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벅찬 신화(神化)의 길
요한1서 3,9
영성 백화점
요즘은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사회 도처에서 영성이라는 글자가 붙지 않으면 도무지 상품가치가 없다는 듯이, 허다한 사람들이 아무 프로그램에나 영성이라는 글자를 갖다 붙이는 것 같다. 영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부흥사들조차 자기네 프로그램에 영성이라는 말을 약방의 감초처럼 갖다 붙인다. 예전 같으면 “무슨 심령 대부흥회, 무슨 전도 집회”로 통했을 모임마저 “무슨 영성세미나, 무슨 전도 영성 세미나” 등으로 고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댄다. 마치 자기가 대단한 영성의 소유자라도 된다는 듯이. 하다못해 요가원에서도 단식원에서도 영성을 부르짖는 형국이니, 그야말로 요즘은 영성 박람회 시대인 것 같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영성을 떠들어대는데도 세상은 변할 줄 모른 채 요지부동이다. 겉꾸림이 득세하고, 명함에 이런저런 직함의 꼬리표를 줄줄이 박고 다니는 것을 치켜세우고, 안을 그대로 둔 채 겉만 뜯어고치는 성형수술이 유행가처럼 번지는 세상이다. 아무리 영성을 떠벌여도 자기의 안과 밖이 괴리되어 있고, 안과 밖이 분열되어 있다면, 그 떠벌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외모가 경쟁력인 세상, 화장과 분장, 변장과 위장이 득세하는 세상, 겉이 힘을 떨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안을 뜯어고치고, 안을 돌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번지르르한 겉만 보고 마음을 주었다가 그 속이 부패한 것을 보고 실망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안은 내버려둔 채 겉만 닦다가 낭패를 본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영성_안과 밖의 조화를 꾀하는 생활방식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은 하나의 생활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안과 밖의 조화를 추구하는 생활방식. 안을 들여다보고, 안을 뜯어고치고, 안을 갈무리하고, 안에서 끌어낸 힘으로 바깥의 거품을 걷어내고 바깥을 일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이다.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영성은 신비주의와 예언자 정신을 한 몸에 아우르는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내 안에 있는 신비가(神秘家), 내 안에 있는 아이를 깨워 불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놀람과 감탄으로 생명을 마주하고, 신나는 춤사위와 즐겁고 유쾌한 몸짓으로 생명에 응답하는 내면의 아이를 깨우려면, 자기 영혼의 깊숙한 곳으로,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정점으로 가라앉아, 생명에 대한 철저한 응답, 생명에 대한 놀람과 기쁨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또한 내면의 아이를 깨우는 것은 하느님을 소꿉동무로 삼는 길이기도 하다.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는 하느님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는다. “나 하느님은 네 소꿉동무다. 내가 너를 택했으니, 이제 나는 네 안의 아이를 멋진 길로 이끌겠다. 나는 진실로 네 안에 있으니, 사랑스러운 아이야, 어서 내게로 오렴.”
다른 한 편, 예언자 정신은 나와 남이 따로 없다는 인식을 갈무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이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이고, 자비가 의미하는 바를 굳게 붙잡는 것이다. 자비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이다. 자비의 화신인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 6,36, 공동번역).” 그리고 자비의 설교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든 가장 먼저 분출하시는 것은 언제나 자비다. 하느님께서 줄곧 행하시는 최고의 일은 자비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닮는 길이다.
안을 돌보기
이렇게 안팎이 조화로운 삶, 신비주의와 예언자 정신의 행복한 결합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안을 잘 갈무리해야 한다. 왜 안을 돌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보화가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젤랄레딘 루미는 그 보화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대에게 생명을 주는 숲이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을 찾아라.” 여기 안을 돌보아야 할 이유를 역설하는 이야기가 있다.
위대한 성자 나나크데브에게 한 제자가 찾아와서 물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성자가 대답했다. “내일 다시 오너라. 그러면 말해 주겠다.”
다음 날 아침 제자가 나나크데브를 찾아갔다. 성자는 그에게 귀한 보석 한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보석을 시장으로 가지고 가서 값을 물어보아라. 그러나 어떤 값에도 팔지는 마라. 단지 가게마다 들러서 그 값을 물어보기만 해라.”
제자는 성자의 말대로 보석을 들고 가서 이 가게, 저 가게로 돌아다녔다. 맨 먼저 그는 과일가게로 가서 물었다. “이 보석을 얻는 대가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과일가게 주인이 말했다. “오렌지 두 알을 주겠소.”
제자는 다시 감자 파는 상인에게 갔다. 상인이 그가 내민 보석을 보고 말했다. “감자 네 근을 주겠소.”
그 다음에는 대장간으로 갔는데, 그곳 대장장이는 과거에 보석 상인이었다. 제자가 값을 묻자 대장장이는 오백 루피를 주겠다고 했다. 제자는 다른 보석가게 몇 군데를 더 들렸다. 가는 곳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가게에 들렀다. 보석가게 주인이 보석을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보석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오. 이 보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소.”
제자는 곧 나나크데브 성자에게 돌아와 자기가 돌아다니며 겪은 바를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성자가 말했다.
“그래, 너는 이제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알았느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오렌지 두 알에 팔아버릴 수도 있고, 감자 네 근에 팔아버릴 수도 있으며, 오백 루피에 팔아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자신이 원한다면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존재로 자기 자신을 만들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_고진하,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왔다. 인간의 영혼은 값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석을 헐값에 처분해서는 안 된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씨앗이 심겨진 밭이다. 그 밭에서는 당연히 하느님의 향기가 풍겨나야 한다.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이런 우화가 회자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진흙덩어리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이니?” 진흙덩어리가 말했다. “나는 진흙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장미 옆에 놓여 있어서 장미 향기를 품고 있답니다.”(비겐 구로얀 지음, 김순현 옮김,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에서)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대로, “인간은 미리 나무가 심어지고 씨앗이 뿌려진 정원처럼 되어 태어난다.” 우리는 너나없이 그 밭을 일구는 농부 내지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들어 있다. 어질고 슬기롭고 부지런한 농부를 만나면, 그 씨앗은 튼튼하게 자라서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 열매는 하느님의 본성과 똑같을 것이다. 배나무 씨앗은 자라서 배나무가 되고, 개암나무 씨앗은 자라서 개암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씨앗은 자라서 하느님이 되어야 마땅하다.”
신화(神化)의 길로
하느님의 씨앗이 뿌려진 밭을 일군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神化)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신비주의와 예언자 정신을 아우르고 하느님을 닮는 길, 예수처럼 사는 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신화(神化)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 곧 두려움과 자기 검열을 극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보잘것없고 하찮은 내가 어찌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신화의 길이야말로 성육신의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같은 기독교의 걸출한 영성가들은 성육신의 비밀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신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화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해야지 신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신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을 닮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자 만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골 1:15)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앞장서서 보여주신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가장 먼저 의미심장한 돌파를 이루신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분법)을 완전히 극복하신 분이다. 그분은 만물의 맏이로서 우리네 신성의 귀감이 되신 분이다. 우리는 맏이이신 그분을 본받아, 신성이 우리를 통하여 맑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안에서 생긴 것이든, 바깥에서 주입된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신화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려움과 자기 검열의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장벽을 검사하고, 모든 길을 걸어보고, 모든 심연을 측량해보아야 한다. 해보아서 안 될 것은 없다.” 신화의 길 걷기를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외부의 검열이나 자기 검열이 우리를 신화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으신 씨앗이기 때문이다. 바위 절벽 틈에 떨어진 소나무씨앗이 움터 올라 낙락장송으로 자라듯이, 하느님의 씨앗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 안에서 불쑥 움터 올라 기어이 하느님께로 발돋움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움터 오르려 하는 하느님의 씨앗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 우리 안에 깃들인 신성을 깨우고 싹틔운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아니 우리의 모습 속에서 신성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의 씨앗을 품은 속사람에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싹 틔우는 능력을 갖추어, 그 속에 심겨진 하느님의 씨앗이 힘차게 싹트고, 그 결과 여러분의 삶과 행위에서 하느님이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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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과 접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내 안 사람을 만나는 지금 다시 한번 엑크하르트의 말을 새겨 봅니다. 오늘도 말씀하사 내 안 사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0^* 감사...!!! *^0^*
내안에 나를 어찌보오리까!
귀한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