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소련에게 개전의 책임을 돌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간파한 이후
에는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문제를“소련과 중국 및 조선
의 대표가 출두한 안보리에서 해결”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 이후 북한군의 총체적 패배 가능성에 직면하자 스탈린은 소련의 직접 개
입을 배제하면서 중국에게 의용군 파견을 요청했다. 중국이 파견의 조건으로 소련공군의 지
원을 요구하자 스탈린은 망설였다. 그리고 10월 13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비관적인 전문을
보냈다.
“저항을 계속하는 것은 가망이 없다. 중국 동지들은 휘말리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상황
에서 중국이나 소련, 아니면 두 나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 앞으로의 적과 싸울
잠재력은 유지되어야 한다.”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두려한 스탈린의 일관된 태도는 중국의 참전이 결정된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대가로 16대 훈련기, 10개 탱크연대, 병참부대, 탄약 등
을 포함하여 4개 비행사단과 지상공격항공기 2개 사단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중공군
의 훈련에만 사용하고 전선에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소련의 군사요원들도 가능한 최
단기간 동안 중국에 머물렀으며 훈련과정이 끝나면 곧바로 소련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중국
에 있는 동안 중국군 복장을 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항공기와 탱크 역시 중국의 무기인 것처
럼 위장되었다. 1950년 11월 초에 이르러 스탈린은 기존의 지시를 수정하여 소련전투기가
국경 근처의 중국군기지들을 엄호하고 압록강 다리를 보호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소련전
투기들은 미군이 장악한 영토 위로 미군기를 뒤쫓는 것이 금지되었다. 소련군조정사가 포로
가 될 경우 소련군의 참전 사실이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의 배후에서 소련이 병참을 지원할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은 소련과의 직접 대결 가능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정보기관은 심지어“북한
의 상실과 북한 정권의 붕괴가 소련의 즉각적 혹은 과감한 대응을 불러올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소련의 ‘일시적인’ 북한 포기가능성까지도 예상했다. 또한 미국은 소련의
숨은 의도가 중국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여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중국공산당의 “독
자노선 가능성을 제거하는데” 있으며, 비록 중소동맹조약이 있기는 하지만, 소련정치국은
“필요하다면 조약의 의무를 왜곡하거나 무시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미국이 중국 참전이 야기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소련과의 직접 충
돌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소련이 한국의 분쟁과는 무관하며 미국과
직접 대결을 원치 않는다는 스탈린의 간절한 뜻이 미국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스탈린은 한반도를 지배할 의사가 없었으며, 그의 한국전쟁 선택은 소련의 팽창주
의나 혁명이데올로기보다는 냉전체제의 작동메커니즘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스탈린
이 설정한 한국전쟁의 조건과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Ⅳ. 빼앗기가 아닌, 지키기 위한 전쟁?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스탈린은 과연 무엇을
얻고자 했는가? 신중국의 등장, 그에 따른 사회주의진영의 세력관계변화, 그리고 주변부혁
명세력 등으로부터의 압력 등이 당시 스탈린이 직면한 도전이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통
해 적어도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첫째,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직접 대결케 함으로써 중국이 진영에
서 이탈하는 것을 막는 한편, 중국의 힘과 외교력을 약화시켜 소련의 도움을 더욱 필요하게
만들고, 나아가 실패가 예비된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도 지울 생각이었다.
스탈린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오쩌둥과 중국이 자신과 소련의 지도를 벗어나 독
자노선을 택할 가능성이었다. 스탈린은 민족사회주의가 자신과 소련에게 어떤 위협이 될 수
있는지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을 통해 통감한 바 있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중국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중국혁명 과정과 중소동맹조약 체결 과정에서 충분히 경험한 바 있
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의 선언을 보고 미국이 중국과 소련의 갈
등을 조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심 많고 신중한 스탈린이 중국을
신뢰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을 허락하면서“마오쩌둥과 협의하시오. 그는 동양
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라고 한 말이나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의 허락 사실을 확인
요청하자 중국이“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새로운 검토가 있을 때까지 연기되어야 하오.”
라고 한 스탈린의 답변은 중국을 한국전쟁에 참여시켜 상당한 부담과 책임을 지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없지 싶다.
중국이 참전을 꺼렸을 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과 영국보다 더 강할 것이
고, 유럽의 자본주의국가들은(현재 미국에게 어떤 원조도 제공할 능력이 없는 독일을 제외
하고) 충분한 군사력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지금 치
뤄야 한다. 수년 안에 일본 군국주의는 미국의 동맹으로 회복될 것이고 미국과 일본은 이승
만이 통치하는 전체 한국을 대륙의 교두보로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참으로 혁명가다운 말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그런
태도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그대
로 믿기 어렵다. 스탈린은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중국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대담
한 ‘허세(bravado)’를 부렸던 것이다. 그 허세는 스탈린의 교활한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련은 빠지고 중국을 전쟁에 밀어 넣는다는 그의 일관
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못마땅했지만 스탈린의 전쟁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는 이미
동맹조약을 체결했으며 대만을 치기 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둘째, 스탈린은 혁명가로서 그리고 혁명세력의 지도부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고 전쟁실패의 책임은 김일성의 몫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에게 국가안보와 세계혁명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스탈린이 중국을 견제
하고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주로 소련의 안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김일성의 통일전
쟁을 허락하고 지도한 것은 세계혁명과 국가안보를 모두 염두에 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왕에 시작하는 전쟁이라면 전략가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을 지도하면서 스탈린은 단 두 번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한번은 앞서 언급한 중
국의 참전을 촉구할 때이고, 다른 한번은 김일성의 승리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1950년 8
월 말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거듭된 승리에 대해
“조선인민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조선이 이제 세계에서 가장 민중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운동의 기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모든 피압박 인
민의 군대는 이제 조선인민군으로부터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국가들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기
술을 배울 것이다. 더구나 김일성 동지는 한국이 이제 혼자가 아니며 돕고 있는 그리고 계
속 도울 동맹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서 칭송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스탈린이 김일성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내키지 않은 전쟁을 지도할 수밖에 없었고 김일성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
이 비현실적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쟁의 성공여부 자체는 스탈린에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된 목적은 한반
도의 지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아마도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
이다. “김일성 동지, 미국은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공식적 침범행위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김일성 동지의 열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무력통일 시도는 애초부터 무모한
선택이었어요.”김일성은 스탈린을 신뢰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북한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요컨대 스탈린은 김일성의 무력통일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세계혁명의 지도부로서 그 역할
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탈린이 그렇게 한 주된 목적은 중국과 미국을 직접 충돌시
켜 중국이 소련에게 더욱 의존하게 만들고 김일성의 무력통일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를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미국세력권으로 뛰어들 의사가 전혀 없음을 미국에게
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스탈린의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950년 전후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변화 속에서 자신과 소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고
도의 전략적 행위였다고 하겠다.
<출처>
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을 허락했는가? : 새로운 시각 . 김정배.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어디서 가져오신 글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올리는데 급급해서 출처를 안썼군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탈린 참 똑똑한 사람이군요...
모든 불행은 스탈린 때문이었군요...
기본적으로 냉전에 대한 소위 "공산권"의 태도가 "방어적"이라는 전제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그게 도덕적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소위 "자유진영"의 냉전전략이 적극적, 공격적, 제국주의적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소련의 행보는 진정한 의미에서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이었다기 보다는 미국/서유럽과의 버퍼(완충지대)를 확보하여 소련의 지속적인 생존을 꾀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스탈린이 중국을 그리 좋게 보진 않았었군요. (김정일 나쁜놈 왜 전쟁하자고 꼬드겨!!)
스탈린은 언제 모스크바 상공에 B-29가 나타나서 원자폭탄 날릴지 몰라서 공포에 떨었다던데 -ㅅ- 정말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허세를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라고 밖에 -_-; 만일 미국 대통령이 해리스 트루먼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많이 참았죠. 중국도 안날린걸 보면...
음...대충만 알고 있었지 저렇게 구채적으로 알진 못했었는데 말이죠. 하여튼 이 계시판에서는 다들 범생이분들만 계시니 원....ㅠㅠ
흠....... 스탈린은 참, 대단한 전략가군요. 정치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노련하고, (스히전을 보고 느낌.)
제가 보기에 스탈린은 정말 잔인한 차르였지만 러시아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진입하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있을 때 공업화를 이루었고, 파멸적인 전쟁을 이겨내면서 세계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간 걸 보면..........
그런데 난 왜 이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싫어질까???
스탈린과 히틀러는 천재적인 사이코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