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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지하철로 점거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20%">지난 2월 6일, 오이도역 장애인수직형리프트 추락 참사에 대한 항의와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해 서울역 지하철로를 30분간 점거하였다.
83년 가을 어느 날... 무더운 8월의 태양 아래서 행글라이더 타다가 추락하여 척수를 다친 후 몇 개월이 지난 날... 사고 후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휠체어를 몸에 실고 병원 뒤 정원에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휠체어를 타고 평생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조그마한 턱에도 혼자서 어쩔 수 없어 한없는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버린 그 시절의 기억들... 그러한 절망이 20대의 5년이란 푸른 세월을 집에만 꼼짝없이 묶어버렸다.
그 세월 동안 1년에 한두번 정도 바깥세상을 구경하면서 지냈다. 밖을 구경하고 싶어도 집 앞에 있는 낭떠러지 같은 계단 앞에서 자신을 연민하여 어쩔 수 없었던 그 당시의 현실은 개인적인 숙명으로 생각했다.
18년이 지난 지금... 그 숙명같은 절망이 절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다.
"병신들...
동정을 받으려면 좀더 불쌍하게 보여야지, 이렇게 떼거지로 나와서 시민들을 볼모로 민폐를 끼치면 되나! 동정해주고 싶어도 못하겠다..."
"아무리 장애인이라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놈의 데모질이냐... 이 나라에는 법도 없나..."
"장애인이 사람 잡네. 이거... 왜들 거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겨, 자꾸 민폐를 끼치는겨, 이거. 장애인이 벼슬인가?"
귓가에 아직도 맴도는 언어들은 지난 1월 22일 오이도역에서 수직형장애인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고에 대하여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해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한 정거장씩 탔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2시간 가까이 연착시위를 벌인 휠체어를 탄 27명의 장애인과 그들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퍼부어진 일부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차라리 슬픔으로 다가왔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 서로에 대한 차이가 장애인의 차별로 구조화된 현실에서 느끼는 서글픈 사회의 초상화를 보는 연민 같은 것이었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 특히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엄연한 현실이 규명한 불법이니까...
일부 시민들의 손가락질과 지하철 연착투쟁이라는 불법 행위(?)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가해 온 야만적인 차별에 대한 체험적인 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손가락질과 욕설이 그들이 하루 지하철에서 몇 시간 지체된 불편에 대한 표현이었다면, 장애인에게 지하철 연착투쟁은 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하는 감옥같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표현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집안이나, 수용시설에 갇혀 한 달에 한번도 외출하기 힘든 현실에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겠는가. "님을 봐야 뽕을따지" 밖을 자유롭고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지 친구도 사귀고, 교육도 받고,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 장애인의 37%가 영화도 한번 못보았다 한다. 장애인의 60%가 초등학교 교육을 겨우 받았다.
실업률은 살인적인 수치이다. 우리나라 공화국은 장애인에게 수치스러운 통계치를 자랑하는 그들만의 공화국인 것이다.
일부 시민들의 반응은 서글픈 사회의 초상화였다면, 책임있는 정부당국의 태도는 절벽같은 절망 그 자체였다.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 베풀어주는 시혜나 동정으로부터의 출발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의권리로부터이다.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평등한 인권'의 실현과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과 사회자원의 분배와 집행의 구체적 책임은 바로 정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중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합리화한다. '장애인들의 마음은 다 이해한다. 우리 집안에도 장애인이 있다니까...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노력하고 있다. 한꺼번에 변하는가. 점진적으로 해야지!'
정부당국자들에게서 일관적으로 들려오는 주된 설교이다. 예전보다 수치로 높아진 장애인복지의 현실을 무기로 언제나 전시적이고 무책임한 그들의 행태들을 미화시켜 나간다. 또한 동정하듯 장애인문제를 마치 개인적인 자선으로 변질시켜버리고, 항상 떡고물의 수준에 머무는 예산으로 마치 큰 은혜를 베푼 냥 행세하는 그들 앞에서 암담한 절망을 느낀다.
"어떠한 얼굴색이든, 어떠한 언어로든 자기 자신에게 '이제 그만! Ya Basta!'"
요즘 신문에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평화대행진에 대한 기사가 사진가 함께 대서특필되고 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그들은 누구인가.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RI)의 독재 정권과 미국의 경제적 착취와 사회·문화적 억압에 저항하여 소수의 원주민 농민들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이름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강대국인 미국과, 멕시코 정부를 향하여...
그들은 미국과 정부군에 쫓기고 쫓겨 치아파스의 정글로 몰렸으며, 정글 속에서 이들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소수자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원주민, 농민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억압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하면서 국제적 反신자유주의, 反세계화 투쟁의 '영웅'이 되었다.
거대한 너무나 거대해서 다른 방향을 전혀 사고되지 않고, 그 흐름에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폐기 처분될 것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망령 앞에서 던져진 다윗의 돌맹이같은 그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세계를 향해 던진 메시지, '이제 그만! Ya Basta!'
거대하게 구조화된 차별과 모든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 '이제 그만!' 이제 자기 자신과 사회와 정부를 향하여...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편견,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된 거대한 차별을 향해, '이제 그만!' 그 절망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한 지하철 연착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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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9일,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해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한 정거장씩 타고내려면서 연착투쟁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