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n교육은 보통 부유하고 야심있는 가문의 전유물입니다. 귀족계급에겐 교육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교육이 그들이 가진 작위를 더욱 빛나게 해주진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교육은 쓸모가 없습니다. 교육이 빵으로 배를 채워주진 않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들은 보통 개인 소유의 사업으로서 운영되었습니다. 공교육은 국가가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의 교육비용을 대준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여러모로 급진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공교육은 연구에 보너스를 주고, 에이전트 발생 비율을 높여줍니다. \n\n유럽의 여러 영향력 있는 지역들은 국가가 비용을 대는 일반적인 공교육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면 선동적인 사상을 갖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선 특이하게 “public” 학교란 그런 종류의 학교를 의미하는게 아니었습니다. 개인 사업 시설물로서 능력보다는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private” 학교는 오직 초청에 의해서만 학생들을 받는 곳이라는 개념의 반대로 “public” 학교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받아들이는 학교라는 의미에서 “public” 학교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2. 인구조사
\n\n인구 하나하나를 셈으로써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과세는 불공평할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불공평하게 됩니다. 또한 정부가 사람들의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주를 모니터할 수도 있고, 인구가 얼마나 빨리 성장하는지 계산할 수도 있으며, 군대에 충분한 숫자인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세금에 대해서 입니다. 인구조사는 세금수익을 늘립니다. \n\n인구조사와 과세는 적어도 성서시대 이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습니다. 나폴레옹의 통령정부 이전의 총재정부는 혁명이후 프랑스의 인구조사를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고, 이는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을 수 있게 해주고, 이를 통해 나폴레옹의 야심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징집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인구조사는 토마스 말서스(1766-1834)의 인구 성장에 관한 연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는 인구가 공급 가능한 식량을 앞지르게 되어 위기가 다가온다고 확신했습니다. 1800년의 인구조사법 시행으로 9백만명의 인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 정부에겐 이 숫자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3. 나폴레옹 법전
\n\n나폴레옹법전은 혁명사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들이지만, 한편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입니다. 어떤 조항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민주적이고, 반면에 어떤 조항들은 가장에게 부인과 아이들 위에 설 수 있는 매우 엄격한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법률체계를 만들려는 의도였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은 억제력을 증가시키고, 중산층과 서민층의 행복을 높입니다. \n\n나폴레옹은 그의 민법전이 자신의 다른 업적보다 소중히 여겨지기를 원했습니다. 1800년에 그는 유명한 변호사들에게 다섯달만에 프랑스 법률을 다시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시간을 철저히 지키진 못했지만, 그 법전은 여전히 현대 프랑스 법률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법률체계의 명확성은 많은 다른 비불어권 국가들에게도 매력적이었고, 현재 70여 국가에서 유사한 규범체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세계에서는 대부분 관례에 비추어 일상적인 법률의 적법성을 판단하는 관습법체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ㅇ';
존대말로 고치시는게 어떨지요 ㅎㅎ
네.."~ㅂ니다" 체로 바꿨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