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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어 흔히 '금강산 건봉사'라 부른다. 이 지역은 휴전선 인근이라 대한민국 영역 중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셈이다.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가 절을 짓고 원각사(圓覺寺)라 부른 것이 시초라고 전해지나, 이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삼국 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에 얽힌 창건 설화처럼 전설로 생각되고 있다. 남북국 시대부터 중건되고 불교 행사가 열린 기록이 있으며, 고려 초기에 고려 태조의 스승인 도선이 왕명으로 중수하고 원각사를 중수하고 절의 서쪽에 봉황 모양의 돌이 있다하여 서봉사(西鳳寺)라 불렀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인 1358년에 나옹이 중창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였다.
조선 세조 때는 원당으로 지정되고 세조가 직접 행차하여 어실각을 건립하도록 한 뒤, 조선 시대 내내 왕실의 원당으로 계속 꾸준한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다가 임진왜란 중 강탈당한 바 있었다. 이를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돌려받아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본산의 하나로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전소되면서 조계종에서는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6·25전쟁 전에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어실각·불이문 등 총 642칸에 이르렀으나 6·25전쟁 때 거의 폐허화되었다.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외에도 8기의 탑, 48기의 부도, 31기의 비석, 44점의 고승영정 등이 있었다.
지금은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만 단촐하게 서 있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포함된 위치 때문에 한국 전쟁 이후 오랫동안 민간인은 석가탄신일 하루만 특별히 드나들 수 있었다. 1989년에야 전면 출입이 허용되었다.
건봉사는 신라 때 1만일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외워 극락에 오른다는 만일염불회를 개최한 이래 염불승을 많이 배출하였고, 한국의 대표적인 염불도량으로서 전통을 이어왔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머문 곳이라 호국불교의 본산으로도 불린다.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무지개다리인 능파교는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일제 강점기의 팔작지붕 사문인 불이문(不二門)은 한국 전쟁 때 이 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원도 문화재자료이다.
건봉사 불이문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건물구조는 팔작지붕에 익공(翼工)계이다. 지붕의 네 모퉁이에 용두(龍頭)가 있으며, 정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글씨는 큰 글자를 특히 잘 썼던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장대석(長大石)으로 기단(基壇)의 사방이 둘러져 있고 한 변의 길이 62㎝, 높이 26㎝의 초석(礎石)은 사방에 모를 죽였다. 초석간 거리는 정면 308㎝, 측면 246㎝이다. 기둥은 석주(石柱)와 목주(木柱)가 혼용되어 있다. 높이 155㎝의 석주 하단은 사각형이고, 상면은 배흘림수법이 가미된 원통형이다. 이 부분에는 길이 94㎝의 금강저(金剛杵)가 조식되어 있고, 윗면에 원형 돌출대를 마련하여 석주를 받치고 있다.
천장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에는 ‘불이문 중건 단청 대시주(不二門重建丹靑大施主)’ ‘설암당 봉흔(雪巖堂奉欣)’ ‘불기 2955년 무진 4월일(佛紀二九五五年戊辰四月日)’이라는 글이 묵(墨)으로 씌어져 있다.
고성 건봉사 능파교는 건봉사대웅전 지역과 극락전을 연결하고 있는 홍예교로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 되어있다. 조선시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경내 불이문 옆에있는 능파교신창기비(凌坡橋新創記碑.숙종 34년 1708 건립)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석재를 대웅전의 석계(石階)와 산영루(山映樓)수축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리 규모는 폭3M, 길이14.3M, 다리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아치(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지름이7.8M이고 높이는 기석(基石)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의 높이는 조금더 높다.
적멸보궁
이러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그 자체가 불신(佛身)과 똑같이 여겨지므로 불상을 조성하지 않고 진신사리만 모시는데 이러한 사찰을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이 적멸보궁 뒤쪽에는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탑이 세워져 있는데 선조 38년(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경종 14년(172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최근에 새로 지은 "적멸보궁" 뒤편 오른쪽 앞에 건립되어 있는 치아사리탑은 천고의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방현의 지대석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구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입니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는데 하대석에는 복련, 상대석에는 양련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은 높이 53cm의 구형인데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개의 돌로 조각된 상륜부는 연국문대, 편구형부재, 상단에 여의두문이, 하단에 화문이 새겨진 부재가 있고 사리탑의 전체 높이는 1.6m입니다. 지금의 적멸보궁은 1994년 5월 25일 준공하였습니다.
건봉사 바라밀 석주
“석주의 10가지 도형…탑돌이 정진의식 잔영”
고성 건봉사는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원각사, 서봉사, 건봉사라는 이름으로 변화, 발전되어 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 완전 폐허가 됐다. 그러나 경내에는 현재 봉황 석주, 대방광불화엄경 석주, 만(卍)자 석주, 그리고 바라밀 석주 등 이색적인 석주 여러 개가 남아 있어 흥미를 끈다. 이 가운데서 바라밀 석주에 새겨진 열 가지 도형은 지금은 사라진 탑돌이 풍속-십바라밀 정진의식(精進儀式)의 잔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봉황.대방광불화엄경.卍자 석주 등도 흥미
탑돌이서 유래…석주에 새겨진 유일의 도형
사진설명: 고성 건봉사 바라밀 석주(왼쪽).
사진설명: 고성 건봉사 바라밀 석주(오른쪽).
건봉사 바라밀 석주는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높이 약 160cm 정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네모 돌기둥 두 개에 모두 10개 종류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이 십바라밀 정진도형이다. 오른쪽 기둥에는 열 개의 바라밀정진도형 중에서 ①, ③, ⑤, ⑦, ⑨에 해당하는 5개가, 왼쪽 기둥에는 ②, ④, ⑥, ⑧, ⑩에 해당하는 5개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기둥의 것은 각각 ①달, ③신, ⑤구름, ⑦좌우로 놓인 작은 원 두 개, ⑨네모를 둘러 싼 두 개의 동심원 형태로 되어 있고, 왼쪽 기둥의 것은 각각 ②별과 반달(상현달), ④가위, ⑥금강저, ⑧상하로 놓인 작은 두 개의 원, ⑩세 개의 작은 원이 큰 원 속에 들어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이 이처럼 석주에 새겨져 있는 유례는 우리나라에서는 건봉사 바라밀 석주 밖에 없다. 그러나 십바라밀 정진도형 자체는 건봉사 석주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물론 아니고 오래전부터 불교 전통의식의 하나인 탑돌이 행사에 적용되어 왔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가 없으나 과거에는 사월초파일이나 큰 재(齋)가 있을 때면 불자들이 등을 밝혀 들고 탑을 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십바라밀 정진의식이 성행했었다. 탑돌이는 보통 삼귀의례를 마친 후 십바라밀 정진도형을 따라 탑 주위를 돌게 된다. 예컨대 보시바라밀 정진 시에는 둥근 달 모양을 그리면서 돌고, 지계바라밀의 경우에는 반달 모양, 인욕바라밀의 경우에는 신발[鞋經]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사진설명: ? 십바라밀 정진도 중 가위(정진바라밀)와 금강저(지혜바라밀).
십바라밀이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한 열 가지 수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십바라밀을 정진.수행하면 생사의 미해(迷海)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의 명법품(明法品) 내용을 보면, 정진혜보살의 물음을 받고 법혜보살이 방일하지 않는 열 가지 행법과 그 행법으로부터 이루는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열 가지 행법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願).역(力).지(智) 등의 십바라밀이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의 내용은 1935년에 편찬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의 정진도설(精進圖說) 조(條)에 해인도(海印圖)와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해인도라는 것은 일명 법성도(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 신라 무열왕 때에 의상조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엄화상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할 때, 스승이 원(圓)과 방형(方形)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72개의 법계상(法界相)을 그려 문도들에게 제시하자 의상조사가 72개의 뜻을 다시 요약한 게송을 일정한 도형 속에 채워 쓴 것을 말한다. 해인도는 인도(印道 : 글자가 연속적으로 쓰인 길)가 직각으로 꺾인 인각(印角)을 54개 가진 미로(迷路)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인도를 따라 30개 구(句). 총 210글자가 시작과 끝이 이어져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되어 있다.
이 해인도와 병행하여 십바라밀 정진도형이 도설(圖說)되어 있는데, 그 모양을 들여다 보면 바라밀 석주의 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바라밀 석주에서는 금강저의 모양이 제 모습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나 정진도형에서는 ‘H’자 모양으로 간단하게 그려져 있고, 또한 가위가 네 잎을 가진 꽃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양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의미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석주의 경우는 상징형의 실재 모양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렸고, 도설의 경우는 탑돌이 할 때의 동선(動線)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그럼 여기서 〈석문의범〉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건봉사 바라밀 석주에 나타난 각 도형들의 특징과 그 의미를 해석하여 정리해 보자.
①원(圓)은 보름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시바라밀을 상징한다. 재(財).법(法).무외(無畏)의 3종 보시로써 중생심을 따라 모두 만족케 하는 것이 마치 청정 허공에 광명월륜(光明月輪)이 치우침이 없이 원조(圓照)함과 같으므로 보시바라밀을 보름달에 비유한 것이다. 달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수월보살, 만월보살 등 관음보살의 화현들이 있고, 같은 뜻을 표현한 말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잘 알려져 있다.
②반원은 반달 또는 상현달을 나타낸 것으로 지계바라밀을 상징한다. 옳지 못한 일과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정계(淨戒)를 점차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마치 상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지계바라밀을 상현달에 비유한 것이다.
③신발[鞋經]은 인욕바라밀을 상징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치욕을 견디어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이 마치 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하여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발에 비유한 것이다.
④가위(剪刀)는 정진바라밀을 상징한다. 한 곳에 마음을 쏟아 수행하는 도중에 마음을 딴 데로 옮기지 않는 것이 마치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에 유진무퇴(有進無退)함과 같으므로 가위에 비유한 것이다.
⑤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습의 구름은 선정바라밀을 상징한다. 마음을 깊은 한 곳에 모아서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많은 구름이 드리워 대지의 열염(熱炎)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음으로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⑥금강저는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지혜의 공장(工匠)으로써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산을 뚫고 부수어 번뇌의 광맥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불로써 단련하여 자기 불성의 금보(金寶)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치 금강저의 견고함과 날카로움과 밝음이 구족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금강저에 비유한 것이다.
⑦작은 두 개의 원을 수평으로 둔 것은 두 개의 샘(泉)을 나타낸 것인데, 방편바라밀을 상징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샘을 두 개의 샘으로 나누어 동서(東西)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좌우쌍정(左右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⑧작은 두 개의 원을 아래위로 둔 것은 앞과 뒤의 샘을 나타낸 것으로 원(願)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찰(佛刹)과 일체 중생의 바다에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편입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샘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음료를 각기 얻는 것과 같으므로 전후쌍정(前後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⑩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삼세의 일체법을 여래의 지혜로 두루 깨우치되, 가로막는 것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이 마치 달이 별 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성중원월(星中圓月)에 비유한 것이다.
사진설명: 해인급십바라밀정진도. 안진호 편 〈석문의범〉 卍상회, 1935.
그런데 지(智)바라밀 도형은 별 무리 속에 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형국으로 되어 있어 월중성(月中星)이지 성중월(星中月)이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서 〈석문의범〉 편자인 안진호(安震湖)는 달 주변에 있는 빽빽한 별무리는 달빛에 은폐됨으로 권역 밖에는 별을 그리지 않고 달과 겹쳐 보이는 별만 권역 안에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완벽한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쨌든 건봉사 바라밀 석주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석주를 사찰 장식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잔영으로 남은 탑돌이 풍속을 되살려 불자들의 십바라밀 수행 의식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함과 아울러 훌륭한 전통문화로서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만일염불회
만일염불도량, 염불만일회,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한다. 천일 또는 만일 동안을, 죽은 뒤 극락세계인 아미타불의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소리내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이 행사는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지므로 따로 전답을 마련하는 등 재정을 충실하게 한 뒤에 진행된다.
747년(신라 경덕왕 6)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처음 행해져 775년(혜공왕 11)에 마쳤는데, 행사에 참여한 200여 명의 승려 가운데 31명의 승려가 서방 극락정토를 향하여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선종(禪宗)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휴정(休靜)이 염불권수(念佛勸修)의 뜻을 펼친 이후 염불수행이 성행하였고, 많은 사찰에서 이와같은 모임을 만들어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빌었다.
미타신앙 [彌陀信仰]
아미타불신앙 ·정토신앙이라고도 한다. 10겁(劫) 이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法藏)비구가 48원(願)을 세우고 보살로서 수행을 한 끝에 그 원을 다 성취,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미타불이 있는 곳이 극락정토인데 그곳에는 일체의 고(苦)가 없고 일체의 윤회(輪廻)도 없으며, 오로지 기쁨 ·평안만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살아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염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이같은 미타신앙은 인도 ·중국에서 일찍부터 유행하였던 까닭에 이 미타신앙에 관하여 설(說)하고 있는 경전 ·불서 등이 무려 200종을 넘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량수경(無量壽經)》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등인데, 이들을 미타 3부경(三部經) 또는 정토 3부경이라 부른다. 신라 선덕여왕 때 《삼국유사》의 기록과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를 썼던 것을 보면, 이때 한국에 미타신앙이 이미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준 [寬俊, 1850~1919.9.13]
본관 동래(東萊). 속명 정쌍룡(鄭雙龍). 호 만화(萬化). 관준은 법명. 강원 간성(杆城) 출생. 9세 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금현(錦玹)의 문인(門人)으로 들어가, 태허(太虛)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72년(고종 9) 왕가의 기원도량인 석왕사(釋王寺) 봉향관(奉香官)에 임명되고, 1874년 승통(僧統), 1878년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의 총섭(摠攝)이 되었다. 그때 건봉사 3180여 칸의 대찰이 대화재로 전소하자, 중창의 도화주(都化主)가 되어 건봉사로 돌아와 1천여 칸을 중건하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01년 왕으로부터 부종수교 전불심인 대각등계존자(扶宗樹敎傳佛心印大覺登階尊者)의 사호(賜號)를 받은 뒤, 팔도승풍규정원장(八道僧風糾正院長) 및 관동도교정(關東道敎正)이 되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승직을 버리고 전국의 명찰을 유랑하다가 1919년 건봉사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후학 정호(鼎鎬)가 그곳에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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