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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1950년 전후 스탈린의 ‘도전’
1. 중국혁명의 성공과 중소동맹조약의 체결
1949년 말 중국혁명의 성공과 1950년 초 중소동맹조약의 체결은 스탈린에게 어떤 의미였
을까? 스탈린은 그것들로부터 세계혁명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을까, 아니면 어떤‘도
전’을 보았을까?
대다수 연구자들에게 이런 질문은 엉뚱해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스탈린이 자신감을 얻
었다고 믿으며 그렇게 믿을만한 근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자신감이 아니라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할만한 근거 또한 적지 않다. 이 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
국전쟁의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먼저 스탈린이 자신감을 얻었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부터 살펴보자. 주지하듯이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개시하
기로 결정했다.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내용을 전하는 소련공산당 국제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중국혁명 성공과 중소동맹조약 체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
다.
“국제적으로 볼 때, 국민당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조선이 행동할 환경을 개선시켰
다. 중국은 더 이상 내부투쟁에 바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지원에 관심과 힘을 쏟을 수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중국은 자신의 다른 필요를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에 투입할 수 있
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승리는 또한 심리적으로도 중요하다. 그것은 아시아 혁명
세력의 역량을 제고시키는 한편, 아시아 반동세력과 그들의 서구 및 미국 상전들의 허약함
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중국을 떠났다. 신생 중국에 감히 군사적으로 도전하지 못한 것이
다.
중국이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세력에 도전하기를
더욱 망설일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온 정보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다.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의 지배적인 분위기다.”
스탈린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정세분석과 조선에서의 전쟁을 작심한 듯한 태도는
중국혁명의 승리와 중소동맹조약의 체결로 크게 고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나기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1949
년 7월 11일 류사오치(劉少奇)와 친소련 중국지도자들이 중국혁명의 완수, 중국의 국가건
설, 소련의 지원, 그리고 새로운 중소관계의 수립을 논의하고자 소련을 방문했을 때와 1949
년 12월 16일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중국혁명에 ‘방해’가
되었던 점을 사과하고 중국혁명의 성공을 칭송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역할분담’을 제시하
기까지 했다.
“중국이 식민지 ․ 반식민지 ․ 종속국가들에서의 민족 ․ 민주혁명운동을 지원하는데 더욱
많은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소련은 [아시아]에서 중국만큼의 역할이나 영향
력을 행사하기 어렵습니다. … 따라서 세계적 혁명을 위해 당신들은 동양에서 더 많은 책임
을 맡아 식민지 ․ 반식민지 국가들을 지원함으로써 보다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십시오
.”
스탈린의 말에는 그의 세계혁명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
하는 혁명가다운 진정성이 배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세계혁명을 추구하는 스탈린이 중국혁명의 성공과 중소동맹조약의
체결이라는 유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는 듯하
다.
그러나 스탈린의 말을 과연 그렇게만 이해할 수 있을까? 스탈린에게 중국혁명의 승리와
중소동맹조약의 체결은 어쩌면‘양날의 칼’은 아니었을까?
세계혁명과 진영대결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주의세력의 아시아대륙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래서 혁명세력이라면 누구라도 공식적으로는 중국혁명의 승리와 중소동맹조약
체결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으며, 세계혁명의 지도자로서 스탈린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
다. 위의 스탈린의 태도는 바로 그러한 사정을 반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
국혁명의 성공은 세계혁명의 지도부로서 스탈린과 소련의 지위와 위신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시 자리를 함께했던 중국인들이 스탈린의 말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건배를
거절했던 것도 스탈린의 위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피상적으로는 스탈린이 북한의 지도자들과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한 말은
“아시아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새롭게 인식”한데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탈린
의 말에는 중국혁명 과정과 중소동맹조약 체결과정의 복잡한 ‘정치의 역사’는 물론이고
이미 결정된 ‘한국전쟁의 정치’도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스탈린의 ‘자신감’을 주장하는 것도 일리
가 있지만 말의 진실성을 의심스럽게 하는 스탈린의 역사적 행위를 추적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스탈린이 중국혁명을 격려하고 돕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억제하려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군사적 오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그
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불신과 소련의 안보문제가 원만하게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
각해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얄타합의 때 미국과 영국의 입장과 힘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민당정부를 인정했
다. 그리고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성공가능성을 낮게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혁명이 계속
진전되는 데도 궁극적으로 두 개의 중국을 원했다. 중국의 분열과 약화가 소련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949년 마오쩌둥이 양자강을 넘고자 했을 때도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들어 반대했지만 실은 그러한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고, 스탈린이 예상했던 미군의 반격은 없
었다. 스탈린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최고지도자로서 그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런데도 얼마 뒤에 류사오치 등을 만났을 때 스탈린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던 것이다. 최고
지도자가 ‘자아비판’을 한 꼴이었다.
스탈린의 체면은 1950년 초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 더욱 말이 아니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1945년 소련이 국민당과 합의한 이권의 반환과 그와 관련된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들을 처리
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중하고 노련한 태도가 요구되었다. 그런데도 마오쩌둥은 중국이 필
요한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스탈린의 의중을 떠봄으로써 스탈린의 기분을 몹시 상하
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또한 1949년 12월 19일 중국이 미국과, 더 나아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전문을 고의로 스탈린에게 흘리기도 했
다. 새로운 중소동맹조약 체결을 위해 스탈린을 압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마오쩌둥의 방식
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스탈린의 의심
과 두려움을 극도로 자극했다. 마오쩌둥은 양자강 도하 직후 스탈린을 안심시키고 중국
에 필요한 원조를 얻기 위해 일변도정책(lean to one side), 즉 친소정책을 선언했었다. 그
런데 정작 스탈린을 만났을 때 마오쩌둥은 중국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과 두려움에 불을 지
핀 것이다.
스탈린은 중국이 미국과 서방 쪽으로 기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애
치슨의 성명에서 잘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의 아시아정책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중소이간정
책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아시아의 티토(Tito)’가 되는 것을 “어떤 대가를 치르
더라도 막아야” 했다.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중국은 독자노선을 선택할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소련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중국혁명의
성공이 소련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고 진정으로 마오쩌둥을 신뢰하여 동쪽의 사업을 맡길 생
각이었다면 왜 중국의 장래와 정책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한국전쟁 결정을 각별
히 마오쩌둥에게 ‘극비’로 하였다가 결국에는 중국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기정사실’로
서 받아들이게 했겠는가.
또한, 스탈린이 “중국은 더 이상 내부투쟁에 바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지원에 관심과
힘을 쏟을 수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중국은 자신의 다른 필요를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한 말은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음을 유
의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어떤 숨은 계산을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당시 마오쩌둥과 중국지도부가 대만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
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49년 7월 류사오치가 스탈린을 방문하여 대만해방을 위한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현시점에서는’ 지원하기 어렵다고 했고 류사오치는 빈손으
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마오쩌둥은 양자강 도하 이후 또 다시 스탈린의 경고를 묵살하고 대만공격을 위한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쿠에모이(Quemoy)와 뎅부(Dengbu) 점령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중국의 해군과 공군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50년 여름에 대
만을 점령하여 혁명과업을 완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설령 중국이 여유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하게 되
면 중국의 대만점령 일정은 수정되거나 어렵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그런
점을 무시하고 중국군을 한국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중국을 곤경에 빠
뜨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이러한 스탈린의 태도와 관련하여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 질라드(Djilad)의 말은 의
미심장하다. 그에 의하면 스탈린은
“본능적으로, 모스크바 이외의 다른 곳에 혁명의 중심부가 만들어지는 것이 세계 공산주
의에서 소련의 최고지도권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
음은 물론이다. 스탈린이 혁명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점까지만 지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혁명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곤경 속에 버려 둘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탈린은 일반적으로 혁명에 반대했으며 찬성할 경우라도 항상 자신이 유리한 조
건에 한해서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라드가 전하는 스탈린의 혁명에 대한 태도나 앞서 살펴본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스탈린이 중국의 지도부나 북한의 지도부에게 한 말들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일종의‘말의
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된 마오쩌둥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도 좋지 싶다. 1964년 9월 24일 중국
공산당 ‘8기 10중 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저지되길 원했다. 그는 우리에게 내전을 치러서는 안 되며
장제스(蔣介石)와 협조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민족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
나 우리는 그가 말 한대로 하지 않았다. 혁명은 승리했다.
혁명 승리 이후 스탈린은 이번에는 중국이 유고슬라비아처럼 될 것이고 나는 제2의 티토
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중소상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
을 때 우리는 또 한 번의 투쟁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탈린은 조약에 서명하려하지 않
았다. 두 달간의 협상 끝에 그는 비로소 서명했다.
스탈린이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한 것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때인 1950년 겨울부터였다.
그때서야 그는 우리가 티토가 아니고 유고슬라비아가 아님을 믿게 되었다.”
요컨대 중국혁명의 성공과 중소조약의 체결은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허락하는데 결정적 계
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에게 자신감으로 작용했다기보다는 그의 지도력과 소련
의 이익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2. 김일성의 무력통일 요구
김일성의 통일전쟁 요구는 스탈린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스탈린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목적, 즉 한반도 지배를 시도할 ‘기회’를 제공했는가, 아니면 그럴 의도가 없는 스탈린으
로 하여금 마지못해 그것을 허락하도록 한 어떤‘압력’으로 작용했는가?
대다수 연구자들은 스탈린이 유리한 시점을 기다리다 중국혁명, 중소동맹조약, 소련의 원
자폭탄 보유, 미국의 불개입 가능성 등에 고무되어 한국전쟁을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스탈린이 세계혁명이나 한국전쟁을 추구했다는 증거보다는 김일성의 통일전쟁 요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고 볼만한 증거가 오히려 많다.
김일성은 미군철수 이전인 1949년 3월부터 스탈린에게 통일전쟁의 허락을 요구하기 시작
했다. 북한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소련을 공식방문 중이던 1949년 3월 7일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한국정세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상황으로 볼 때 군사적 수단으로 나라 전체를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
다. 남조선 반공세력은 결코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북조선을 공격하기
에 충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다. 지금이 우리가 주도권을 잡
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군대는 남조선 군대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조선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게릴라활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조선 인민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다.”
김일성은 미군이 남한에 남아 있는 상황임에도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통일을 과감하게 주
장한 것이다.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신속한 군사행동이 대안이라는 것이 주장
의 요지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보기에 김일성의 주장은 경솔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미군이 남한에 그대
로 남아 있으며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북한군은 김일성의 주
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남한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공격전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남한의 게릴라활동이나 남한인민의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군대를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은 무모한 짓으로 보였다. 그래서 스탈린은 “만약 적이 공격
한다면 그 때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군사적 통일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경우라면 누가 보더라도 북한의 행동은 정당한 것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철수한 뒤 김일성은 다시 스탈린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보기에 미군이 철수한 이상 38선 합의는 의미를 잃었고, 남조선 군대는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인민이 원하는 통일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철수에 대한 스탈린의 판단은 김일성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스탈린은 미군
철수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경계했다.“미군철수의 목적은 남한군대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
고, … 8월 말까지는 북한군의 완전 파괴를 위해 기습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스탈린
의 판단이었다. 남한의 침공위협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게 개입할 ‘구실’을 주
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소련이 남북한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은 절대로 피해
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혁명의 진전은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를 고무하기에 충분했다. 앞서 보
았듯이 중국혁명은 스탈린의 지도력의 한계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북한의 지도부에게
는 조국통일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박명림의 연구에 의하면, 북한의 지도부
와 언론은 중국에서의 사태 진전을 “일순간도 놓치지 않고” 추적했다.
북한지도부에게 중국혁명의 성공은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인민들의 거대한 환희’
이며, ‘20세기 중엽에서 전 세계를 진동하는 대사건’이고, ‘세계민주진영의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동방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김일성
으로서는 중국혁명이 성공한 이상 해방전쟁을 더 연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련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소련을 방문 중인 1950년 1월 17일 다시
스탈린의 허락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의 김일성의 요구는 요구라기보다 말 그대
로 ‘압력’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러했다.
첫째, 김일성은 스탈린을 마오쩌둥과 비교하면서 스탈린의 결단을 촉구했다. 김일성은 마
오쩌둥이 “중국에서 전쟁이 끝나면 원조”하겠다고 약속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탈린
동지와 만날 수 없다면 마오쩌둥과 만날 생각”임을 내비쳤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로부터
“모든 문제에 관한 지시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일성의 말에는 상당한 뉘앙스가 있다. 그것은 마오쩌둥이 한국의 지원에 적극적인데 반
해 스탈린은 그렇지 않다는 불만의 의미일 수도 있고, 스탈린이 당연히 마오쩌둥과 한국문
제를 논의했을 것이라는 강요와 기대의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일성은 마오
쩌둥과 만나면 “동방코민포름을 창설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생각
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동방코민포름에 대한 언급은 분명 스탈린을 자극했을 것이다. 1949년 5월 김일
(金日)이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 마오쩌둥은 동방코민포름에 대해 얘기한 바 있는데, 그때
그는 중국공산당이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부터 이 문제에 관한 제안을
받았는데 그것이 군사동맹의 창설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반면 스
탈린은 1949년 7월 류사오치를 만났을 때 동방코민포름 창설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김일성
은 그처럼 민감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스탈린이 계속 거부한다면 마오쩌둥과 상의하여 일을
도모할 수도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 것이다. 그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의 최고지도자의 ‘지
도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스탈린의 믿을 수 있는 동지임을 강조
했다.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규율 있는 인간이며 스탈린 동지의 지시는 자신에게 법”이
며,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독자적으로 공격을 시작할 수는 없다”고 말했
다.
1950년 1월 들어와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다. 마오쩌둥
은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었고, 1월 5일에는 트루먼이 ‘현시점에
서’대만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으며, 6일에는 코민포름이 일본공
산당을 비판하면서 미군에 대항할 것을 요구했고, 12일에는 애치슨이 한반도와 대만을 미국
의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것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큰 영
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애치슨의 방위선 선언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던
미군의 개입가능성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북한
의 배후에 있고 북한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큰 전쟁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김일성의 주장을 내놓고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지시’를 내리는 일만 남았던 것이다.
셋째, 김일성은 당장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인민의 지지를 잃게 될 수도 있
음을 강조했다.
“남조선 인민은 나를 신뢰하며 우리의 무장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게릴라활동으로 문제
를 해결할 수 없다. 남조선 인민은 북한이 좋은 군대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최근 나
는 조국의 통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하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혹
시라도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통일사업이 지연되면, 나는 조선인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
다.”
김일성의 말은 자신과 조선인민이 스탈린의 허락을 고대하고 있음을 격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로서 그리고 세계혁명의 최고지도자로서 스탈린이 김일성
의 요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의 분위기를 흐루시초프는 이
렇게 전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이승만과 반동적인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남한
을 해방시키려는 김일성의 거역할 수 없는 열망을 단념하라고 권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렇게 했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의 세계관에 모순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김일성을 고무한 스탈
린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내가 스탈린의 위치에 있었다면 나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요컨대 김일성은 스탈린이 조선의 무력통일을 더 이상 반대하거나 미룰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스탈린에게 그것은 내키지 않는 그리고 위험천만한 사업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행동을 해야만 했다.
첫댓글 한국전쟁으로 대만이 무사할 수 있었군요...
6.25에 이런 배경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