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신부님 강론
2024년 4월 28일 부활 제5주일
소하동성당 오전 9시 미사
찬미예수님!
요즘 코로나도 거의 끝났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성당 같이 가자고 얘기하고 계십니까?
선교하시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선교하십니까? 선교하십니까?
제가 신학생 때 안성 본당의 강정근 신부님, 철산성당에도 계셨던 분입니다. 안성에 계실 때 선교 운동을 하셨는데 200명이나 입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10명 입교하면 많이 왔다 말하며, 한 해에 세례 한 20명 주기도 버거운 분위기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세상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어떤 장면에서 나의 신앙으로 이 사건을 하느님의 뜻 아래에서 어떻게 살펴볼 것인지를 우리는 지금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욕만 하고 있고, 정치판을 봐도 욕하고, 그냥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만 빠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는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이야기를 할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실 거야.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믿으시겠지.’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 돼.’라며 평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면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 나무에 같이 붙어 있는 열매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 열매들은 다시 땅에 떨어져 비가 내리고 시간을 보내면 또다시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또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있어야 되는데 언젠가부터 신앙이 우리한테 탁 닫히고 말았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것을 바라봐야 될지 고민스러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포도나무의 뿌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며 믿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 믿음에 대해 신앙에 대해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잘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뿌리에 두고 나무가 자라면 그 나무는 결국 우리의 교리 지식이 됩니다. 교리적인 내용이나 신학론에 대해서 엄청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와서 ‘하느님은 누구야?’라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를 해주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느냐 이게 명확해야 합니다.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 왜 믿어?’ 이 말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야?’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 성모님, 마리아교 아니야?’라고 했을 때 우리는 성모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성모님은 누구십니까?’라고 했을 때 우리는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우리가 이 신앙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십니다. 그럼 성령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지금 답을 좀 생각해 보고 계십니까?
그 답은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앞부분은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전능하시고 하나인 분이시고 하늘에 계십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연을 보아도 창조주의 신비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아도 창조주의 어떤 신비로운 기적 같은 일들을 우리는 마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창조주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동정 마리아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맞나요? (신자: 네 믿습니다. )
그러면 이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은 고난을 왜 받았나?, 그분은 무슨 죄를 지었나?’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면, 내가 살면서 보여주는 이 많은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들이 얼마나 많았나 싶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시겠구나,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벌을 받으셨구나, 이런 고백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걸 믿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교리 아주 기초적인 교리 안에서 우리의 믿음으로 확실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 대화할 때 어떤 기회가 되면 창조주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우리는 고백 해야 되고 예수님 구원의 신비를 우리는 또 고백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그런 걸 그렇게 믿고 이렇게 사냐?’라고 하면 우리는 그때 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는 살아갈 수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지금 그 성령은 어디에서 활동하고 계십니까?
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이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즉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삶에 대해서 하느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있으니까 창조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믿고,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해!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도록 기도하면 돼. 하느님께서 아실 거야. 도와주실 거야 이끌어주실 거야.' 이런 이야기 건네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짜 해주실까? 하느님 어떡하지? 괜히 말했는데 안 해 주면 내가 욕 먹는 거 아니야?’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들한테 안수를 줄 때 ‘이 안수를.... 진짜 무서운데 정말 될까?’
이런 마음으로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창조주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내실 겁니다. 우리를 통해서 필요한 걸 만들어 가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방법은 우리의 기도와 희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것들은 내 원의가 담기고 내 청원이 함께하여 내가 바라는 바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을 줄여서 말한다면 ‘기도하면 하느님이 해주실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내 가족들, 이웃들, 친구들, 형제들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이 하실 겁니다. 조금 기다리면 하느님이 이끄실 것입니다. 괜찮아요! 주님께서 용서하셨습니다.‘ 이런 말들이 우리의 고백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하느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로 인해서 많은 부를 누리고 여러 가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하느님을 아는 지식,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소하동 본당 교우분들은 내 입으로 하느님을 고백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라고, 이 삶을 지금 이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정리 : 차언명 바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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