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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영원
한국 유란시아 포럼
발표자 장시영
요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가졌을 질문 중의 하나가, 이 세상 삶이 끝나면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느님과 신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의 하나로서, 필자도 절대자 하나님과 우리의 실제 관계, 하늘나라와 한시적 삶의 의미, 유한존재의 근원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늘 생각 깊숙한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질문은 허용되지도 않고 헛된 일이며, 심오한 지혜의 가르침도 인간이 창안한 빈틈없는 논리만 발견될 뿐이다. 유한한 존재의 이유와 운명에 대한 필연성은 아무도 말해 줄 수 없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답답함과 의문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소망과 현세적 즐거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익숙하게 만들었고, 아무 운명도 제시되지 않은 채,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삶을 즐기고 적당하게 섬기는 것이 시간의 기능처럼 되어왔다. 그런 20세기 말, 새 천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유란시아 책이 출현했다.
“유란시아” 계시는 인류의 모든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의 심각한 질문은 한 두 마디 문장으로 해결될 정도로, 이 계시에 담긴 진리는 방대하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운명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필자가 찾았던 유한성에 대한 이유와 운명을 짧은 소견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한시적인 세속의 삶이 그것이 기원된 절대적 차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며, 그 운명의 끝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모든 것이 한시적인 우리가, 시간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어, 그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시간은 더 이상 한시적 의미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를 새로운 진리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목차
1. 서론
2. 시간에 대한 이해
(1) 과학적 실체
(2) 철학적 의미와 가치
(3) 종교적 운명
(4) 유란시아의 영원
3. 시간의 본질
(1) 시간의 활용
(2) 시간의 속성과 기능
4. 시간의 의미와 가치
(1) 시간의 의미
(2) 과거-현재-미래의 의미
(3) 현재의 가치
5. 시간의 운명
(1) 진화의 필연성
(2) 불완전의 향연
(3) 개인의 생존
6. 결론
1. 서론
삶은 우주 안에서 이루어지며 우주의 바탕은 시간과 공간이다. 사물과 존재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면, 만물은 물론이고 시간, 공간 자체도 기원과 운명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유래된 차원과 무관할 수 없다. 그 관련성과 함께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유한자가 유한이 아닌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계시를 통하여 초-유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한시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불멸의 세상에 대한 참된 소망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유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공간개념에서 말하는데, 공간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다. 사실 무한은 "마지막 숫자에, 언제나 하나를 다시 더할 수 있다."는 양적 확장성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개념 파악이 쉽다. 그러나 시간은 좀 다르다. 기능과 의미에서 다르며, 시간의 끝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고 그 전체를 개념화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남성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실체를 다루는 과학이나 실존을 다루는 철학이나 초월 세계를 다루는 종교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각성과 깨달음이 계속 되어 왔겠지만, 어떤 기록도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 시원을 아는 자가 아닌 한, 아마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한 시간에 대한 본질을, 유란시아 책은 많은 다른 이야기와 함께 전해주고 있다. 시간-공간의 기능, 의미, 기원과 같은 이야기가 인류를 위해 밝혀져 있다.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모르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된 내용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여, 많은 독자들이 책 스스로 5번째 계시라 말하는 이 책의 내용을 서슴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계시는 단순히 무언가를 새로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어둠과 혼란에 빠진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 빛을 비추어, 영원하고 무한한 하느님과 인간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음을 밝혀주고, 한편으로는 "집대성된 현대적 개념에서 새롭고 정의로운 시각을 얻어, 영원자의 본질특성들을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그로써 영원한 운명을 선택하려고 깨어나는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에 나선, 진취적인-시각의 남녀“ 를 도우려는 신성한 목적이 있다.
여러 계시 내용 중에서,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글은 118 편이다. 신성한 우주, 창조주의 뜻, 그리고 이제 새롭게 펼쳐야 할 진리의 모든 것을 설명한 다른 글들과 함께 인간과 우주적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밝혀주는 글이다. 특히 시간은, 우리가 아는 한, 모든 것이 변화되어 사라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영원의 관계와 의미를 이 책의 계시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우리에게 불멸의 시간은 이름으로만 존재하거나, 스스로를 위한 막연한 꿈으로 끝날 것이다.
아직 정확하게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에 대한 1장의 글을 중심으로, 유한한 시간과 불멸의 시간, 그리고 영원에 대한 책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는 의식이, 영원으로 향하는 실존을 가늠한다는 아래의 글에서 생각이 시작되고 있다.
“어떤 주어진 지능체의 시간 의식의 단위와 성숙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시간 단위는 하루나 일 년 또는 더 긴 기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것으로 의식적 자아가 삶의 상황들을 평가하는 것에 따르고, 그리고 착상하는 지능체가 현세적 실존의 사실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것에 따르는, 기준이다”
이 문단은 일시적 시간과 불멸의 시간의 관계, 곧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시간에 대한 이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시적이다, 물질계의 만물에는 끝과 소멸이 있다. 계시자들은 한시적 세계의 우리 인간을 필사자라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 일시와 불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 차원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연결하는, 특별한 혜택을 받은 지적 생명체이기에 그렇게 호칭하는 것 같다.
유한한 세계에서 시간은 변화와 소멸이라는 현상을 일으키지만, 그렇다고해서 시간이 멈춘다고 영원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시간의 근원을 모르고 있으니, 그 결과인 변화와 움직임으로, 시간을 이해하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시각에서 본다면, "시간은 동작으로 인하여 발생되며 마음은 순차성을 선천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점에서 움직임은 시간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유란시아 계시처럼, 만물에는 근원이 있다는 본질적인 관점에서는“움직임에 기초를 둔 우주 시간 단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 안에서 시간을 이해해야만 한다.
시간에 대한 일반적 시각과 근원적인 해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1) 과학적 실체
과학에서의 시간은 물리적 실체가 대상이다. 실체의 근원과 현상을 사실로 다루기 때문에, 대개 공간적 의미로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3개의 알파벳으로 문명을 바꾼 위인으로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회자하는데, F=Ma,를 발견한 뉴턴은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일정하게 흐른다.”고 이해했고, E=mC2 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독립된 개념으로 설명했다. 절대성으로 여기던 개념을, 시간 팽창이나 길이 수축처럼, 상대적 개념으로 확장시켰고, 통합체인 공간의 장안에서의, 변화 관계를 탐구했다.
우주 근원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도 공간적으로 우주 신비를 탐구하고 있고, 시간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실체의 근원을 탐구하는 양자물리학에서는 움직임 이전의 실존적 근원을 연구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야 하는데, 실존 이후의 양상에서 실존 이전의 근원을 추적할 아무 단서가 없다보니, 오히려 시간 요소를 배제하려고 하고 있다. 시간의 정확한 기능을 파악할 수 없어서인지, 최근 들어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공간에 지속하는 확률 값으로 시간의 기능을 파악하고 있다. 결국 우주나 물질을 다루는 과학에서는, 시간은 해결되지 않은 채, 장애물로 남아있다.
(2) 철학적 의미와 가치
철학에서의 시간은 의미와 가치로 이해된다. 시간 자체를 탐구된 적은 거의 없다. 시간을 내면세계에서 인식하는 형태라고 정의한 철학자도 있었지만,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결과적 현상이었다.
유한한 존재의 의미를 시간 속에서 구명하려 했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가 되는 마음 씀을 구성하는 구조적 특성"이라고 시간을 설명하지만, 그 또한 시간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배제했을 때의, 시간의 기능적 속성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시간의 기능적 가치성에 결론을 두고 있지만 본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란시아 책의 독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책을 좀 읽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이러하고 하느님은 사랑이니,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러한 삶에 의지를 바치려고 결심도 한다.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실천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늘 스스로 실망하고 결심만 되풀이하고는 있지만, 그 결심이 반복되고 의지도 자주 변하는 이유가, 바로 시간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우리가 계속 변화에 직면하는 현상이, 철학이나 심리학에서의 접근이다. 어떤 시간도 어떤 상황도 정지될 수 없다. 시간 속에서 만물이 변화하기 때문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도 없다. 변화의 근원이자 본질은 말씀(로고스)”이라 이해했던 현자도 있고 이런 변화의 진리를 거부하며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으며, 아킬레우스는 앞서있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역설한 연자도 있다. 철학에서도 시간이 흐르는 이유를 탐구해본 사람은 없었다.
예술에서 시간은 중요한 모티브이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영원에 대한 염원을 품고, 시간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여기면서 시간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고 기억과 사실과 환상을 연결하는 기능적 실체로서 시간을 실감 있게 다루기도 한다.
(3) 종교적 운명
종교에서의 시간은 영원불멸의 바탕이 된다. 종교에서는 영원을 실체로서 정의하면서, 시간은 일시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서, 시간을 초월하고 초월시키는 절대자, 하느님 또는 신의 신성과 손길에 관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고대 후기의 플로티누스와 어거스틴은 “시간을 성장과 변화와 같은 움직임의 차원이 아니라, 의미적 관점에서 영원과 관계가 있다”고 이해했다. 생명 존재의 근원적 현상으로 시간과 영원을 생각하면서, “영원이란 만물이 동시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한 분에게서 존재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어떤 종교는 시간을 하느님이 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다른 종교는 실체가 아닌 한낱 짧은 순간의 헛된 꿈이자 가설이라 여긴다. 기독교, 유대교, 회교 기타 여러 서구의 종교는 공간보다는 시간 초월이 핵심이고, 반면에 불교는 절대 공간인 공의 개념을 근간으로 시간의 변화를 성주괴겁으로 해석하고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유란시아 책에서의 시간과 영원에 대한 설명들은, 과학과 철학에서의 이해를 포옹하고, 특히 이들 원시적이고 투박한 종교적 이해와 정의에 근거를 두면서, 시간의 이야기를 계시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깨달았던 모든 깨달음의 정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계시이지만, 인류가 이룩한 깨달음의 바탕위에서 이해하고 확장되도록 배려하고 있다.
(4) 유란시아의 영원
유란시아 계시에서 시간의 정의는 한마디로 매우 다르다. 근원과 연관하여 영원을 소개한다. 영원을“시간이 없음”으로 정의하고, 한편 “시간의 절대”가 영원이라고 표현하면서, 하느님이 “본질적으로 영원하지만, 영원 안에서 체험으로 시간에 관계된다.”는 설명으로, 시간 속에 손을 뻗고 계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유란시아 물리적 행성에 시간의 절대가 존재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겪으시는 체험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며, 그 체험에 의해 우리들 개인의 세계는, 영원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개인의 체험이 신성과 만나고 신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만나고, 이때의 개인성이 생각조절자의 체험으로 이어진다면, 개인의 시간은 직접적으로 영원과 관계를 맺게 되는 구조를 계시하고 있다.
또한 사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고, 시간에 따라 실체의 조건이 갖추어지지만, 사물과 연관되는 “진리에는 시간이 없다. 너희가 진리를 많이 알면 알수록, 너희가 더욱 더 진리일수록, 너희가 과거에 대한 것을 더욱 많이 납득 할수록, 미래에 대해 더욱 많이 이해”하게 되어 시간의 단위는 새롭게 확정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 유란시아에서 영원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이해되는 시간이다.
3. 시간의 본질
진리와 관련하여 과학, 철학, 예술, 종교에서 추구해 온 시간의 의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기원과 의미에 아무 단서도 남기질 않았다.
유란시아 계시에 따르면,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카르타고에서 페르시아인 미트라교의 사제에게 시간과 영원에 관해, “시간이란 창조체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을 나타내는 하나의 이름이며, 사람이 성숙해짐에 따라서 사건이나 움직임을 이해하는 깊이가 깊어지고, 그 시야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그러한 실체라고 정의”하신 적이 있었지만, 이 가르침은 미트라 사제를 통하여 후대의 철학이나 기타 신학에 온전하게 전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주에 펼쳐진 시간은 필사자의 눈에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인식되지만, 의식이 깨어날수록 전체성을 가지는 참된 실체의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시간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의 원리임을 밝히셨다.” 또한 “완전한 실체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성장하면서 필사자는 일곱-차원의 우주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1) 시간의 활용
4번째 계시였던 예수님이 시간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계시하셨다면, 5번째 계시인 유란시아에서는 예수님이 남기신 시간에 대한 일곱 개의 위상을 자세하게 밝혀주면서 그 활용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
시간 단위에 대한 설명을 보면 파라다이스에는 시간이 없으며, 중앙우주인 파라다이스-하보나에서의 1일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1,000년보다 7분 3과 1/8초 짧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초우주, 지역우주, 별자리, 그리고 사타니아 체계의 독자적인 시간 단위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유란시아를 일단 벗어나면, 첫 번째 하늘 세계인 체계부터는 불멸의 세상이다, 따라서 하루가 우리의 3일에서 1시간, 4분 15초 짧다는 사타니아의 하루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들 우주 차원간의 시간 단위들이 단순한 숫자로만 이해될 뿐, 실감은 물론, 그 특별한 의미도 알 수 없다. 우리는 확정된 표준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시간 단위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각별한 의미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멸 차원에서의 시간과 불멸 차원의 시간 단위는 무언가 다를 것이 확실하다. “시간을 의식하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직접적으로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 한 시간이나 하루나 일 년이나 어떤 시간이든지 의식적으로 삶의 상황들을 평가해보는 시간의 단위가 길어지거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실체와 사실을 가늠해보고 판단하는 시간적 의미가 길어질수록 실제로 살아가는 시간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처럼 깨달음이나 영적 성숙에 따라서 각자 의식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 단위가 변한다면, 우리가 아는 시간의 의미로 불멸의 시간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인 “시간의 의미”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내 자신의 영적 확장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참다운 삶을 실천하기 위해 활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시대적 계시가 없어도 도덕군자로서의 완벽한 삶을 이룰 수 있다, 그 어떤 삶도 참된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시간의 의미가 짧은 순간으로 평가되고 정의되면, 그 참됨은 한시적 세계의 일시적인 참된 삶으로 끝난다. 우주에는 완전과 불완전에 관한 실존적 모습이 일곱 위상으로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한 위상에서 더 높은 위상으로 연결될 상대적인 완전함이 없다면, 우주의 상승은 불가능하다. 일시적 참된 삶도, 불멸의 위상과 연결되는 의미와 가치가 없다면, 불멸의 시간 단위에서는 무의미 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초월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실체들은 대부분 “불변”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영원한‘사랑’, 변치 않는‘우정’, 굳은‘충성’, 불굴의‘용기’, 불후의 ‘업적’, 이러한 실체들은 개인마다 다양하겠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와 가치에서는 같다. 다만 중심핵이 물질인지 아닌지에 따라 상대적 완전성은 다를 것이고, 한시적 초월인지 불멸과 이어지는 초월인지 가늠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랑이나 아름다움이, 한 때의 사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시간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살아있는 에너지가 들어있다면, 그것은 그 사건이 사라져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현재의 사건이나 의미에 그처럼 살아있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면, 그 사건이 비록 물질차원의 초라한 모습이라 해도, "영원한 말씀"에서 비롯되어 시간 속에서 태어난 참된 것이다. 사실 계시는 그러한 참된 것,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내려진 것이다.
시간의 절대가 영원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다시 말해, 영원 자체가 시간을 공간에 풀어내는 원천이나 근원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의 절대성 때문에, 공간 속에 투영된 그 그림자이다. 시간은 공간을 통하여 영원의 절대성을 생생한 실체로서 입증하는 현시이다.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은, 우주 안에 투영된 시간을 활용하여 영원한 말씀이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체험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2) 시간의 속성과 기능
시간과 연관되는 영원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원이란 말은“영원한 아들”에게 처음 사용된다. "영원의 과거에 우주 아버지의 첫 번째 생각이 있었고, 그 절대 생각, 곧 뜻은 즉시 절대 개념 곧 말씀이 있게 하였고 절대 말씀은 우주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는 절대 개인성이 되었다. 그래서 절대 말씀은 절대 개인성이다."
영원한 아들이 “말씀”이라면, “영원”은 아들, 곧 말씀을 상징하는 절대 개념이자 대표하는 본성이다. 그리고 개념에는 실체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영원”은 파라다이스의 절대 실체와 나란히 존재하는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영원은“말씀이자 개념”이고, 시간 또한 그렇게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원”이 시간의 절대가 되어 있다면, 그 그림자로 투영된 시간은 어떤 실체와 나란히 실존하는 “말씀”, 곧 공간 안에서 투영될 수 있는 개념의 근원이 된다. 영 가치와 영 에너지의 실체를 영 중력으로 장악하는 영원한 아들이, “시간-공간 안에서는 잠재적 체험으로부터 창발 하는 영 실체의 가치와 에너지의 절대자로 실존”하고 있다는 문장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근원적 의미를 잘 말해준다.
영 가치이자 영 에너지가, 시간에 투영되어 우주 안에서 체험으로 창발하고 있다면, 시간의 흐름이 있는 우주를 통과하는 모든 실체들은, 절대 뜻과 개념으로 설명되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목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무한한 생각과 영원한 목적은 시간을 관통하는 가장 높은 영적 이상”이며 , 우리가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그 안에 담고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가 될 것이다.
“공간을 통과하는 우주들의 행진 속에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 너희 필사자들의 모든 투쟁은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광대한 계획, 거대한 활동사업의 일부분이며, 어떤 한 시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삶의 기간에서 그것을 충분히 똑바로 알기가 불가능한 것은 떠맡고 있는 그 일의 광대함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들이 지휘감독하고 능히 다스리는 영원한 구체적 투사의 한 부분이다. 경이롭고도 우주적인 전체 기능구조는 위대한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생각과 영원목적의 박자로 이루어진 음악에 맞추어 공간에 두루 장엄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에는 영원 안에 계신 절대적 말씀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지역 우주 시간 안에서 절대적 말씀을 대표하는 창조자 하느님 아들의 영, 곧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져 있는 것은 시간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다.
4. 시간의 의미와 가치
우리는 각자의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자, 사람마다 시간의 의미와 가치는 다를 것이다. 어떤 분에게는 지금 이 순간은, 시간당 2천원이라는 주차비가 시간의 의미를 실감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의 가치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온다면, 틀림없이 시간 단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의 의미와 가치가 영원한 아들의 “말씀”과 관련되고, 우주아버지의 절대 “뜻”의 표현도 그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시간의 의미
시간이 공간 안에서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아버지의 뜻을 달성하려는 신성한 목표는 시간-공간이라는 하나의 통합체 안에서 전개되어야만 한다. 영적 실체들은, 일상의 사실과 의미와 가치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으로 실현되며, 그것은 여전히 시간을 담은 공간 안에 있다.
그래서 공간은 시간 속에서 우리를 성장하도록 허용하고 진화의 모험이 펼쳐지도록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공간 안에서 성취하는 진-미-선의 체험은 영적 성장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로 그 실체를 더욱 확대하고 완성하는 데에서는 마찬가지로 커다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는 말처럼 체험적 성취에서 시간의 단위를 확장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생존의 핵심이다.
아버지의 뜻이 말씀을 통하여 실현되었음을 실천적으로 체험할 때, 이렇게 달성한 불멸의 가치를, 하느님의 신성을 향한 영적 가치로 확장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시간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것은 시간-공간의 초월의 본성으로 우주 아버지가 각자 부여한 개인성으로서의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잠재적 개인성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어떤 실질적 정체로서 스스로를 자각해가는 것, 곧 진화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시적인 필사자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진정한 가치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좌절하고 있던 젊은이에게 “태양은 매일 아침 떠올라 땅에서 가장 힘 있고 번영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똑같이, 너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느냐? 보아라,─너는 튼튼한 육체와 강인한 근육을 갖고 있다.─너의 육체적 자질은 평균을 넘는다. 물론 네가 이런 산기슭에 앉아서 실제이거나 공상이거나 간에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육체는 단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연법칙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아무 차별 없이 공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세상을 밝히는 태양처럼, 사람을 살리는 진리는 시간 속에서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진리처럼 모든 사람에게 퍼부어지고 있다는 것”그 힘과 안내로 시간의 기능 안에서 진-미-선을 찾아내어 행복, 용기, 기쁨, 보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 하느님의 사랑이 멀리 있어서 고통과 악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우쳐주셨다.
체험적으로 달성한 신성한 실체인 진리를 즐기기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헛된 일이다. 신성한 사랑의 힘으로 발견된 참됨-아름다움-선함이 풍성한 옥토 안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삭막한 땅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스스로열매를 거둘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큰 사랑의 에너지도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다가 만약 불멸의 세계에서 부활의 방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떠날 때의 상태 그대로 물질 몸이 모론시아로 몸으로 재질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몸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필사자의 몸체는 내부적으로는 추할지라도 외부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나, “모론시아 몸체는 내적 본질에 따라 직접적으로 변화되어 외부로 반영한다. 숨길 수가 없다. 영 몸체에서는 완벽하게 일치”된다.
우리 내면의 상태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숨김없이 외부로 투사되는 그에 버금가는 육체적 몸을 지니고 있어야, 그러한 혼이 있어야만 모론시아 몸체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삶의 체험과 그 열매는 성취의 높이와 분량이 아니라, 의지의 헌신이다.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신성한 뜻이 다가오는 매 시간마다, 사물과 존재에 잠재되어 있는 참되고 아름답고 선함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이 아들신분을 받아들이는 인간-개인성의 특권이다.
진리를 찾는 마음에서 계시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자아-영광을 위해 계시를 사용하며, 원하는 부분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도, 자기만족을 위한 은혜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소망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진실한 신앙으로, 온 가슴을 다하여 하느님을 찾아 하늘의 왕국의 구원과 안전을 성취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불멸의 삶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진리도 사랑이고, 5번째 계시의 진리도 사랑이다. 하느님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에 의존하려는 사람에게, 사랑의 종교를 권하는 것이 치명적일 수 있듯이, 참된 진리도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위로를 부추기며 동조하는 것은 진리의 왜곡이며 악이다. 그에 반하여 인내와 겸손 그리고 기다림은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루시퍼는 시간의 기능을 무시하고 우주 상승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격동 속에서도, 단 한명도 휩쓸리지 않았던 예루셈 시민은, 1억 8 천만 명에 이르는 필사자 생존자들이었다. 사타니아 행성 전체의 필사자에 비하면 극히 적지만, 시간의 필사자가 불멸의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의미가 있고, 영광스러운 승리인지 명료하게 밝혀준다.
사람은 진실을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불편한 진실을 대하기보다는 편안한 거짓을 바라보는 것이. 게으른 동물적 본성이나 무기력한 마음에 훨씬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나태한 본성에서의 탈출하는 것이,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굳어질 것이다. 수 있다. 강력한 의지의 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땀 흘리지 않고 거두는 열매는 개인에게는 아무 거치가 없다.
(2) 과거-현재- 미래
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을 겪은 과거의 시간으로 세상을 원망한다. 그 아픔이 부당할 때는, 고통을 잊지 못하여 한으로 간직하면서, 때로는 원한으로 때로는 복수로 때로는 자기연민의 감정으로 분출한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의 실패와 좌절은, 시간에 잠재된 영원으로의 초대로 재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은 파괴의 에너지로 바뀌어 모든 성취를 무너트릴 수 있다.
불멸의 세계를 알았던 우리 선조들은 한을 예술로서 승화시켰었다. 세상에서의 패배가 불멸의 세계에서 다시 꽃 피울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 오히려 패배와 좌절을 불멸의 세계에서 도전해야 할 의지의 헌신으로 바꾸었다. 원한이나 분노와 같은 파괴의 에너지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한을 보복의 동기로 삼았을 뿐이다.
우리는 변화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패를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너희가 실패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삶은 현실적 실존의 짐이 될 것이다. 좌절에는 고귀한 혼이 반드시 습득하는 어떤 예술이 들어있다; 너희는 당당하게 지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 결코 주저하지 말라. 속이는 미소와 낙천적인 태도로 애써 실패를 감추려 하지 말라. 성공을 공언하는 것은 항상 듣기 좋지만, 마지막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한 기법은 직접적으로 비현실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이끌고 또한 궁극적 망상의 필연적 파멸로 이끌어 간다.”
심각한 실패를 대수롭지 않은 듯 잊으려는 것도 옳지 않다. “허식은 지혜롭게 보이려는 무지한 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요, 부자처럼 보이려는 메마른 혼의 시도이다.” “너희는 영적인 진리를 느낌으로 느끼듯이 체험하기 전에는 그것을 감지할 수 없으며, 많은 진리들은 역경을 당해보지 않고는 실제로 느낄 수 없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3) 현재의 가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매 시간은 다음과 같다.
“동물은 시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단지 순차적이고 단편적인 현상에만 반응할 뿐이다. 심지어는 사람도, 부분적이고 제한된 시야 때문에, 시간이 단순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이 상승함에 따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시간의 역동성은 연관되어지는 폭이 넓어지게 되고, 그러한 시야는 현실적 사건을 확장된 시간의 전체성 안에서, 진정한 모습이 더욱 잘 식별되도록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건들의 연속체로 나타난 것이, 그 다음에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완전하게 이루어진 어떤 질서 있는 순환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일렬로 배열되어 참된 에너지를 파악할 수 없었던 일상의 사실들에서, 점점 더 전체를 휘돌아 감싸는 순환적이고도 동시적인 실체로사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삶의 의미, 현재 시간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다. 전체적으로 자기 시간,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매 순간으로 다가오는 현재를 가치를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평범한 각성만으로도 시간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상승하는 삶의 각 단위는 바로 앞에 실존하는 무대를 위한, 진실 그대로의 훈련 학교이며, 이것은 사람의 진보적 파라다이스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참말이다;”
계시자들은 필사자의 삶을, 많은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로 묘사한다. “필사자 유아기에 해당하는 이 구체인, 유란시아에서의 너희의 짧은 머무름은 오직 하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며, 우주들을 가로지르고 그리고 영원한 시대들을 통해서 뻗어나가는 긴 사슬에서의 바로 그 맨 첫 번째 고리이다. 이 첫 번째 일생에서 너희가 배우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생을 사는 삶의 체험이다. 이 세계의 일도 역시, 그것이 비록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이긴 하지만, 너희가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의로운 삶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심오한 만족감─성취에서의 의식─이 있고 이것은 상상 가능한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초월한다.)”
시간 속에서 체험을 통하여 간직할 수 있었던, 긴 시간 단위의 소망들은, 불별의 시간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 “시간 속에서 너희가 시작한 것은, 만약 그것이 완성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너희는 반드시 영원 속에서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상승하는 삶의 각 단위는 바로 앞에 실존하는 무대를 위한 진실 그대로의 훈련 학교이며, 이것은 사람의 진보적 파라다이스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참말이다;
5. 시간의 운명
최근 들어 여러 미래 학자들은 문명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역사에게 교훈을 충분히 얻었다 해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앞으로의 변천은 이제까지의 모든 인류의 지혜를 동원해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다양하다.
“기계적 발명과 지식의 확산이 문명을 변경시키고 있다. 만약 문화적 재앙을 피하고 싶다면, 그에 알맞은 경제적인 조절과 사회적 변화들은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이러한 새롭게 도래하는 사회적 새 질서는 천 년이 지나도 제대로 만족스럽게 정착하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변화, 조절 그리고 재-조절의 과정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재(再)-일치를 항상 시간 속에서 이루어야만 한다. 이러한 시간의 진화를 통하여, 인류는 새롭고도 계시되지 않은, 행성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유란시아 계시와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열정으로 살아가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의 지혜로 이루어 갈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의 성취와는 상관없이 우주의 진보에 맞추어 행진한다.
(1) 진화의 필연성
“유란시아 사회는 과거 시대에서와 같이 안정되기를 결코 바랄 수가 없다. 사회라는 증기선이 증기를 내뿜으면서 기존의 전통으로 보호되어 있던 항구를 떠났으며 이제 진화하는 운명의 높은 바다에서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혼(魂)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었으니, 이제 도덕성으로 이루어진 해도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종교적 안내로 이루어진 나침반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하나의 사회적 영향력으로서의 종교의 지상 임무는, 문명이 어떤 위상에서 다른 위상으로, 문화가 어떤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이들 위험한 과도기에 인류의 이상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각성과 생존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문명적 우주적 그리고 빛과 생명의 시대로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계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려한다. 다만 우주를 관통하며 영원의 강으로 흐르는 시간에는 엄청난 영 실체와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과 우주 본질에 대한 의식을 가짐으로서, 개인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삶의 현실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진화의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영적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자아-영광에 목말라 하고 있다면,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열망이 가득할 것이며, 자신을 높일 화제와 이야기에 기쁨과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시간 안에 잠재된 영적 실체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는 진화적인 노력은, 유한에서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는 확실한 길이다.
상승자들의 시간의 목표는 파라다이스에서 아버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모험 여행이다. 슬픔을 상쇄시키고 고통의 시간을 잊게 만들고, 상실과 패배를 왜곡시키는, 잘못된 환상으로 이끄는 달콤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찾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키고 그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 탄생되어야하고, 영원 안에서 반드시 이루는 진실을 믿을 수 있어야한다.
유란시아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좀 책을 읽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이러하고 하느님은 사랑이니,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러한 삶에 의지를 바치려고 결심한다. 지속 시간이 너무나 짧아서 실천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늘 스스로 실망하고 결심만 되풀이하고는 있지만, 결심은 반복되고 의지가 이리저리 변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3) 불완전의 향연
공간이 신의 전능을 위하여 시작되었다면 시간은 신의 전지를 위하여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한 신성이 실체로서 드러나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고, 시간 안에서 호흡하고 있는 한 전지가 진-미-선의 생생한 실체로서 끝없이 표현되고 발현되는 현장에 동참하면서, 그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함께 깨달으며 성장하고 있어야만 한다. 개인성인 우리 각자의 "개인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닯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닳지 않은 그러한 것이 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그 어디에도 선한 악이 출현될 수 없고, 그 어떤 순간도 허위에 진실이 담길 수가 없다. 진리로 안내하는 시간의 속성에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야만 할 것이다.
시간은, 마치 영화의 정지된 장면처럼 조각난 단편의 연속으로 우리에게 다가 울 수도 있다. 연이어지는 긴긴 시간들도, 그 단편에서 본다면 악과 거짓이 정지된 장면으로는 중간 중간 끼어들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한 에피소드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의 이야기를 그렇게 꾸민다면 시간 속에서 그 어떤 불멸의 흔적도 동기도 찾지 못한 것이며, 유한의 시간을 끝없이 전개해도, 불멸이라는 시간은 결코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격동하는 변화의 우주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선조들이, 선배들이 그리고 스승들이 닦아놓은 가르침과 길을 따라서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갈 수도 있고, 그 시간 통로 끝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나설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상대적 불완전을 파괴하는 데,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다. 불의를 쳐부수고 승리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듯이, 악을 섬멸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 결코 선이 아니다. 의로운 일을 찾아내어 행하고, 악의 방해와 공격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일이다.
시간 자체에 담겨있는, 불완전을 소멸시키는 강력한 에너지는, 잠재되어 있던 참되고-아름답고-선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의 힘으로 새로운 완전성을 찾아나서야 한다. "내가 완전하듯 너희도 완전 하라"는 신성한 명령은 시간 속에 담아서 우리에게 보내준 우주 아버지의 위대하고도 사랑 넘치는 초대이다.
영원에서 나오고 그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시간은, 우리가 완전을 향하는 속성과 그 모험의 여정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불멸의 시간을 거쳐 틀림없이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시간의 속성과 모험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 속에 담긴 모든 잠재성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시간 안에 담겨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신성한 에너지,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변화되는 생명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정복하는 위대한 깨우침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 단편이 내주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신성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신성은 시간-공간의 우리에게는 매 순간 일상에서 찾아낼 수 있는 참됨과 아름다움과 선함을 발견하는 근거이며, 우리의 의지로 진-미-선이 체험되는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선의 모든 것을 포옹하는 것이다.
(3) 개인의 생존
언제까지나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필사자에게 내린 하느님의 명령은 "내가 완전하듯 너희도 완전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명령은 우주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으로 비로소 개시된 것이며, 이 사랑의 뜻에 따라 받아들여 완전을 위한 모험에 나서는 것이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완전의 달성은 시간 속에서의 진-미-선의 성취이며 이들 각각은 궁극에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되고 사랑 안에서 시작된다.
“히브리인들은 종교를 선(善)에 기초하였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 기초하였지만 두 종교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였다. 예수는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였고,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의 모든 것을-포옹하는 것이다.”
"너희는 단순한 의지에서의 행동으로는 너희 동료들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너희 이웃의 동기와 정서를 속속들이 납득함으로써만 태어난다. 너희가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매일 인간 존재 또 한 사람을 사랑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너희가 매일 또는 매주 너희 동료들 중에 한 사람씩을 더 납득하게 된다면, 그리고 만일 이것이 너희 능력의 한계를 다한 것이라면,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참되게 영성화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진정한 그리고 사심-없는 사랑만이 참으로 전염을 일으켜 상대방을 감응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될 것이다. 그 힘은 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의 실현이 되기까지 그처럼 확장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이 진리의 실천임을 알고 실천을 결심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하는 마음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란시아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모든 가장 높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인 한시적인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진-미-선의 실현에 그 바탕을 두기도 한다.
예수님은, 삶의 투쟁에서의 목적, 곧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 하라.”를 강조하시고 그 실천이 사랑이라고 가르쳤지만, 12사도들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따라서, 그대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한 적은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성취되었고 달성된 상태로 사도들 안에 실체로서 생생하게 실현되어 있었고, 그 사랑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형제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라고 권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랑이 시작되는 네 가지 반응들로 “애통해 하는 자, 긍휼히 여길 자, 평화를 만드는 자, 핍박을 받는 자”를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면서 이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이들을 마음을 열어 따듯하게 받아주면서 사랑을 시작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그들에게 닥칠 미래의 행복이 실체임을 확신하면서, 그것이 하나씩 드러나는 기쁨을 같이 사랑 안에서 공유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함에 자책하며 시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서 이 삶을 시작하며 영원한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주적 진리를 깨우칠수록, 우리의 처지에 상심하고 낙심할 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낙담에 빠지지 말라. 인간의 본성이 악을 향하는 경향도 있겠지만, 그것이 선천적으로 죄가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뼈아픈 어떤 과거의 체험들이 계속 자신을 괴롭힌다 고해서, 그리고 너희의 삶이 계속 실패만 거듭된다고 해서 낙담하지 말라. 시간 속에서 너희가 잊혀지지 않아서 힘들었던, 모든 고통과 실패와 오류들은, 영원 속에서는 반드시 잊혀질 것이다. 너희가 운명을 내다보는 관점이 길게 하여, 너희의 혼에 지워 진 짐을 가볍게 해라. 그리고 마음에서 스스로 느끼는 불완전이나 육체적 한계로 성취하지 못한 소망때문에, 너희의 혼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일시적인 불운한 인간 삶의 에피소드를 기준 삼아, 혼을 심판하거나 운명을 평가하지 말라. 너희의 영적 운명은 오로지 너의 영적 소망과 목적에 따라서 갖추어 지는 것이다.”
“육체적인 삶 속에서는 감각이 물체들의 실존들을 밝혀주며; 마음은 의미들에 대한 실체를 발견하지만; 영적인 체험은 개별존재들에게 일생에 대한 참된 가치들을 계시해 준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높은 차원들은 하느님의 최극의 사랑 속에서 그리고 사람의 사심-없는 사랑 속에서 성취된다. 만약에 너희가 너희 연관-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가치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높은 가치를 두셨기 때문에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너희 관계적-연합들 속에서 가치들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를 짜증나게 한다면, 화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너는 그의 관점, 그러한 불유쾌한 행위를 일으키게 한 그에게 있는 이유들을 식별하기 위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노력해야만 한다. 만일 너희가 일단 너희 이웃을 납득하게 되면, 너희는 관대해 질 것이며, 이 관대함이 우정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사랑으로 익어갈 것이다.”
천사가 우리를 위해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가 생존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며, 얼마나 성실하게 얼마나 진지하게 매일의 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의 어려움의 대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가지 본성들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다툼 때문 이었다” 로 시작되는 운명 수호천사의 호소문에서는 필사자가 시간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밝혀주고 있다. “열망에서 나오는 추진력은 동물적 게으름으로 반대되고, 우수한 민족적 이상이 혼재되어 있는 열등한 종족의 본능으로 인하여 가로 막히고; 위대한 목적은 전통을 지키려는 세력의 적대감에 제지되고, 상승하는 진보의 계획이 물질적 본성의 갈망으로 바뀌고, 영적 지능의 빛은 생물학적 지능의 화학-에너지 명령으로 취소되고; 천사들의 자극은 동물적 감정으로 저지되고, 개별존재의 체험이 종족의 고착화된 성향으로 저지되고; 선한 목표가 악한 대세에 밀려 가려지고, 천재의 비상은 발목을 잡아당기는 평범함 때문에 주저앉아야 했고, 예술의 아름다음은 악의 활약으로 더러워지고; 신앙의 샘은 두려움의 독으로 오염되고; 기쁨의 샘물은 슬픔의 물로 쓰디쓰게 되고; 예상의 기쁨은 현실의 쓰라림으로 환멸로 바뀌고; 삶의 즐거움이 죽음의 슬픔으로 늘 위협받았다. 그럼에도 생각 조절자의 현존하는 도움과 추진력으로 혼은 행복과 성공의 합당한 등급을 성취하였고, 부활의 심판실로 상승해 왔다.”
운명을 향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천사의 위로의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영원과 상관되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각별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현재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사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현재의 한계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숙함에서의 시간 단위는 현재와 현재가 아닌 것─과거-미래─의 참된 관계를 현재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러한 방법으로 의미-가치를 현재의 순간에 집중시킨다. 성숙함에서의 시간 단위는 과거-현재-미래의 조화-협동하는 관계가 너무나 잘 드러내도록 비례되어서 그로서 자아가 생긴 일들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시작하고, 넓혀진 지평들의 파노라마의 전망으로부터 시간의 전경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아마도 시작됨이 없고, 끝남이 없는 영원의 연속체, 시간이라고 불리는 단편들을 비로소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혼동 속에서 전통과 관습에 따라 편안함을 추구하려 하지만, 계시는 우리에게 부디 영적 투쟁심을 일으켜 신성한 영의 깨우쳐주는 대로 선과 악 사이를 구분하고 선택하여, 삶에서 생존을 성취하고, 불멸의 세계로 오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의 형제여, 선(善)과 악(惡)이란 말은, 관찰 가능한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상대적 차원을 상징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만일 네가 윤리적으로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면, 현재의 사회적 풍습들을 선에 대한 너의 기준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다면, 너는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실천 관행과 전통을 너의 선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시간에서 생존하여 영원 안에서 창발 하는 혼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사람의 가슴 안에 거하도록 보내준 신성한 영에 의해 세운 영적 기준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에 따라 그들이 결정 되는대로 그에 따라, 선과 악 사이에서 활력을 주는 그리고 개인적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결론
진리를 통하여 그리고 계시를 통하여 창조자 하느님 예수님과 하늘의 신성한 존재들의 간곡한 호소는 모론시아에서의 생존이다. 생존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우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결과로써 이루어지며, 이를 위하여 영 존재들은 쉬지도 졸지도 않고 우리를 돕고 있다. 비록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으로 펼치신 세월의 강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흐름 너머에 있는 시간의 본질과 근원과 의미를 파악하고 한시적인 시간 안에 숨겨진 새로운 실체를 끊임없이 발견하여 안쪽으로 위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를 불멸의 세상과 이어지는 곳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초대장이다.
"유란시아 이는 너희가 사는 세계의 이름“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계시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진리이다. 이 세상 너머 모론시아에는 불멸의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곳에는 근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우리는 불멸의 시간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불멸의 시간이 기다려지는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용할 능력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한시적으로 주어진 지금의 시간 안에서, 우리는 소망을 만들어야 하며, 사랑 넘치는 뜻에 따라 진-미-선의 실체들을 발견하는 그 고귀한 체험을 통하여, 불멸을 시간을 마주할 힘을 길러야한다. 나아가 불멸의 시간을 넘어 파라다이스까지 펼쳐질, 영원하고 황홀한 도전과 탐험에 다함께 동참하는 데에 삶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 첫 번째 일생에서 너희가 배우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생을 사는 삶의 체험이다. 이 세계의 일도 역시, 그것이 비록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이긴 하지만, 너희가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은 성실함, 더욱 성실함 그리고 더욱 더 성실함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열쇠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결심하고, 더욱 결심하고, 그리고 더욱 더 결심함으로서─영 지위에서의 향상에─이 열쇠를 사용한다. 가장 높은 도덕적 선택은 가장 높은 가능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며, 이것이 항상─그 어떤 모든 구체안에서, 그들 모두 안에서─하느님의 뜻을 행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 안에는, 영원에서 투영된 새로운 참됨-아름다움-선함이 잠재되어 있다. 잠재는 초시간 안에서, 사건의 지평선 안에서 우리의 체험으로 드러나기까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며 흐르는 시간의 안에 있을 것이다. 무섭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승리나 패배, 성공이나 좌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 쪽 위에서 쏟아져 부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마주하며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란시아는 우주 창조자와 직계 가족 관계와 같은 영광이 부여된 행성이다. 유란시아 행성의 영예가 빛나도록, 모든 우주를 두루 지나, 모든 시간을 성취하면서,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까지, 다함께 상승에 상승을 더하여 나아가야한다. 찰나일지 모를 2017년 어느 한 때의 지금의 시간이, 사랑과 진실로 하나가 되어 불멸의 불꽃을 만들었던 시간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회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ASCENDING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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