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작은 것이 지닌 힘은?
한동안 시끄러웠던 선거(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 결과는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도를 바꿀 만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깨어 있는 힘, 개개인의 작은 힘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엊그제 인터넷 신문을 보니, 1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장장 123일간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구내에서 선거 독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여온 청년 이오른씨를 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선거 반드시 참여합시다.” 그가 인터뷰 기사에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투표율이 역대 지방선거 가운데 2위라잖아요.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그 변화의 동력에 제 힘도 더해진 것 같아 뿌듯하고 기뻐요. 희망을 본 거죠. 노력하면 달라지고, 더 노력하면 더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요.…피켓 시위를 할 때 전 아주 높이 들어요. 그러면 팔은 더 아프지만 멀리서도 보이게 하려는 거죠. 그렇게 해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백 명에 한 명 될까 말까 해요.…생활정치의 촛불이 하나쯤은 이 도심에 꺼지지 않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마지막 말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여운으로 남아 떠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문화는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가? “큰 것이 작은 것보다 낫다, 강한 것이 약한 것보다 효과적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보다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거대 조직들과 법인체들과 초강대국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인생철학을 껴안은 결과, 우리는 거대 법인조직들의 신민이 되어 커다란 실수들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고층건물들을 백 층 높이로 세우고, 소매점처럼 작은 건물들, 우리의 일상생활 대부분이 의존하는 소형 건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는 국제적인 규모의 회사들을 성공한 것으로 치켜세우고, 지역 사회의 삶에 영향을 주는 지방 회사들은 극성팬 대하듯 한다. 현대 사회는 거대 군사 기구를 창설하여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자신이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해 보인다. 우리 사회는 회담을 약한 것으로, 협상을 더 나쁜 것으로 여긴다. 우리 사회는 힘, 규모, 에너지, 양을 중시한다. 큰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불행한 것으로 여긴다. 수적數的 우위와 돈을 중시한다.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이 홀로 세계에 맞서 싸우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은연중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나는 무력해.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무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거야.” 작은 일, 작은 힘이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거인들의 국가에서 작은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애처로운 몸짓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다윗을 우스운 인물로, 골리앗을 기준으로 여기는 시대 한복판에서 이오른씨의 피켓 시위는 소년 다윗이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한 사람의 작은 일, 한 사람의 작은 힘이 부조리한 세계와 맞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一燈 能除千年闇).”는 말을 일깨우는 생생한 표지가 아닐까?
작아도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찌하는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한 가지부터, 작은 것부터 하되,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이 욕보인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자비를 거스르는 물결에 도도히 저항하는 일만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는 남이 주는 것(사울이 준 갑옷과 칼)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무릿매 끈과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을 가지고 나선다. 그리고는 승리를 거둔다. 칼과 표창과 창 앞에서 무릿매 끈과 매끄러운 돌멩이는 하염없이 무력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나서는 것,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주 먼 옛날,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에서 원숭이 팔만 마리가 강력한 원숭이 임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강둑 옆에 그들이 사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그 골짜기 한복판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봄이 오자, 그 나무에서 피어난 하얀 꽃들의 향기가 공기를 달콤하게 했다. 그 나무의 가지들이 그늘을 드리우며 인도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큰 과일들을 내자, 원숭이들은 자신들에게 귀중한 선물을 가져다준 행운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임금은, 다른 이들이 와서 그 나무와 과일들에 관한 소문을 들을 경우, 그들도 그것들이 탐나서 원숭이들을 쫓아낼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도시에서 온 인간들을 특히 두려워했다. 그는 단 한 개의 열매도 인간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원숭이들에게 명령했다.
어느 봄날, 원숭이들이 과일 수확에 대비하여 그 나무의 꽃들을 솎아내다가 그만 솎아내야 할 꽃 한 송이를 솎지 않은 채 내버려 두고 말았다. 가을이 되자, 그 꽃에서 열린 과일의 꼭지가 잔뜩 시든 채 그 과일의 무게로 인해 축 늘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그 과일이 강물로 떨어져, 물살을 따라 고요하고 드넓은 평원의 강으로 흘러갔다. 브라흐마닷타Brahmadatta 임금이 아끼는 목욕 장소 근처에서 조업하던 한 무리의 어부가 자신들의 그물에 걸린 그 과일을 건져냈다.
어부들이 그 과일의 크기에 놀라 그것을 임금에게 가져다 바쳤다. 그 과일의 맛이 기쁨을 주자, 브라흐마닷타 임금은 그 열매의 출처를 꼭 밝혀내라고 명령했다.
며칠이 지나자 수색하던 이들이 그 나무를 찾아냈다. 그 나무에는 과일이 여전히 많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원숭이 떼가 그 나무를 먼저 차지한 상태였다. 원숭이 떼가 과일들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브라흐마닷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과일들이 원숭이들의 차지가 되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원숭이들을 몰살시켜 다시는 나무에 가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거였다.
원숭이들이 이튿날 이루어질 대량학살 음모를 엿들었다. 그들은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임금을 찾아가 모든 것을 고해 바쳤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건너뛰기에는 우리의 나무와 강 건너편에 있는 나무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우리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숭이들의 임금은 원숭이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잠시 생각한 다음,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몸도 크고 사지도 길고 힘도 세니, 내일 그것들이 쓸모가 있을 거야.”
새벽이 되자 원숭이 임금은 강 이쪽의 과일나무에서 맞은 편 강둑의 한 나무로 힘차게 뛰었다. 그는 포도나무 덩굴로 자기가 힘차게 뛴 거리와 같은 길이의 밧줄을 만들고, 그 한쪽 끝을 강둑에서 자라는 첫 번째 나무의 줄기에 감고, 나머지 한쪽 끝을 자기의 발목에 묶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기의 온 힘을 모아서 공중으로 펄쩍 뛴 다음, 자기의 기다란 두 팔을 강 건너편 과일나무 가지로 뻗었다. 두 팔로 과일나무 가지를 붙잡기는 했지만, 그가 포도나무 덩굴로 만든 밧줄은 두 나무 사이를 이어줄 만큼 길지 않았다. 자기의 발목에 감아 묶고 맞은편 나무 가지에 감아 묶을 만큼의 길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이제 원숭이 무리를 구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원숭이 임금은 공중에 매달린 채 부하들에게 자기의 등을 다리 삼아 포도나무 밧줄을 타고 강 건너편에 있는 나무로 안전하게 건너가서 목숨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팔만 마리의 원숭이가 자기의 등을 밟고 전속력으로 달려 건너갈 때까지 그는 몇 시간이고 매달려 있었다. 그의 튼튼한 등은 더 이상 압력을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마지막 부하가 안전하게 건너가자, 그의 등에 남아 있던 힘도 다하고 말았다. 원숭이 임금은 바닥으로 떨어져, 부러지고 잘린 사지로 인해 몹시 괴로워했다.
브라흐마닷타 임금이 원숭이 무리의 탈출 과정과 원숭이 임금의 위대한 희생을 지켜보다가 원숭이 임금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목숨과 그대의 모든 힘을 희생하여 그대의 백성을 구원하였소.”
원숭이 임금이 말했다. “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안전하게 사는 것이 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브라흐마닷타여, 그대는 알 것입니다. 위대한 임금을 만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이 단순한 이야기는 우리 자신에게 있으나, 우리가 더없이 무력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생생히 일깨운다. 원숭이 임금은 자기의 육신만 가지고 자기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힘에 대응했다. 그는 자기의 육신, 밧줄 한 개, 나무 두 그루만 가지고 한 왕의 군대로부터 원숭이 팔만 마리를 구해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 어리석은 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우리 존재의 힘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최소한 한 가지는 늘 있게 마련이다. 꼭 해야 할 일이 효과가 있건 없건 간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시도해보는 것, 바로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크기와 규모를 맹신하는 사회에서 개인이 지닌 힘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우리의 자신감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동시에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위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그 가르침이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무력함을 해결할 대책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물음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성공할까?”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물음은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할 의향이 있는가?”
결국 무력함을 해결할 대책은 끈기와 선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선한 일, 옳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내게 있는 것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을 가지고 일단 시도하고, 그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해가되, 선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자기의 등을 내줌으로써 자기 세계의 남은 이들이 강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널 수 있게 해 준 원숭이 임금 이야기,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출전한 소년 다윗 이야기야말로 무력한 개인을 두고 일어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닐까? 둘 다 공동체에 닥친 위기를 처리할 만한 적임자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장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을 지속하리라는 가망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도했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냈다.
성공하건 못 하건 간에,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등을 내줌으로써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어딘가 가능한 곳으로 뻗어나가게 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실제로 무력한 이는 하나도 없다. 힘은 기꺼이 홀로 서려는 마음자세에 깃들인다. 오늘날 이 세계가 당면한 문제에는 우리가 이미 얻었거나 아직 찾아내지 못한 답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끊임없는 현실 참여, 타협할 줄 모르는 현실 참여, 검질긴 현실 참여로 이 세계에 그 점을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목격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목격자보다 중요한 사람이 되려면,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저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도처에서 으르대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건져줄 원숭이 임금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작고 미약하다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세계를 건져줄 사람들이다.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자기가 쓸 수 있는 힘이 아무리 미약해도 그 힘을 쓰면서, 우리의 영원한 선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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