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산 오르기
마태복음 5,1-2; 에스겔 34,11-15
아, 산, 산, 산!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리고 저릿한 단어들이 있다. 사랑, 자비, 용서, 비움, 놓아 보냄, 깨달음, 허물벗기 등등. 분주한 일상사에 사로잡혀 아득한 지향점을 잃고, 사리도 도리도 분별 못한 채 눈앞의 허상만 추구하다,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이리저리 쓸리고 마는 우리들이니, 무슨 목표처럼 앞에 떡 버티고 선 채 손짓하는 저 아득한 단어들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고 귀가 먹먹해지는 거다.
‘산’이라는 단어도 그러하다. 가슴을 뛰게 하고, 가슴속에서 둥둥 북소리가 울리게 하니까. 산길을 걸으면 먼저 호흡이 가빠지고, 그러다 깊어진다. 마음을 담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면, 산 아래쪽에서 잡아당기던 일상사의 인력이 느슨해지고, 눈에는 마음의 돋보기가 달리고, 귀에는 마음의 보청기(청진기)가 끼워진다. 자세히 눈여겨보고, 깊이 새겨듣고자 하는 의지가 한층 커진다. 갖가지 계열의 녹색 빛깔로 물들어 싱싱한 생장의 축제를 벌이는 숲과 나무, 무더운 여름날 마음을 적시며 시원히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에 눈길을 보내고, 나무 우듬지에서 재잘거리는 새소리, 풀숲에서 노래를 주고받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다 보면, 팥죽처럼 정신없이 들끓던 마음은 어느새 호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낮아진다.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 산악인들은 “산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길을 찾는 구도자들은 “거기에 길이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길을 찾는 이유는 길을 잃었기 때문이고, 길을 잃었다는 말은 본궤도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본궤도,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너나없이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을 해소하려고 우리는 길을 찾고 또 모색한다. 길을 찾고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산에 오르는가?
여기 산에 오른 이들이 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떠나) 산에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보신 무리를 어떻게 새겨야 할까? 무리수를 두는 자들, 사리와 도리를 잃은 자들, 일리와 철리를 상실한 자들이 아닐까? 아니, 사리와 도리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땅의 현실에 매여 있는 자들이 아닐까?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틈입하지 못할 만큼 세상일에 재빠르고 재리와 명리에 밝은 자들이 아닐까? 손에 쥔 것이 사라질까, 쌓아올린 것이 무너질까, 전전긍긍 마음속에 층층이 불안의 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이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게 아닐까? 그들과 거리를 두시려고 산에 오르신 게 아닐까? 예수를 따라 산에 오른 제자들이 돋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그저 좋아서 그물과 배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이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신약]에서 제자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예수께 배우고,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인생을 건 이들이 예수를 가까이할 수 있고, 그분을 따라 산에 오를 수 있다.(참조. “부자 청년 이야기,” 마태복음 19,16-22)
오늘 읽은 또 다른 본문에서 하느님은 자신과 함께 산에 오르는 이들을 “내 양떼”로 표현하신다. “양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떼를 구하여 내겠다...좋은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푸른 목장을 만들어주겠다.”(에스겔 34,12-14) 양들은 단순하다. 마음이 갈래갈래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 무슨 일을 하든지 온새미로 하는 이들, 자잘한 근심과 염려로 더 큰 덩어리의 근심과 염려를 만들 줄 모르는 이들, 쪽모이를 전혀 모르는 이들.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산에 오르는 하느님의 양떼다. 한 영성가는 마음이 단순한 이와 마음이 갈가리 찢어진 사람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한 동물들만큼 하늘의 운행을 잘 아는 이도 없다. 그들은 하늘의 영향을 단순한 방법으로 알아챈다. 자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영악하고 생각이 많은 자들은 끊임없이 밖을 향하다가 잡다한 것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무릇 예수의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하는 이는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차분히 갈앉히고, 울타리 바깥으로 던지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와 분주하고 저급한 세상일을 멀리해야 한다.
영혼의 산
이성선 시인은 자신의 시집 [산시]에서 산을 이렇게 노래한다.
시에서 보듯이, 산은 높이로 자기를 알리고, 가벼운 것과 맑은 것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높은 것은 하느님과 가깝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 맞닿은 히말라야 설산처럼, 우리에게도 고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모든 피조물이 떨어져나가고 하느님만이 가까이 다가와 가르침을 베푸시는 영혼의 산이 있다. 재리와 명리, 권세와 권력, 무리와 무리수가 일절 빌붙지 못하게 우뚝 솟은 산, 그 산이 우리 앞에 있다. 예수는 언제나 우리 앞에 버티고 선 영혼의 산이다. 하느님이 자기 양떼를 데려가시어 풀을 뜯기시는 곳이 바로 그 산이다. 그 영혼의 산을 우리 내면에 들여앉혀야 한다. 산은 저기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들여앉히기만 하면, 영혼의 산은 언제라도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다. 눈에 보이는 산, 물리적인 산만 오를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산보다도 내면에 자리한 영혼의 산, 영적인 산을 타고 올라야 한다.
이성부 시인의 “지리산”이라는 시인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올랐다 싶으면 또 다시 봉우리를 불쑥 밀어 올리는 산이기에, 아예 그 산을 마음속 내밀한 곳에 옮겨다 모시고, 날마다 그 산에 오르려 애쓰고, 밤에는 그 산의 정취에 흠뻑 젖어드는 마음이 참으로 애틋하고 살뜰하다. 영혼의 산에 오르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푸르고 싱싱한 삶
무릇 하느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이, 한 말씀을 받고자 하는 이, 한 말씀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이는 누구나 영혼의 산에 올라야 한다. 그 산에서 하느님이 가르침을 완성하시고, 그 산에서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입을 여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외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푸릇하다. 산꼭대기에서는 모든 것이 푸르고 새롭다. 그러나 속세로 내려오면 색이 바래지고 흐릿해지고 옅어진다. 그러다 기어이 잿빛으로 변하고 만다. 우리 주님은 만물이 새로워지고 ‘푸릇해지는’ 곳에서 ‘자기 양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싶어 하신다. 저 ‘푸릇한 곳’과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모두 천사들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영혼을 흡족하게 한다.
제자가 구할 것은 언제나 가르침이다. 제자가 받아 모셔야 할 양식은 언제나 말씀이다. 제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제자는 언제나 스승의 가르침으로 살고, 언제나 스승의 말씀을 먹고산다. 제자에게는 스승의 가르침이 곧 빵이고, 스승의 말씀이 곧 양식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 자기 양떼를 위해 산 위에 마련해놓으신 푸른 목장이다. 이 푸른 목장이 자리한 영혼의 산에서 양식을 얻는 이는 누구나 푸르고 싱싱한 삶, 싱그럽고 새로운 삶을 살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시들거나 메마른 삶을 사는 법이 절대로 없다. 영원히 젊으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은 영원하시다’ 하고 말할 때, 이는 '하느님은 영원히 젊으시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늘 푸르고, 늘 싱그럽고, 언제나 꽃을 피우고 계시다. 하느님의 모든 행위는 새롭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가장 새로운 분, 존재하는 가장 젊은 분이시다. 하느님은 시작이시다.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하느님은 항상 움직이시고, 늘 새로우시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움을 받는 존재는 모두 새롭다. 반면에 하느님을 등지는 것들은 늙고, 썩고, 죄를 짓게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다. 예수께서 회피하시는 무리의 넓은 길과 영혼의 산에 오른 제자들의 좁은 길. 예수는 우리에게 영혼의 산이다. 그 산에 오르는 길이야말로 잿빛 물욕에 찌든 삶에서 푸르고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 모두 영혼의 산이신 예수를 마음속에 들여앉히고 날마다 힘써 오르기 바란다. 기어이 산정에 올라 푸르고 창창한 하느님의 빛깔에 젖어들고, 잔뜩 메말라 푸석푸석해진 영혼을 푸르고 촉촉하게 만들고, 날마다 새롭게 매순간 창창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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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상에 다 올라서 야호! 하고보니 또 다른 봉우리가 손짓하네요.
주여! 도우시고 이끄소서. 당신의 팔에 안겨 한발짝 또 옮깁니다.
날마다 가슴속에 북소리 둥둥 울려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