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찾아서
누가복음 2,41―50
덧붙임, 덤
우리는 신앙생활을 소유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사물 없이 하나님 한 분만 소유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물을 함께 소유하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만을 소유하고 기뻐해야 할 신앙생활에 이것저것을 덕지덕지 덧붙이기 시작한다. 마리아처럼 친척과 친지들 속에 예수가 계시겠지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짬을 잃어버리고, 덕지덕지 덧붙은 덤에 슬금슬금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소중히 갈무리하여 임에게 바쳐야 할 귀한 마음인데 말이다.
덕지덕지 덧붙은 덤이야말로 마리아의 마음을 잠시 빼앗았던 바로 그 친척과 친지다. 그 덤을 세상으로 보든, 교회의 외형적인 크기로 보든, 많은 교인 수로 보든, 교회의 막대한 재정 규모로 보든, 아니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러저러한 신학 방법으로 보든 관계가 없다.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알짬을 잃게 만든다면, 그것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친척이요 친지인 것이다.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다 팔아먹고,
다 해쳐먹고,
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님 생각이 나는 오늘엔
바쳐야 할 그 맘은 없고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더러운 기록을 그린
이 껍질 밖에 없으니
무엇으로 님을 만나나?
무슨 맘에 님을 찾나?
속았구나?
세상한테 속았구나!
그 사탕에 맘 팔고,
그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
속았구나,
속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전반부)
덧붙여진 만물은 하나님 한 분만 못하다
덤에 환호하고 덤에 들떠 살면서 덤 속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예수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처럼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48절). 속없는 세상한테 속을 빼앗기고 살다보니, 불안이 엄습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거다. 마리아와 요셉은 왜 애를 태웠는가? 예수를 찾아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우리의 행복과 불행, 우리의 안식과 불안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잃어버린 순간, 불안과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우리는 애를 태울 수밖에 없다. 예수를 찾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장 먼저 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안식이다. 안식이야말로 모든 피조물의 참된 근원이다. 하나님은 안식을 목표로 삼으시고 피조물을 지으셨다. 창조 보도의 절정은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엿새 동안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일곱째 날에 메누하(menuha, 안식, 쉼)가 창조되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렇게 말한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없었는가? 메누하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주가 완전해졌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안식을 구하신다. 영혼도 무슨 일을 하든지 안식을 구한다. 만물이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도 안식을 얻기 위해서다. 우리가 힘써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도 결국에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다.
누군가가 내게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묻는다면, 나는 “안식”이라고 대답하겠다.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안식의 알짬이신 주님을 만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우리의 안식이 결정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그윽하고 조용한 근원으로 돌아가라
예수를 찾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윽하고 조용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덤에 마음을 팔다가 속절없이 놓쳐버린 예수를 찾으려면,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떠들썩한 군중과 친척과 친지를 떠나야 한다. 친척과 친지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 둘 다 가까울 친(親)자를 썼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 그것이 친척이고 친지이다. 우리의 마음과 눈에 익숙하게 담아 두었던 모든 것, 그것이 군중이고 친척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날 때 비로소 예수 찾기의 여정이 시작된다.
본문은 예수가 떠들썩한 군중이나 익숙한 친척이 아니라 성전에 계셨다고 전한다. 예수는 자기를 찾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누가 2,49).” 예수께서 성전에 계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안식을 구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안식처를 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성전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마음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가득 찬 군중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들, 우리가 덕지덕지 덧붙인 덤들로 가득 찬 친척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저 하나님이 머무르시기에 가장 합당한 처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성전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덧붙이려는 마음자세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덧붙여진 것이 치워지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되신다.” 덧붙이려는 태도를 여의는 것은 거장이 조각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거장은 목재나 돌로 조상彫像을 만들 때 나무에다 상을 새겨 넣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깎아낸다. 그는 목재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다만 목재의 껍질을 벗겨내고, 옹두리를 떼어낼 뿐이다. 그러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훤히 드러난다. 덧붙이려는 태도를 여의고, 덧붙인 것을 말끔히 치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곳으로 뛰어드신다. 아니, 그곳에서 드러나신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에게 익숙한 군중과 친척과 친지를 떠나서야 예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덤에 환호하던 태도를 버리고, 덧붙이려는 마음자세를 여의면 여읠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속으로 뛰어드실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호젓한 빈들, 고요하고 그윽한 빈들이 될 때에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와 더불어 신접살림을 차리실 것이다. 빈들이 빈들인 것은 어째서인가? 하나님 외에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덤이라는 것이 일절 틈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의 입술을 빌려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빈들로 꾀어내어, 그의 마음속에 속삭여 주리라(호세 2,16).” 참되고 영원한 말씀은 호젓한 빈들에서만 들린다. 우리가 덧붙이려는 자세를 내려놓고, 덤에 환호하던 태도를 버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오롯이 모습을 드러내신다.
우리의 영이 준비되자마자 하나님은 지체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우리의 영 속으로 들어오신다. 우리 주님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계시 3,20).” 그분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그분을 먼 곳에서 부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면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텅 빈 채로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무언가가 텅 빈 채로 있는 것을 참지 않으신다. 그러니 덧붙이려는 자세를 내려놓되, 호젓한 빈들이 되기를, 텅 빈 상태가 되기를 겁낼 일이 없다. 그곳에 하나님이 가득 자리하고 계시니….
우리의 영혼이 호젓한 빈들이 되고, 우리가 그곳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앞에 다가온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헤살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자극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할 것이다. 전에는 우리에게 걸림돌로 작용하던 것이 이제는 우리에게 이로움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_찾아나섬
믿음의 양식은 그리움과 기다림이다. 그리움을 품고 기다리는 사람은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여정은 예수 찾기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떠들썩한 군중, 왁자한 친척, 덧붙이려는 태도, 덤에 환호하던 자세를 여의고, 호젓한 빈들에 계신 예수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속없는 세상에게 속절없이 빼앗긴 속을 되찾아 그분께 드리려고 준비하는 여정이다.
해는 서산 위에 뉘엿이 눕고
내 몸은 피곤하고
저녁 바람은 가벼이 불 때
다 팔고 남은 내 맘의 껍질은
물 마른 우물같이
텅 빈 쓸쓸함만 길었는데
님은 저 언덕을 올라가시네,
저녁 영광 안으시고.
저 님이 가시기 전,
저 님이 저 언덕을 아주 넘으시기 전,
가자, 내 맘아,
팔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모아 가지고
가서 바치자.
받으시거나 아니 받으시거나
발 앞에나 쓰러지자!
세상아, 내 맘을 도로 주어!
이 껍데기 세상아
네가 날 속여 껍데기로 만들었지만
네게 줄 내 맘이 아니었더니라.
님께 바쳐야 할 내 맘을
도로 내놓아, 어서 내놓아!
내가 본시 네게서 받은 것이 없었노라.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후반부)
잃어버렸던 속을 되찾고, 그 속을 하나님이 거주하시기에 알맞은 빈들로 만들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여정이 호젓한 빈들에 계신 예수, 고요하고 그윽한 빈들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뜻 깊은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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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목사님 계신 교회에 어느날 문득 가도 되나요? ^^* 조은하 드림
아주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갑자기 오시든, 어느 날 문득 오시든, 어떤 형식으로 오시든, 괜찮습니다.
샬롬^^목사님~많이 뵙고 싶습니다. 여수 가까이 고흥에 연고가 생겼습니다. 한번 찾아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흥에 연고가 생겼다니 잘 됐습니다. 저도 아주 많이 뵙고 싶습니다.
오직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