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괄호처리!
한 주 내내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문득 문장부호 가운데 괄호( )를 떠올렸다. 원래 괄호는 굳이 보태지 않아도 되는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빼버리거나 삭제하기 아쉬운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부호다. 괄호를 뜻하는 영단어는 bracket이다. bracket이 동사로 쓰이면 “괄호로 묶다, 일괄하다”를 의미하지만,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죄송” 청문회로 압축된 이번 인사청문회 대상자들의 요구는 한결같았다. 한 마디로 말해, 잘못 걸어온 자기 삶의 이력을 괄호에 넣어 달라,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거였다. 청문특위위원들이 의혹을 제기하며 자료를 요구하면 “그건 몰라도 됩니다. 그건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발뺌하다가, 막상 거짓말이 들통 나면 말 바꾸기로 일관하고, 사퇴 의향을 묻는 질문에 요지부동 버티는 뻔뻔한 모습들, 출세와 성공, 재산 증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과 탈법, 부정과 불의를 눈감아달라고 사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한 주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사람(14절), 에베소서에서는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엡 4,22)이라고 했다. 참으로 정확하지 않은가?
영성의 바른 뜻_깨어남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으로 들여보내 단 한 마디만 전하게 했다고 한다. 그 한 마디 말이 바로 “깨어나라”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일어나라(깨어나라)! 깨어 있어라!” 말씀하시는 대목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마 17,7; 막 5,41; 눅 7,14; 8,54/ 마 24,42; 25,13; 26,38-41; 막 13,33-37; 14,34-38; 눅 21,36). 예컨대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7장에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깨어나라).”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8장에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그리 말씀하신다.
깨어남이야말로 영성의 바른 뜻이다. 영성은 우리의 의식과 업무와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깨어남이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생생히 깨닫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기만 하고 먼 곳의 하나님은 아닌 줄 아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는다고 내가 그를 보지 못할 줄 아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느냐? 주님의 말씀이다.”(렘 23,23-24) 영성은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생생히 감지하고 붙잡는 것이다. 15세기 인도의 탁월한 시인 카비르(Kabir)는 이렇게 촉구한다.
벗이여, 깨어나라! 계속 잠만 잘 테냐?
밤이 지나갔건만, 낮마저 놓칠 셈이냐?
일찍 일어난 다른 여인들은 벌써 코끼리와 보석을 발견하였다.
그대가 잠든 사이, 벌써 많은 것이 사라져
쓸모없게 되고 말았다!
가장 위대한 영혼, 위대한 스승께서 가까이 오고 계시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그분의 발치로 달려가라.
그분이 그대 머리맡에 서 계시는데,
그대는 수백만 년 잠만 잘 텐가?
아침이 되었건만 어찌 일어나지 않는가?
사랑에 빠졌다면서
어찌 잠만 자는가?(Robert Bly, The Kabir Book)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잠은 육체의 수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한 삶,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 곧 영적인 잠을 의미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상태의 삶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허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의 신적 잠재력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감각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적 잠재력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의 삶을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로 본다(13절). 이러한 삶은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는 삶(14절)일 뿐 아니라 어둠의 행실(12절)이기도 하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가? 첫째, 새로운 시간, 곧 영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벌써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일상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섭리로 충만한 때를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시간이 끝나고 영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임께서 우리의 머리맡에 와 계시니, 얼른 일어나 임을 맛보아 알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당장 맛보아 알라는 뜻이다. 신적 은총의 바다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당장 뛰어들어 자맥질하라는 뜻이다. “지금 여기”(hic et nunc)를 하나님 나라 경험의 발판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지금이 그때이고, 여기가 거기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는 길을 아는 이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사람만이 그 길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그 길을 익히지 않고, 내세의 하나님 나라를 기약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깨어나 손만 뻗으면 닿을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저기 바깥 먼 곳에 있는 것을 동경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좋은 포도주 저장고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포도주를 맛보지 않는 사람이 어찌 깨어난 사람이겠는가? 그런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겠지만, 실상은 죽었거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깨어남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의식하고 맛보아 아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내일이 따로 없다. 그 사람에게는 언제나 오늘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오늘’이라는 말을 ‘오, 늘 황홀한 날’로 새기곤 하는데, 이 관점으로 보자면 깨어난 사람의 하루하루는 “오, 늘 황홀한 날”의 연속인 셈이다. 그렇게 늘 황홀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을 젤라레딘 루미는 이렇게 노래한다.
포도주가 술통 가득 넘쳐나는데
잔(盞)이 없구나.
우리에겐 아주 참 잘된 일이다.
아침마다 덕분에 달아오르고
저녁에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장래(將來)가 없단다.
옳은 말이다.
우리에겐 아주 참 잘된 일이다.
장래가 없고, 늘 황홀한 날만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안에 둥지를 트는 사람은 영원한 현재에 둥지를 트는 사람이다. 거기서는, 사람이 결코 늙지 않는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모든 것이 지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앞에 넘쳐흐르는 신적 은총의 포도주에 입을 갖다 대고 핥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깨어나야 하는 이유는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11절)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이미 시작된 종말”을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 깨어나지 않은 채 “언젠가 그때가 되면 제대로 살게 되겠지” 하거나, 지금 길을 익히지 않고서 “언젠가는 그 길을 알게 되겠지”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지금 깨어나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금 맛보아 알고, 지금 주님과 눈을 맞추어야 다시 오실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눅 12,36) 무릇 기다리는 자는 깨어서,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주인이 오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필 것이다. 기다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일이 제아무리 낯설어도, “어쩌면 주인이 오신 것인지도 몰라.” 하면서 내다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입기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14절). 대낮에 행동하듯, 품위 있게 살아라(13절).” 에베소서 4,22-24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라는 뜻이며, 우리 교회의 표어로 말하면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뜻이다.
“대낮에 행동하듯, 품위 있게 살라.”는 말씀은 과정과 절차를 괄호 처리하지 말고 인생의 본문에 성실히 담으라는 뜻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보듯,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는 자들, 과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성과만 중시하는 자들, 위장과 속임수의 달인들, 괄호 치기의 명수들이 국가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난다. 하나같이 이런 식이다. “잘못 살아왔지만, 이번만 통과시켜 주시면, 장관직이나 총리직에 맞게 잘 해보겠습니다.” 직위나 직분이 사람을 의롭게 해준다는 생각인데, 이는 본말이 뒤집힌 것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의로운 사람과 직위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대가 의로우면, 그대의 일도 의로워진다. 직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행위가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피려면, 먼저 일의 터전이 어떤 본성인지 살펴야 한다.” 일이나 직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의 터전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일의 터전은, 일과 행위가 표출되고 이루어지는 외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내적 공간을 의미한다. 일하기 전의 마음상태, 곧 마음자세와 마음씨를 가리킨다. 마음자세가 그릇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릇 행할 수밖에 없다. 마음자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의롭고 거룩하게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직위나 일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일답게 하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먼저 거룩해지고, 내가 먼저 의로워지고, 내가 먼저 바르게 되는 것이 우선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지금이야말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 알 그때이고, 여기야말로 거기, 곧 우리가 꿈꾸는 신적 은총의 자리다. 깨어남의 삶, 곧 영성생활은 하늘과 땅의 접점인 계면(界面)에서 “지금 여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무시로 다가드시는 하나님을 생생히 느끼고 맛보아 아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나, 하나님 안에 둥지를 틀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대낮에 행하듯, 품위 있게 살기 바란다. 부족한 나의 졸시 한 편을 읊으면서 설교를 마친다.
하늘과 땅의 접점을
삶의 자리로 삼을 뿐
깊이 빠져들지도
화려한 비상을 꿈꾸지도 않는다.
얼음을 지치듯
계면(界面)에서 씽씽
치우침 없는 삶의 썰매를 탈 뿐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지도
나 몰라라 바싹 마른 사막으로 달아나지도 않는다.
욕망의 늪에서 묻은
끈끈한 점액을 씻어내고
가볍디가벼운 발로
볼 것 없달 삶의 자리 껴안고
깃털처럼 가벼이
삶의 수면을 퉁기며
자유로이 노니는
소금쟁이처럼만 살련다.
첫댓글 지금 여기가 그때 거기이고 깃털처럼 가벼이 삶의 수면을 퉁기며
자유로이 노니는 소금쟁이처럼만 살아가자구요.ㅎ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