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는 지식
로마서 1,18-25
나를 기쁘게 하는 길
꽃밭에 있을 때면 꽃들도 감상하라고 대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꽃을 돌보는데, 어제는 이런 노래가 들리더군요. 가사에 마음을 울리는 뜻이 담겨 있어 그대로 옮겨봅니다.
가사가 너무 좋아 “누가 저리 아름다운 시를 쓰셨을까?” 궁금해서 서재로 들어와 찾아보니 순천이 배출한 세계적인 동화작가 고 정채봉 선생님이 쓰신 “오늘”이라는 제목의 노랫말이더군요. 가수 김현성 님이 곡을 붙였고요. 다시 꽃밭으로 돌아와 계속 음미하며 따라 부르는데, 자연과 사람과 하나님께 고루고루 가닿는 시인의 따스한 시선(마음 씀씀이)이 사부자기 제 가슴 속으로 스며들더군요. 도대체 시인은 무엇에 정신이 쏠려서 자기를 슬프게 했을까요? 시를 뒤집어 읽으면 “나(자기)를 기쁘게 하는 방법,” 다시 말해서 “오늘”이라는 하루를 “오! 늘 황홀하게 사는 방법” 세 가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꽃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입니다. 시인 나태주는 우리가 꽃을 만났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참 간결하고 명징하지 않아요? 내가 만일 꽃이라면 자세히 보는 사람,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제일 반가울 것 같습니다.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눈은 꽃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오스카 와일드가 쓴 나르키소스 이야기 한 자락을 들려드리지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천하제일 꽃미남 나르키소스가 호수에 자기 얼굴만 비쳐보다가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오스카 와일드의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사뭇 다르더군요.
나르키소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 왔다.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레이아스들이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울고 있나요?” 호수가 대답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숲의 요정들이 말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호수가 물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수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수면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_오스카 와일드_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재인용
나는 위의 글을 이런 식으로 읽었습니다. “꽃을 자세히 보거나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꽃들에게 거울을 제공하는 일이다. 꽃들은 자기 모습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주는 이의 눈망울을 거울삼아서 꽃들은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맑게 씻긴 눈망울로 꽃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읽으면서 깊이 아로새길 수 있었습니다. 흐릿한 눈이어도 좋습니다. 꽃을 자주 들여다보세요. 보는 이의 눈망울이 끊임없이 맑아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무릇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형제자매를 자세히 보고 오래 들여다보면서 자연(피조물 형제자매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채봉 선생님이 말하는, 오늘을 제대로는 사는 두 번째 방법은 배려(환대)입니다. 살피고 헤아리는 마음을 생생히 갈무리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나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따스한 옷처럼, 따사로운 햇살처럼 우리 곁에 늘 함께하고 계심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오늘”이라는 시가 말하는 것처럼, 꽃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웃에게 배려를 실천하고,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날을 “오! 늘 황홀한 날”로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랫물로는 윗물을 맑게 할 수 없다
본문은 맑은 영의 소유자가 걸어야 할 길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20절) 바꾸어 말하면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은 들풀 한 포기, 공중의 새 한 마리,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들꽃 한 송이를 보고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깨달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게 닦인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 점을 하나같이 힘주어 말합니다. “한 알의 먼지에도 경이로운 영혼이 들어 있다.”(호앙 미로) “개개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저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마이스터 엑카르트) “온 세계와 모든 피조물은 당신에게 펼쳐진 책이며 살아 있는 성서다.”(세바스찬 프랑크) 이들 모두 우리가 우주와 피조물을 마주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읽어야 함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모두 자신의 출처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像), 하나님에게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입구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피조물을 마주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알아채기는커녕 오히려 수익성과 사업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이 강바닥을 파헤치면 돈 좀 되겠는데, 이 산을 깎아내면 돈 좀 되겠는데.” 하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길을 잘못 걸어도 아주 크게 잘못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리켜 본문은 “허망한 생각,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찬 상태”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21절)
흔히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합니다. 이 속담을 거의 마무리된 4대강 사업에 대입하면 4대강 사업은 본말이 전도된 사업임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4대강은 윗물이 아니라 엄연히 아랫물입니다. 강으로 흘러드는 지천(支川)들이 윗물이지요. 정말로 강을 살리려면 축산 폐수와 생활 폐수와 공장 폐수로 오염된 지천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지천들은 내버려둔 채 큰 강줄기만 파재끼는 것은 삼척동자가 봐도 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화능력이 탁월한 습지들과 모래사구들을 파괴하면서 어떻게 강을 살리겠다는 말일까요? 4대강 사업은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서 빚어진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무는 지식에서 동트는 지식으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귀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 나름의 본질을 아는 것을 일컬어 ‘황혼의 지식’이라고 한다. 그때 우리는 피조물을 다양한 차이를 지닌 형상으로 보게 된다. 반면에 피조물을 하나님 안에서 아는 것은 ‘여명의 지식’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하나, 곧 하나님 안에서 모든 차이를 여의고, 모든 형상을 여의고, 모든 비슷함을 벗어버린 피조물을 본다.”
황혼의 지식은 개개의 피조물을 차이를 지닌 피조물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놓고 그 본질을 규명하는 지식이지요. 그것은 대게 인간의 이익을 기준으로 놓고 피조물의 쓰임새를 따지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표피적이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과학과 기술공학이 그 길을 걸어왔고, 인간과 피조물을 가르고 인간과 자연을 갈라 인간만의 구원을 외치는 신학도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저무는 지식입니다.
반면에 여명의 지식은 피조물을 알되 하나님 안에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만물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몸임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몸 안에서 나와 남(피조물)이 따로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마주하여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꽃 한 송이 들풀 한 포기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몸을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명의 지식은 동트는 지식입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지속 가능한 미래의 존재 여부는 우리가 황혼의 지식에서 여명의 지식으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저무는 저녁에 서 있는가요? 아니면 동트는 새벽을 맞이하고 있는가요?
동트는 새벽을 맞이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만물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예리한 인식을 늘 갈무리하고, 생명의 둥우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보는 맑은 눈의 소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피조물에게 다가가서 피조물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주라는 책을 읽고자 힘쓸 때, 피조물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꼭 필요한 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피조물과 우주가 분출하는 건강한 에너지에 흠뻑 젖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마음 상태를 점검하는 뜻 깊은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책갈피에서 말씀을 길어 올리고, 길 위에서 만나는 피조물 형제자매를 하나님의 메신저로 여기고, 피조물 형제자매들을 하나님의 발등상인 우주의 춤꾼으로 알아 그들과 어우러져 거룩한 춤판을 벌이면서 동트는 새벽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삶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 건물을 세우거나, 혹은 정원을 일구거나.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에 몇 년이라는 세월을 바치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일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벽 안에 갇히게 된다. 건물을 세우는 일이 끝나면, 그 삶은 의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몰아치는 폭풍우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계절에 맞서 늘 고생하고 쉴 틈이 없다. 하지만 건물과는 달리 정원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또한 정원은 그것을 일구는 사람의 관심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의 삶에 위대한 모험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 한 포기 한 포기의 역사 속에 온 세상의 성장이 깃들어 있음을._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서序에서
|
| |
첫댓글 잔잔한 감동으로 때론 동감으로 님의 글을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찾아주시고 주의 깊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