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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戊子譜 大同統合本 發刊辭
-傳乘 三派 族譜를 達 始祖 中心으로 大同統合합니다.-
人類史에서 歷史를 소중히 다루고 기록하며 지켜온 民族과 歷史를 모르거나 等閑視한 민족의 差異는 현저합니다. 前者는 不滅의 길을 걸어 비록 모진 試鍊을 겪더라도 窮極에는 살아남아 歷史를 繼續 記錄하고, 後者는 비록 잠시 隆盛 했어도 結局 滅亡의 길을 걸어 人類史라는 舞臺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라가 亡하고 百姓이 뿔뿔이 흩어졌을지라도 自身의 歷史를 지키고 傳해 온 猶太民族은 亡國 二千年 만인 二十世紀 중반에 國民과 領土 主權을 찾았고, 더욱 놀랍게도 그들의 歷史를 기록 했던 言語까지 되찾았습니다. 反面 歷史를 記錄하지 않은 수많은 民族은 强盛 했음에도 不拘하고 사라진 民族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滿洲에, 中央아시아에 居住하던 수많은 北方民族은 늘 中國을 壓迫하는 强盛함이 있었어도 後代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民族이 많습니다.
우리 大韓民族이 中國 邊方의 北方 民族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他民族처럼 滅亡치 않고 隆盛함을 더해 가는 것은 다른 中國北方 民族과 달리 猶太民族만큼 歷史를 소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朝鮮時代의 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等과 八道地理誌 等 人文地理書 각 선비 賢人들의 文集과 日記 等은 좋은 歷史書가 되고 있습니다. 忠武公의 亂中日記 朴趾源 先生의 燕巖日記 北學議 近者의 白凡日誌 등 個人記錄도 모두 훌륭한 歷史 資料입니다. 더구나 家門마다, 氏族마다 갖고 있는 族譜는 偉大한 基礎 歷史書입니다.
이런 까닭에 民族의 恥辱, 日本帝國主義 强占 下에서 日本이 韓民族을 日本化 하려던 여러 가지 努力, 內鮮一體, 創氏改名 等 倭色化의 努力은 鷄卵으로 바위를 쳐서 깨려는 形局에 不過 했습니다. 그러나 歷史 기록 없이 植民地 解放을 얻은 많은 未開國은 아직도 宗主國 言語인 英語나 佛語를 公用語로 使用하며 宗主國에 文化的인 隸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族譜는 所重한 氏族 歷史書입니다. 나라의 歷史처럼 氏族의 族譜는 한 집안을 隆盛하게 하기에, 각 姓氏마다 族譜에 充實 하다면 우리 民族의 歷史는 더욱 탄탄 해지고 限量없는 文化的 豊饒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 意味에서 充實한 守譜는 愛國愛族의 길이기도 합니다.
大邱 金氏 門中은 비록 名門巨族은 아닐지라도 先代祖宗의 恩德으로 三系의 훌륭한 族譜를 五百年 以上 守譜하여 왔습니다. 朝鮮 太宗 時期에 入北하신 達 始祖의 咸鏡道 吉州派 族譜, 達 始祖의 孫子로 燕山君 一年 各己 入北, 入灣하신 浩然, 浩堅 兄弟 두 분의 咸鏡道 西浦派 族譜와 平安道 龍灣派의 族譜가 그것입니다. 近世에 印刷本으로 出刊된 記錄은 一八四三年 癸卯譜, 一八八八年 戊子譜, 一九二三年 癸亥譜, 一九三二年 壬申譜, 一九五八年 戊戌譜, 一九七八年 戊午譜에 이르는데 今番 새로 刊行하는 族譜는 一八八八年 戊子譜에 이어 두 甲子, 一百二十年만의 같은 戊子年의 出刊이기에 그 이름이 重複되어 第二戊子譜로 銘名하게 되었습니다.
以上의 族譜 가운데 癸亥譜는 咸鏡道의 吉州派, 西浦派의 別譜였고 癸亥譜 發刊한지 九年에 불과한 一九三二年 壬申譜를 펴낸 것으로 보아 현재 보관되어 있는 一九三二年 壬申譜가 最初의 三派 合本이 아닌가, 推定 됩니다. 以後 族譜는 한권으로 펴냈어도 지난 一九七八年 戊午譜까지 各派 사이의 守譜 形式은 그대로였습니다. 始祖는 達 할아버지 한분이신데 西浦派는 達 할아버지 三世 孫인 浩然 할아버지와 九世 孫이신 大聲 할아버지를 中始祖로 하여, 특이한 점은 九世 大聲 할아버지를 一世로 모신 점입니다. 한편 龍灣派도 三世孫이신 浩堅 할아버지를 中始祖로 역시 一世로 모셔 마치 3개 家門이 한집에 있는 듯, 相互 祖孫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中始祖를 모실 지라도 中始祖를 一世라 呼稱해드려서는 達 始祖께 대한 孝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交通과 通信이 어려워 吉州와 義州 사이 천릿길이 마치 現世紀의 大陸間 거리만큼 멀던 朝鮮時代는 中始祖를 始祖로 手記家承 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結果가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제 地球가 하나의 情報圈에 들고 世界가 一日往來하는 時代에 이르러 後孫의 道理로 당연히 達 始祖 앞의 한 子孫임을 決然히 보여야 始祖께 대한 孝道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咸鏡道 西浦派의 경우 達 始祖의 三世 孫 浩然 할아버지와 九世 孫이시면서 一世로 모셨던 舊譜 內容을 浩然 할아버지를 三世로 大聲 할아버지를 九世로 바로잡고 두 분께 각각 西浦派 中始祖이심을 銘記 해드리고, 또한 七宗中으로 세분된 龍灣派 즉 光化宗中 黃州宗中 舘里宗中 月華宗中 古城宗中 古寧朔麟山公宗中 古寧朔博川公宗中도 一世로 모신 中始祖 浩堅 始祖를 三世로 모시고 龍灣派 中始祖라고 銘記해 드린다면 西浦派는 무려 八世 世數가 增加하고 龍灣派 七門中도 二世의 世數가 增加 하는데 이는 創貫 以來 子孫들이 達 始祖께 바로 서는 것으로 위로는 達 始祖께 孝의 道理를, 아래로는 子孫之間 大同一統을 이루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大同統合의 意志는 지난 戊午譜 編輯人이신 故 重一宗親의 “三派 大同統合의 時期를 統一 以後 어느 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要旨의 遺稿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一九七八年 戊午譜 刊行當時는 自主國防과 美軍撤收說 等으로 國際情勢가 急變하여 統一이 멀지 않은 雰圍氣여서 곧 닥칠 듯한 統一 후로 大同統合을 미루셨으나, 30년 지난 昨今의 國際情勢는 南北이 永久的 分斷으로 固着化 되는 雰圍氣여서 大同統合을 또다시 30년을 미뤄서는 아니되겠다고 判斷하였습니다.
大同統合을 決行하기 위하여 첫 단추는 吉州, 西浦, 龍灣 各派의 合議를 導出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吉州派의 어른이신 泳範 宗親. 龍灣派의 어른이시며 門長이신 道潤 宗親 두 분 어른께 아뢴 大同 統合에 대하여 두 분 모두 欣快히 同議해 주셨습니다 남은 한派인 西浦派는 一九二一年 出生하신 西浦派의 獨子 文昌 宗親이 族譜上으로 마지막 記錄이었고, 이후 戊戌譜 戊午譜에도 後孫이 未登載여서 南韓에는 族譜上으로 한분도 계시지 않아 西浦派는 意見 收斂이 不可能하였습니다 또한 各派 어른 뿐 아니라 一般 宗親의 意見도 여쭙기 위하여 宗親會 홈페이지에 揭示한 大同統合 意見을 여쭙는 趣旨 글을 올리고 꼬리 글의 反對 意見을 收斂해 보았습니다. 꼬리 글은 反對意見이 전혀 없는 贊成意見 一邊倒여서 大同統合은 全宗親의 뜻이라 看做하고 大同統合을 決行 하였습니다.
族譜의 效用性은 앞으로 漸次 增大 될 것입니다. 女性部의 勞力으로 儒林이 反對하던 戶籍法이 바뀌어 向後 族譜의 重要性은 豫測하기 어려울 만큼 커졌다고 하겠습니다. 冠婚喪祭 時 特히 婚禮 時 族譜는 한家門과 家門이 連結 되는 重要한 證左가 됩니다. 따라서 戶籍騰本이 添附 되는 約婚節次에 向後 族譜內容이 添附書類가 될 것은 自明합니다. 今番 家乘미디어 李炳昌 社長님의 아이디어로 個人家牒과 在 族譜 證明書까지 宗親會에서 發給하도록 컴퓨터文書로 作成할 수 있어 宗親여러분 子孫 婚禮에도 萬全을 기할 수 있음 또한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의 第二戊子譜 編纂이 있기까지 獻身하여주신 總務團 여섯 분, 永錫 永夏 兄弟 宗親, 尙坤 宗親, 그리고 胤洪 延洪 敦洪 三兄弟 宗親 여러분의 勞苦에 깊은 感謝의 情을 表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超現代式 族譜가 나오도록 硏究 指導하여주신 家乘미디어 李炳昌 社長님께 깊은 感謝의 情을 드립니다.
二千八年 戊子年 開天節
達 始祖 二十二世 孫 宗親會長 齒醫學博士 平一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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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무자보, 대동통합본 발간사
-전승 3파 족보를 달 시조 중심으로 대동통합합니다.-
인류사에서 역사를 소중히 다루고 기록하며 지켜온 민족과 역사를 모르거나 등한시한 민족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전자는 불멸의 길을 걸어 비록 모진 시련을 겪더라도 궁극에는 살아남아 역사를 계속 기록하고, 후자는 비록 잠시 융성 했어도 결국 멸망의 길을 걸어 인류사라는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뿔뿔이 흩어졌을지라도 자신의 역사를 지키고 전해 온 유태민족은 망국 이천년 만인 이십세기 중반에 국민과 영토, 주권을 찾았고, 더욱 놀랍게도 그들의 역사를 기록 했던 언어까지 되찾았습니다. 반면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수많은 민족은 강성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민족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만주에,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수많은 북방민족은 늘 중국을 압박하는 강성함이 있었어도 후대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민족이 많습니다.
우리 대한민족이 중국 변방의 북방 민족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타민족처럼 멸망치 않고 융성함을 더해 가는 것은 다른 중국북방 민족과 달리 유태민족만큼 역사를 소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조선시대의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과 팔도지리지 등 인문지리서 각 선비 현인들의 문집과 일기 등은 좋은 역사서가 되고 있습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박지원 선생의 연암일기 북학의 근자의 백범일지 등 개인기록도 모두 훌륭한 역사 자료입니다. 더구나 가문마다, 씨족마다 갖고 있는 족보는 위대한 기초 역사서입니다.
이런 까닭에 민족의 치욕, 일본제국주의 강점 하에서 일본이 한민족을 일본화 하려던 여러 가지 노력, 내선일체, 창씨개명 등 왜색화의 노력은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려는 형국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기록 없이 식민지 해방을 얻은 많은 미개국은 아직도 종주국 언어인 영어나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종주국에 문화적인 예속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족보는 소중한 씨족 역사서입니다. 나라의 역사처럼 씨족의 족보는 한 집안을 융성하게 하기에, 각 성씨마다 족보에 충실 하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더욱 탄탄 해지고 한량없는 문화적 풍요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 의미에서 충실한 수보는 애국애족의 길이기도 합니다.
대구 김 씨 문중은 비록 명문거족은 아닐지라도 선대조종의 은덕으로 삼계의 훌륭한 족보를 오백년 이상 수보하여 왔습니다. 조선 태종 시기에 입북하신 달 시조의 함경도 길주파 족보, 달 시조의 손자로 연산군 일 년 각기 입북, 입만 하신 호연, 호견 형제 두 분의 함경도 서포파 족보와 평안도 용만파의 족보가 그것입니다. 근세에 인쇄본으로 출간된 기록은 1843년 계묘보, 1888년 무자보, 1923년 계해보, 1932년 임신보, 1958년 무술보, 1978년 무오보에 이르는데 금번 새로 刊行하는 족보는 1888년 무자보에 이어 두 갑자, 120만의 같은 무자년의 출간이기에 그 이름이 중복되어 제이무자보로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족보 가운데 계해보는 함경도의 길주파, 서포파의 별보였고 계해보 발간한지 9년에 불과한 1932년 임신보를 펴낸 것으로 보아 현재 보관되어 있는 1932년 임신보가 최초의 3파 합본이 아닌가 추정 됩니다. 이후 족보는 한권으로 펴냈어도 지난 1978년 무오보까지 각파 사이의 수보 형식은 그대로였습니다. 시조는 달 할아버지 한분이신데 서포파는 달 할아버지 삼세손인 호연 할아버지와 9세손이신 대성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여, 특이한 점은 9세 대성 할아버지를 1세로 모신 점입니다. 한편 용만파도 3세손이신 호견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역시 1세로 모셔 마치 3개 가문이 한집에 있는 듯, 상호 조손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중시조를 모실 지라도 중시조를 일세라 호칭해드려서는 달 시조께 대한 효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어려워 길주와 의주 사이 천릿길이 마치 현세기의 대륙 간 거리만큼 멀던 조선시대는 중시조를 시조로 수기가승 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제 지구가 하나의 정보권에 들고 세계가 1일 왕래하는 시대에 이르러 후손의 도리로 당연히 달 시조 앞의 한 자손임을 결연히 보여야 시조께 대한 효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함경도 서포파의 경우 달 시조의 3세 손 호연 할아버지와 9세 손 이시면서 1세로 모셨던 옛 족보 내용을 호연 할아버지를 1세로 대성 할아버지를 9세로 바로잡고 두 분께 각각 서포파 중시조이심을 명기 해드리고, 또한 7종중으로 세분된 용만파 즉 광화종중 황주종중 관리종중 월화종중 고성종중 고령삭인산공종중 고령삭박천공종중도 1세로 모신 중시조 호견 시조를 3세로 모시고 용만파 중시조라고 명기해 드리면 서포파는 무려 8세 세수가 증가하고 용만파 7문중도 이세의 세수가 증가 하는데 이는 창관 이래 자손들이 달 시조께 바로 서는 것으로 위로는 달 시조께 효의 도리를, 아래로는 자손지간 대동일통을 이루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동통합의 의지는 지난 무오보 편집인이신 고 중일종친의 3파 대동통합의 시기를 통일 이후 어느 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지의 유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978년 무오보 간행당시는 자주국방과 미군 철수설 등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여 통일이 멀지 않은 분위기여서 곧 닥칠 듯 한 통일 후로 대동통합을 미루셨으나, 30년 지난 작금의 국제정세는 남북이 영구적 분단으로 고착화 되는 분위기여서 대동통합을 또다시 30년을 미뤄서는 아니 되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동통합을 결행하기 위하여 첫 단추는 길주, 서포, 용만 각파의 합의를 도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길주파의 어른이신 영범 종친. 용만파의 어른이시며 문장이신 도윤 종친 두 분 어른께 아뢴 대동 통합에 대하여 두 분 모두 흔쾌히 동의해 주셨습니다. 남은 한파인 서포파는 1921 출생하신 서포파의 독자 문창 종친이 족보상으로 마지막 기록이었고, 이후 무술보 무오보에도 후손이 미등재여서 남한에는 족보상으로 한분도 계시지 않아 서포파는 의견 수렴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또한 各派 어른 뿐 아니라 일반 종친의 의견도 여쭙기 위하여 종친회 홈페이지에 게시한 대동통합 의견을 여쭙는 취지 글을 올리고 꼬리 글의 반대 意見을 수렴해 보았습니다. 꼬리 글은 반대의견이 전혀 없는 찬성의견 일변도여서 대동통합은 전종친의 뜻이라 간주하고 대동통합을 결행 하였습니다.
족보의 효용성은 앞으로 점차 증대 될 것입니다. 여성부의 노력으로 유림이 반대하던 호적법이 바뀌어 향후 족보의 중요성은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커진다고 하겠습니다. 관혼상제 시 특히 혼례 시 족보는 한가문과 가문이 연결 되는 중요한 증좌가 됩니다. 따라서 호적등본이 첨부 되는 약혼절차에 향후 족보내용이 첨부서류가 될 것은 자명합니다. 금번 가승미디어 이병창 사장님의 아이디어로 개인가첩과 재 족보 증명서까지 종친회에서 발급하도록 컴퓨터문서로 작성할 수 있어 종친여러분 자손 혼례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음 또한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의 제2무자보 편찬이 있기까지 헌신하여주신 총무단 여섯 분, 영석 영하 형제 종친, 상곤 종친, 그리고 윤홍 연홍 돈홍 삼형제 종친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초현대식 족보가 나오도록 연구 지도하여주신 가승미디어 이병창 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정을 드립니다.
2008년 무자년 개천절
달 시조22세손 종친회장 치의학박사 평일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