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큰인물 9
1) 오늘 어느 분의 이야기가 마련되었는지요?
광산김씨 예안파의 운암 김연선생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암 김연선생의 고향은 안동 오천군자리입니다.
2) 도산서원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한옥이 많은 마을이 안동 군자마을이죠? 군자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어떤 분들이 계십니까?
먼저 운암 김연선생이 계십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서인 수운잡방을 만드신 탁청정 김유선생이 계십니다. 탁청정선생은 운암선생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두 분의 자제들이 모두 퇴계선생의 제자이며 외손까지 합해 칠군자를 배출하였다합니다.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산남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월당 김부륜, 일휴당 금응협, 면진재 금응훈입니다. 임진왜란과 독립운동 등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현재에도 각계각층에서 이 마을 출신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을에 가시면 많은 고택들을 보실 수 있는데 한 채 한 채가 모두 이분들과 관련된 건물입니다. 건물이름이 이분들의 호와 같습니다. 또한 이분들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마을 입구의 숭원각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찾아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그럼 운암 김연 선생은 어떤 분이신가요?
운암선생은 1487년에 태어나서 154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보백당 김계행선생(1431~1517)하고 농암 이현보선생(1467~1555)보다는 후배이고 퇴계선생(1501~1570)보다는 선배이죠. 선생은 어린 시절 현감인 김만균이라는 분으로부터 “이 아이는 워낙 영특하니 반드시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고 1510년 에는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19년 에는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이 때 시험을 주관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선생에게 장원을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대책문을 상등급에 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때 나이 38에 관직에 나아가 평생을 관직에 계시다가 1544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후 그해 가을 종기를 심하게 앓다 향년 58세의 나이로 관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4) 선생이 관직에 계실 때 대표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허항(許沆) ·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유명한 김안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김안로는 1524년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그때쯤해서 김안로의 아들과 효혜공주가 결혼을 시킵니다. 그러자 무서운 것이 없어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하고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운암선생은 일찍이 김안로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는데요, 언관이 된 후에는 그를 내쫓으라고 끝임 없이 노력하여 김안로는 결국 유배를 가게 되죠. 이렇게 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이조정랑으로 운암선생을 추천하였답니다. 그러나 운암선생은 외직으로 나가 부모 모시며 생활하기를 원해 지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선생과 함께 김안로를 몰아낸 영의정 남곤, 대사헌 이항이 실각되자 김안로의 일당인 채무택(蔡無擇)하고 심언광(沈彦光)이 김안로를 다시 기용하자는 여론을 일으켰던거죠. 운암선생은 다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과 같이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안로는 다시 기용되었고 좌의정에까지 올라 반대파를 가리지 않고 축출하고 살해하는 무서운 공포정치를 펴게됩니다. 운암선생은 결국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쫓겨나죠.
그리고 곧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폐위까지 계획합니다. 이런 사실을 안 중종임금이 비밀리에 윤안임(尹安任)하고 대사헌 양연(梁淵)에게 명을 내려서 김안로를 잡아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를 보내고 얼마 후에 죽입니다. 이 때 중종임금은 운암선생에게 “나는 그대가 힘 있는 간신의 비위를 거슬러 먼 고을로 쫓겨난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구나.”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운암선생은 명성을 얻고 의정부와 홍문관에서 서로 추천하였으나 김안로를 몰아낸 정승 윤안인(尹安仁)이 운암선생에게 김안로의 잔당을 다 모두 제거하자고 제의를 하죠. 하지만 운암선생은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고 따르질 않았던거죠. 때문에 오랫동안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있었고 다른 관직에 임명되지 못합니다.
6)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구한 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지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근대에 들어와서 최초로 삼국유사를 출판 한 것이 일본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운암선생이 활동하시던 중종 때는 연산군의 폭정 후라서 그런지 한동안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조선의 대쪽 같은 선비들은 삼국유사의 내용이 터무니없다하여 잡서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에서 생각하기 힘든 일이 발생한거죠. 바로 1512년 삼국유사 경주본 출판이 그것입니다. 이책은 조선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점점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데 임란때 왜군의 손에 완본 삼국유사가 넘어가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는 사랑받지 못한 삼국유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이 읽을 정도로 귀중하게 여겨지고 특별히 취급되어 보관됩니다. 그리고 근대 일본은 역사교과서 제작에서 삼국유사가 우선적으로 다시 출판하게 됩니다. 그만큼 삼국유사가 가치있다는 의미겠죠. 1904년 도쿄(東京)대에서 출판을 하고 1925년에는 교토(京都)대에서 출판을 합니다. 도쿄(東京)대본은 앞에서 이야기한 임란 때 넘어간 것이지만 교토(京都)대본은 바로 1544년 운암 김연선생이 경주에서 구한 삼국유사입니다. 결국 이 책도 여러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넘어가 삼국유사 교토(京都)대본이 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최남선선생이 삼국유사를 발견하고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 귀국 후 1927년에 삼국유사를 우리나라에서 다시 출판하여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첫댓글 옛부터 군자리가 이썬네
책을 수껑 발라농 것으로 바께몬 무식이 비증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