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한 여성이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살았다. 딸이 성년이 되어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그녀 자신도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두 사람은 소유한 물건들을 하나씩 팔아 생계를 이었다. 마침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편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져 온 사파이어 보석 박힌 금목걸이마저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성은 딸에게 목걸이를 주며 어느 보석상에게 가서 팔아 오라고 일렀다. 딸이 목걸이를 가져가 보여 주자 보석상은 세밀히 감정한 후, 그것을 팔려는 이유를 물었다. 처녀가 어려운 가정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는 말했다.
"지금은 금값이 많이 내려갔으니 팔지 않는 것이 좋다. 나중에 팔면 더 이익이다."
보석상은 처녀에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주며 당분간 그 돈으로 생활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내일부터 보석 가게에 출근해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처녀는 날마다 보석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맡겨진 임무는 보석 감정을 보조하는 일이었다. 처녀는 뜻밖에도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빠른 속도로 일을 배워 얼마 안 가 훌륭한 보석 감정가가 되었다. 그녀의 실력과 정직성이 소문나 사람들은 금이나 보석 감정이 필요할 때마다 그녀를 찾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보석상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보석상이 처녀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지금 금값이 많이 올랐으니 어머니에게 말해 그 금목걸이를 가져오라. 지금이 그것을 팔 적기이다."
그녀는 집으로 가 어머니에게 목걸이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보석상에게 가져가기 전에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감정했다. 그런데 그 금목걸이는 금이 아니라 도금한 것에 불과했다! 가운데에 박힌 사파이어 보석도 미세하게 균열이 간 저급한 것이었다.
이튿날 보석상이 왜 목걸이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처녀는 말했다.
"가져올 필요가 없었어요. 배운 대로 감정해 보니 전혀 값어치 없는 목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어요."
그녀는 보석상에게 그 목걸이의 품질을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 분명한데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보석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그때 말해 줬다면 내 말을 믿었겠느냐? 아마도 너와 네 어머니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내가 값을 덜 쳐주려 한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아니면 넌 절망해서 살아갈 의지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진실을 말해 준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겠는가? 아마도 네가 보석 감정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너는 보석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나는 너의 신뢰를 얻었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니기 시작한 초기에 나는 네팔의 랑탕 지역을 오를 계획을 세웠다. 10월과 11월이 가장 좋은 시기이지만 장발의 여행자가 카트만두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을 때는 1월이었다. 마침 그곳에서 등반 전문가인 네팔 친구를 만나 내 트레킹 일정을 설명했다. 샤브루베시라는 지역에서 출발해 해발 3,800미터의 캰진 곰파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일주일 코스였다. 지난번 트레킹 때는 셀파족 가이드와 함께 많은 짐을 지고 갔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홀가분하게 혼자서 짐도 최소한으로 줄여 떠날 생각이었다. 이미 트레킹 경험이 있었기에 나름 자신감이 넘쳤다.
슬리핑백도 없이 단출하게 떠난다는 내 얘기를 듣고 친구는 약간 염려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그 랑탕 트레킹은 내 인생에서 티베트 여행과 맞먹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었다. 트레일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험하고 복잡했다. 가이드가 없으니 수시로 길을 잃어 일주일이 열흘 코스로 바뀌었으며, 산악 주민들도 그저 뒷동산에 놀러온 듯한 내 차림을 보고는 놀라서 쳐다보았다. 샤브루베시에서 출발할 때의 세련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열흘 뒤 카트만두로 돌아올 때는 장발의 유목민이었다.
그러나 고통스럽기만 했는가? 그 후 스무 번이 넘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고 아름다운 여행이 랑탕 트레킹이다. 눈과 영혼을 압도하는 가네쉬 히말의 설산 때문만이 아니다.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중간의 가게에서 야크 털실로 짠 두툼한 재킷과 장갑과 모자를 사서 온몸을 감쌌다. 슬리핑백 없이 산악지대의 겨울밤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게스트하우스 주인들의 배려로 주로 부엌에서 잠을 잤다. 덕분에 주인 가족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며, 이 인간과 인간의 교류는 이후의 내 트레킹 방식을 바꿔 놓았다.
고산지대의 햇빛에 얼굴은 폭탄 맞은 것처럼 그을리고 입술은 부르트고 몸은 녹초가 되어 돌아왔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때 그 네팔인 산악 전문가를 만났다.
내가 물었다.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랑탕 지역의 환경을 잘 알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왜 조언해 주지 않았어?"
그 친구가 말했다.
"네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너에겐 더 좋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트레킹을 할 테니까 말야. 그리고 도중에서 필요한 장비와 도구들을 구할 수 있으리란 걸 난 알고 있었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란 것도."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그 친구가 만약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면 랑탕 트레킹은 내 혼에 그토록 깊이 각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깨달음의 조언들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나를 불확실성과 껴안도록 하려고.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 안내자가 아니라 눈앞의 실체와 만나도록 하려고.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painting_Nicholas Roer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