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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경비실에 들러 이것저것 물었다. 이순길을 아느냐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사와 확인, 시중을 들어야 하고 차량을 지나가게 해 줘야 하니 바쁜데 성가시다는 듯 되통스레 모른다고 말했다.
“사무실에 가 보시오.”
순길의 전화를 알아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오래 헤어져 아들 전화를 찾아 연락하려 한다니 거절할 수 없었나 보다.
“순길아 나다. 잘 있었나.”
당장 만나는 게 미안스러워 우선 전화로 소통하려 했다. 장성한 아들의 목소릴 들으니 감격스러워 먼저 인사를 했다. 반길 줄 알았던 아들의 대답은 냉랭하고 쌀쌀맞았다.
“어찌 알고 이리 전화를-”
딸깍하고 끊어졌다. 짐작했다. 그래도 직접 만나면 좀 덜 하겠지. 어릴 때 얼마나 귀여웠는데 날 반기지 않을까, 집을 찾아보았다. 회사 주위이거니 하고 서성거렸다. 며칠 내내 헤맸지만 만날 수 없었다. 긴가민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들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다. 어찌어찌 알아 자취하는 집을 찾았다.
“총각, 낮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물어보고 찾아왔었어.”
심란해진 순길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얘야, 며칠 전에 무슨 염치로 너 애비가 상점으로 찾아왔다.”
이웃에 물어 울산과 동래에 자녀가 있다는 말을 들었나 보다.
당장 나가라고 내쫓았다. 이야기하자는 말도 듣기 싫다며
“내가 남자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을 만나지 당신은 안 본다.”
고 호되게 말했다. 겸연쩍고 무안해서 비실비실 뒷걸음쳐 나갔다. 그래도 아들과 딸이 사는 집인데 이리 문전박대를 해도 되나. 냉수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밀려났다. 마침 손님이 없는 사이에 들어갔는데 호통치며 언성이 높아지자 남부끄러워 슬며시 나왔다.
선생 하는 딸은 덜 하겠지 생각하고 동래 고등학교에 있다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 중턱에 위치해서 언덕을 오르는데 숨이 차다. 반겨주겠지. 희망을 걸고 참았다. 운동장 입구에서 기다렸다. 교무실까지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수위가 연락하자 한참 뒤에 나왔다. 수업이 있었나 보다. 명옥은 어릴 때 명랑해서 명 자를 넣었다. 학부모가 찾아왔는가 싶어 팔랑팔랑 살랑살랑 오더니 아버지라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 말 한마디 없이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걸음이 쌩했다.
우린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시 김금련과 인연을 맺었다. 눈웃음이 깜찍하고 입가 미소가 끌어당기는 매력이었다. 나 이정수를 믿고 헌신하며 사는 아내에게 날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휘황찬란하다가 분홍빛 석양처럼 더 아름다웠다. 아내 마음이 아플까 슬프지는 않나 화났을까 다치지 않도록 토닥거리며 살았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듭시다.”
딸과 아들을 낳으니 보석이다. 너무 귀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보기만 해도 빛났다. 만지면 깨어질 듯, 건드리면 넘어질 듯, 불면 날아갈 듯 유리처럼 연약해 보였다. 이놈들을 보노라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재롱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들에겐 그늘과 먼지 많은 세상의 얼룩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화사하기만 하던 좋은 봄날이 가고 있다. 이글거리던 날빛이 황혼 어스름에 가리기 시작했다.
‘좋은 시절은 후딱 지나친다.’
우연히 시내 찻집에서 만난 깔삼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여우에게 홀리듯 자꾸 그녀를 만나 식당과 카페를 드나들었다. 외국인 회사에서 일했는가. 영어도 꽤 잘했다. 잦은 외출과 깜깜소식에다 늦게 들어와선 곤드레만드레 퍼져 자는 게 일이다. 뭘 숨기려 하고 아까 물었던 말이 뒤에 또 틀려 더듬거리며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수상쩍은 게 한둘이 아니다.
‘거짓은 거듭 물었을 때 들통난다.’
그래도 전보다 과자와 과일, 장난감 등 많은 것을 사 들고 와선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놀이하는 것이 고마워서 별 의구심 없이 그냥 넘어가곤 했다. 한번 노려보면 끝이 없다. 술집과 다방을 드나들며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게 남자들이 즐기는 일 아닌가. 이정수에게 관대한 아내 김금련이다. 이러면 안 된다. 하면서도 자꾸 질펀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정수는 어느새 박지선이 없으면 못 살 형편이 됐다. 눈뜨면 그녀 생각으로 골몰했다.
‘장석에 바람들면 석돌이 된다.’
그렇게 만남이 한 해 두 해 길게 이어졌다. 아내 있는 사람이라 밀어내며 싫다고는 하지만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까만 껌딱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남부끄러운 부산을 떠나 다른 외진 곳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결국 둘은 미국 이민 가기로 맘먹는다. 여자가 알아서 착착 진행했다. 갈 날이 다가온다.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다.
“여보 우리 헤어집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혼하자니. 아이들이 저렇게 있는데”
날벼락이다. 기가 막힌다. 말문이 닫혀 버벅거린다. 안 된다. 안 돼. 몸부림치고 울부짖어도 그는 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뿌리치고 떠나는 남자의 완력을 금련은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어디가 그리 미웠나요.”
“이만하면 됐지 이보다 더 어찌 잘합니까.”
소리쳐도 소용없다. 그러다 돌아오겠지 했지만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도 소식이 없다. 아이들이 저렇게 있는데 했을 때
“학비는 보낼게.”
했다. 그 말만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서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기나.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게 아니라 살아서 헤어지는 아픔이 더하다. 생가지를 찢기고 끊기니 죽을 맛이다. 날 버리고 가는 사람 잘 되나 봐라. 발병이 날 것이다. 악다물고 부글부글 미워하며 부아를 끓여야 할 텐데 순해 빠져 속으로 어디 가도 잘 지내고 건강하세요. 그러다 돌아오세요.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합니다. 꼭 오세요 ‘학비 보낼게’ 하며 눈물짓는 남편 정수의 모습에 나약해진 마음이다.
미국 뉴욕으로 갔다. 말만 들은 낯 설은 이국이다. 막상 오기는 해도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우선 살 집을 마련하고 몇 달은 말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고향의 ‘깜둥강아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묻고 배웠다. 자칫하면 사기에 걸릴 수 있으니 교회를 나가 사람들을 만나라 일렀다. 둘은 시시덕거리며 즐겁고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마천루를 두루 둘러보고 군데군데 올라 맨해튼 시가지를 굽어봤다. 이스트강과 할렘강이 감싸고 도는 미국 아니 세계의 중심도시이다. 국제연합 본부와 컬럼비아대학이 우뚝하다. 사진으로 보고 말만 듣던 것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제일 높은 건물 엠파이어스테이트 건물도 찾아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102층 바닥은 되게 넓다.’
‘엘리베이터가 수십 대로 전망대까지 쉬 올라간다.’
배를 타고 허드슨강 가운데 섬에 내려 자유의 여신상을 어루만지며 동상 안을 올랐다 내렸다. 바래져 정말 청회색 옷을 입은 여인처럼 보였다. 한국전쟁 기념 공원에 들러 비 오는 날 밤 판초 우의를 걸치고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나 전장으로 나가는 불안한 눈망울이 불쌍하다. 알지 못하는 남의 나라 전쟁에 귀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치며 싸워준 게 한없이 고마운 일이다.
“눈빛이 정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아요.”
‘전사자가 5만 명이라 5만---.’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미국에 진 빚을 언제 값나. 가난한 사람을 도우니 신병도 낫고 재물도 늘어 부자가 되었다는 치솟은 록펠러 재단 빌딩 거리를 지나기도 했다. 지선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연신
“근사하고 고마운 나라에 왔어요.”
가까운 워싱턴 수도로 가봤다. 남북전쟁 때 마차에 실린 기진맥진한 군인들의 조각상이 안 돼 보였다. 북쪽 국경지대 나이아가라로 가서 헬기로 미국과 캐나다 폭포 주위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별천지에 온 것이다. 보이는 것마다 신기하고 여유가 넘쳐 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전쟁과 독재, 폭압 정치로 살기 힘든 나라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 마그마 용암이 들끓어 분출하고 지진으로 불안한 나라에 어찌 사나. 여기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낙원이 이런 곳이어요.”
지선은 언어가 트여갔지만 나는 어려웠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 오는 일이 힘들다. 버스도 탔다간 내리는 곳이 어디쯤인지 헷갈려 갈팡질팡한다. 눈치 빠른 지선이 잘 알아서 이끌었다. 나는 눈뜨고 앞을 볼 수 없는 당달봉사다. 화폐가 작아 큰돈과 작은 것도 구별이 안 돼 어지럽다. 무엇을 사면 백 달러를 주고 거스름돈을 받아야 했다. 몇 해를 그렇게 보냈다.
“볼 것 다 봤으니 뭘 설설 시작해요.”
다그치는 지선이다. 마냥 이럴 수 없지 않나. 아무 일이라도 해야지 펑펑 늘어지면 주머니가 바닥을 친다. 변두리에 빵 가게를 냈다. 동포가 만든 것을 가져와서 팔았다. 잘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싹싹하게 대해주던 한인 몇이 급하다며 돈을 빌려 가선 소식이 끊어졌다. 그런 사람이 자주 찾아온다. 안 빌려줄 수 없다. 협박 비슷하게 윽박지르는 것을 그냥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이해관계를 걸어놓고 다가오기 마련이다.
“며칠 쓰고 곧 갖다 드릴게---”
그래도 몽땅 당하지 않고 이만하길 다행이다. 발가벗겨 오가도 못하는 한인이 있다니 가히 불안하다. 같은 동족끼리 그런다니 이럴 수 있나. 어쩌면 좋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꼭 오세요.’ 하던 말이 귀에 쟁쟁거려 사무쳤다. 처자를 팽개치고 온 게 늘 마음에 걸려 그리움으로 남는다.
‘새끼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얼찐거려 자꾸 켕기네.’
금련은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세월을 보냈다. 싸우거나 다툰 적도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맑은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고 갔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있나. 아이들 앞에서는 의젓하게 보였지만 우울한 나날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명옥과 순길이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뛰어놀아서 한풀 꺾인 마음을 위로해 줬다. 저것들 보고 살아야지 없는 힘도 만들어 내자.
‘자식이 희망이고 재산이다.’
시집에서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손주들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짭짤하게 살지 않아 생긴 일이라 여겼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못난 아들을 감싸고 돈다. 마산에 사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이 모두 가서 상중을 애통해하고 도왔다. 순길이 상복을 입고 상제 노릇을 하면서 상주 아버지도 만났다.
뻘쭘하고 민망해서 데면데면한 이정수 아버지였다. 아이들이 저렇게 커 가는데도 학비를 보내겠다는 빈말뿐 뒷바라지를 내 모른 척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나치면서 마지못해 아버지가 한 말씀이다.
‘열심히 공부하제.’
아이들 좋아하는 싸구려 과자와 성냥, 비누, 초, 모기약, 연탄불 피우는 숯 불쏘시개 등 온갖 생필품을 차렸다. 종일 방 부엌 마루를 다니며 꿈적인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키워내며 먹고 입고 살아야 했다. 찔끔 오는 손님으론 감당하기 어렵다. 발버둥을 치며 애써도 등록금이 모자랄 땐 나가는 교회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겨우겨우 맞춰준다.
아이들 학비와 책값 잡비 대기가 이만저만 고생이고 걱정거리가 아니다. 귀엽고 깜찍한 내 새끼를 위해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리라.
“속곳이라도 내놓아야지.”
10만 20만 원이 아니다. 열 배를 훌쩍 넘기니 이를 어쩌나. 일 년에 두 학기는 왜 그리 빨리 다가오나. 여기저기 빌리는 것도 염치없다. 가까운 새마을 금고 이사인 정무상 장로에게 부탁해서 거금을 학자금 융자로 받았다. 조금 싸긴 해도 원금과 이자를 갚으려니 허리가 휘청한다. 제때 해 넣어야 하니 휘어질 수밖에. 또 내어 앞 빚을 막고 조금씩 갚아나갔다.
그러니 먹고 입는 것은 말해 뭐하나 엉망이다. 이렇게 찌들어서 살겠나. 집 앞 동성교회에 나가 엎드려서 울며 빌기를 거듭했다. 매일 새벽마다 나갔다.
“하나님 우리 딸 명옥이 아들 순길이 건강하게 잘 되게 해 주옵소서.”
세상 끝까지 전도하라는 말씀을 따라 찾아오는 구멍가게 손님들에게 하나님을 믿어 구원 얻으라고 권유한다. 하나둘 떠도는 영혼을 교회로 인도함이 수십 명이다. 놀라운 일이다. 평생 한 사람 전도하기 어려운데 금련이 하나님 말만 하면 따라나서니 말이다. 무얼 사면 이것저것 덤으로 싸 안겨줬다. 주일날 점심과 선물을 사 줘야 하는 등 뒷감당이 따른다. 어려운 형편에 이것 또한 부담이다. 어쩌다 밀양에서 온 손님을 받아 전도하게 됐는데 매주 연락해 오면 그리 반가울 수 없다. 가깝기나 하나 만나면 안고 보듬었다.
“아이고! 성님 반가워라. 잘 오셨어요.”
임직 선거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밀어서 권사로 올려 앉혔다. 전도부 일할 땐 그의 얼굴에서 천사의 미소가 흘렀다. 그래도 궁핍은 가시지 않고 그녀 엉덩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명옥과 순길은 청년부에 들어가 엄마처럼 열심이었다. 교회가 놀이터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아이들처럼 달랑달랑 뛰어다녔다. 몸이 왜소해서 가벼운가. 기쁨이 넘치는가. 늘 웃는 얼굴이다. 지나는 목사와 성도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는가. 모르는가. 아이들은 무탈하게 잘 자라줬다. 여자는 연약한 갈대여도 엄마는 질기고 강인하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아 들어갔다. 딸은 국어 교사로 근무한다. 아들은 울산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 어머니 곁으로 온다. 딸은 시간만 나면 여자라고 음식을 장만하면서 휴대전화로 레시피를 살핀다. 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다. 어머니 일을 조금씩 덜어주는 자녀이다.
“다 인사시키던데 너희 뭐 하노.”
걱정은 딸 아들 명옥이와 순길의 혼사이다. 결혼을 아예 하지 않으려 한다. 다 불혹이 넘었는데 말이다. 아들은 참한 색시가 있었다. 오래 사귀면서 결혼하자는 성화를 자꾸 늦추다가 그만 가버렸다. 집안 형편으로 식을 당장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충격이었는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았다. 날 두고 다른 남자 품에 간 서미연의 생각에 온몸이 떨리고 저리다.
“미연아 그리 가면 되나.”
어디서 그렇게 좋다며 따르던 사람을 만날까. 자신이 없어지고 허물어져 사는 게 시들해졌다. 커튼도 닫고 어둠침침한 방에서 종일 들앉아 삐쳤다. 점심을 만들어놨어도 챙기지 않고 그냥 남았다. 이러다 아들 망치겠다 싶은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떤가 싶어 가끔 아들 방에 들어가 보면 모로 누워 잠만 자고 있다. 쓸쓸하고 측은하다.
“아들 힘내어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좋은 혼처도 마련해 주시옵소서.”
마침 경기가 나빠 회사도 그만둔 상태여서 더 심했다. 하나님께서 간절한 나의 기도를 들으셨던가. 아들 회사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사과에 나와 보라는 전갈이다.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나아지기 시작했다. 툭툭 털고 일어나니 살만하다. 아들이 저러면 통 죽을 맛이었는데 다행이다. 명옥이도 여러 중매가 들어왔다. 특히나 해외 직원이었는데 될 듯하다가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다 잘 될 수는 없지만 가는 길이 자주 막히고 거치적거렸다.
‘낳아준 남잔 어디 가서 모습도 안 뵈나.’
‘혼자서 장구치고 북치자니 힘들어라.’
나 혼자서 발버둥을 쳐야 하나. 치고 북받쳐 밀어 올라오는 슬픔이 부득부득 미움으로 바뀌어 갔다. 아무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라앉히고 용서하리라 맘먹어도 아려오고 들쑤셔 부들부들 견딜 수 없다. 다른 여자와 함께 있을 거라 생각이 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찬물을 들이켜야 했다. 냉정이 착 까라져서 얼음장이 두껍게 깔렸다.
‘썰매를 탈 수 있는 내 가슴이다.’
이정수는 누가 세탁업을 하면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런대로 잘되는 수월한 빵 가게를 접고 업종을 바꿨다. 기계도 들여야 하고 낯선 일이어서 마음을 써야 했다. 세제를 한 통 넣어두면 저절로 들어가 우물쭈물 씻겨서 여러 번 헹궈지고 탈수가 돼 꾸덕꾸덕한 게 나왔다. 머리 위 천장에 주렁주렁 치켜올려 걸어놓고 그 밑을 지나치면 옷 마르는 상큼한 냄새가 좋다. 지저분한 옷을 빨아 반듯하게 다려놓으니 산뜻하다.
‘이런 일도 하다니.’
닥치고 만나면 다 하게 마련이다. 처음은 좀 엉성해도 이내 좋아져 갔다. 지선이 영어를 잘해서 곧잘 미국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손님도 많이 끌어들여 제법 이곳 사람이 되어갔다. 그런데 일이 고달프다. 뜸할 땐 찾아다녀야 했다. 또 다 된 세탁물을 갖다 달라는 사람도 있어서 겨울옷은 무거워 팔이 아프다. 찡찡거리는 손님이 나온다.
“옷이 구겨졌잖아요.”
“여기 땟자국이 보여요.”
매고 갈 때 조금 구겨진 것을 보고 다름질이 덜 됐다. 때가 그대로다. 하며 트집을 잡을 땐 난처하다. 흰옷에 기름 음식을 묻혀 벤젠으로 지워도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처음은 찢기고 다리다 태우기를 잘했다. 같이 넣었다가 물감이 배어들어 검붉은 얼룩도 생겼다. 잘못 가위질과 서툰 틀바느질로 끊어지고 어긋났다. 천연염색이 번져 섞인다. 물어주고 굽실대며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벗어놓곤 바삐 입어야 한다며 금방 해 달라는 성질 급한 사람도 있다. 풀빵 찍어내듯 냉큼 나오나.
‘장사꾼은 배알도 없다.’
시무룩하거나 몸살기가 있어 처지면 서로 냉랭해졌다. 음식도 간간해야지 싱거워 맘에 안 들고 손님과 응대하는 것도 너무 활짝 웃어 마음에 걸린다. 손도 까딱 안 하면서 시키려 든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것은 손수 갖다주면 좋겠는데 나만 부렸다. 맛있는 빵 먹던 일을 그만두고 낯설어 힘든 이 일하자는 게 걸렸는가.
‘겨울은 괜찮아도 여름은 열기로 푹푹 찐다 쪄.’
뒷짐이나 지고 엉성하다. 요령 소리 나게 일이 고되어 지쳐도 도울 생각이 없다. 웃음도 사라지고 짜증스러워 겨우 참고 산다. 터지기 직전이다. 이상하게 주인과 일꾼으로 바뀐 기분이다. 늘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다. 늦으면 서두르라 일컫는다. 영어를 잘한다고 막 부려 먹는다. 손님이 여러 벌씩 가져오면 뒤섞여서 가려내기 어렵다.
‘모자랄 땐 내 옷이라도 주고 싶다.’
한다고 하지만 비슷한 옷가지가 있어 어느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같이 바쁘게 일하다 보면 서로 얽히고설키는데 모두 내 잘못이다. 분통이 터진다. 왜 나만 잘못인가. 미루고 떠넘기는 데는 일등이고 이골이 났다. 말썽이 생기고 말았다. 옷이 바뀌어서 야단났다. 비싼 옷인데 비슷해서 다른 사람이 갖고 갔다. 나보고 그랬다며 화를 내자 올 것이 왔다. 세상엔 너뿐이다. 없으면 죽고 못 살겠다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 그러잖아도 이래저래 뒤틀려 살기 싫던 차에 잘 됐다. 이렇게 고달파선 사랑이 무슨 얼어 죽을 짓이냐 시답잖다.
“너 갈 대로 가라.”
대판 싸움이 있고 그날 저녁부터 이것저것 옷가지를 챙겼다. 헐값에 팔아치우고 반반으로 나누었다. 자식이 없으니 헤어지는 것도 간단하다. 대개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울 것 같았는데 의외로 쉽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라더니 그동안 쌓은 정이 얼만데 이리 허물어지나. 떠날 때 처자를 뿌리친 죄의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괜히 그랬나. 참을 걸.’
그나저나 나 어디로 가야 하나. 만고강산에 아는 사람이 없다. 말도 잘 안 통해 꿀 먹은 벙어리로 기웃거리며 다녔다. 희망교회 목사 말씀 따라 좀 나을 거라는 곳을 다녔다. 여러 날 떠돌다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한인 거리와 차이나타운을 힐끔거렸다. 몇 며칠을 돌아다니며 기웃하다가 캘리포니아주 중앙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갔다. 다 사람 사는 곳이어서 살만한가 싶었는데 막상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소도 등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교민이 많아 아는 사람을 만나서 기댈 것으로 여겨졌다.
‘이 많은 사람과 건물이 즐비해도 맞는 사람 의지할 곳이 없구나.’
영화로만 보던 교각 없는 현수교 금문교를 지나면서 처지를 추슬러 보았다. 오나가나 복작복작 사는 게 부산스러움을 갖게 한다. 마음 맞는 사람과 편히 살 곳이 어딨나. 내 맘도 몰라 방황하는데 그런 사람과 마을이 있겠나.
‘언감생심이지.’
‘아니, 나만 그렇지 다들 잘 살아가는구만.’
이번엔 옷가지를 파는 난전 장사를 차렸다. 사람이 잘 다니는 길목이나 다리 난간에 걸어두고 찾는 사람에게 팔았다. 부유한 나라여도 가난한 사람이 있어 싸구려 옷도 사 입었다. 거저 가져오는 싼 옷이니 이문이 꽤 남는다. 늦을 때는 배터리 등불을 밝히고 장사했다. 오면 팔고 안 오면 안 파는 배부른 장사다.
‘내가 지나는 사람 보는지 그들이 날 구경하는지.’
의자에 앉아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구경하는 거다. 배고프면 빵으로 주전부리한다. 만고에 편하다. 오래 묵어 딱딱하거나 검은 반점이 생기는 부패한 빵 먹는 것도, 옷이 바뀌었다고 난리 치는 세탁일과는 달랐다. 여러 벌 지고 아파트를 오르내리려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점포를 얻을 필요 없고 나무 기둥에 아무렇게 싸서 묶어뒀다가 다음날 풀면 된다. 잠은 단칸방을 얻어 들어가 고단한 몸을 눕혔다. 한 몸 먹고 살아가기는 영 쉬웠다.
‘이래 봬도 의류 상사 사장이다.’
반지르르 입고 서성이면 멋스럽기도 하고 장사치가 아니라 사장이란 칭호를 듣는다. 비 오거나 바람 불고 추울 땐 쉬었다. 뭐 대수라고 악착같이 일할까. 대놓고 자릿세 내놓으라는 사람과 껄렁패가 나타나 찡찡대는 일이며 시샘하고 밀어내려는 같은 업종도 없다. 한적한 드넓은 바다에 고기가 퍼덕거려 막 퍼 올리면 되는 블루오션이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 나올라.’
어떤 여자가 찾아와 이 장사를 어찌하면 되냐고 물었다. 물건을 떼는 곳과 장사하는 기법을 알려줬다. 같이 가서 사고 옆자리에 걸쳐서 널어 파는 일을 쉽게 했다. 조금 해본 사람 같았다. 이제 친구가 생겨서 심심치 않아 좋다. 잠시 자릴 비워도 옆에서 봐주니 한결 일할 맛이 난다. 다리 양쪽에 예쁜 옷가지를 펼쳐 놓으니 그림을 전시해 놓은 것 같다. 팔랑팔랑 옷들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니 어서 오라는 손짓처럼 귀엽다.
‘경쟁인데도 되레 친숙해졌다.’
오가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아래는 냇물이 흘러 촐랑촐랑 노랫가락이 들린다. 얼마냐고 물어보며 지나치는 사람이 많지만 사겠다는 이도 다문다문 있다. 재미가 쏠쏠하다. 맞은 편은 예쁜 여자이니 지나가는 사람이 많을 땐 백화점이나 할인 상가처럼 붐빌 때도 있다. 누가 카드를 내겠나 알아서 다 현금을 주고 간다. 윤정자는
“좋은 자리여요.”
무엇보다 말할 사람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살다가 열게 됐다. 난간에 앉아서 서로 넘겨보며 얘길 주고받았다. 같은 가게가 생기면 장사가 어물 줄 알았는데 잘 됐다. 그냥 지나치던 길손이 머물면서 몸에 맞는 옷이 있나 살피며 갔다. 한쪽만 보던 게 양쪽을 살폈다. 저쪽에 팔아줘도 기분 좋다. 내 쪽에 손님이 오면 생글생글 웃으며 잘되길 바라는 눈치다.
‘이런 여자를 만나다니-.’
한인들이 모이는 소명교회에 나갔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믿음으로 살리라. 동포를 만나 살아가는 정보도 들어야 했다. 이 사람 저 성도를 많이 사귀는 게 좋다. 울타리가 되고 힘이 되는 동족이다. 교회 행사에 참석하고 매주 헌금과 월말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다. 주일 낮 예배를 드리고 오면 발걸음이 가볍다.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를 내는 믿음 좋은 금련을 봐왔기 때문이다.’
반짝하는 주말 손님이 많은데 평일만 나가 일한다. 교회에 나가야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세탁일로 진저리가 났다. 여유롭게 살아야 했다. 평일 일도 피곤해 몸이 무거울 땐 안 나간다. 그녀도 가끔 빠진다. 친구를 만난다며 어디를 간다고 했다. 다음날 보면 윤정자가 펼쳐 팔아주고 돈도 모아놨다. 그러니 나도 그녀 쉴 때 도와야 했다. 남들 보면 부부처럼 보였다. 생판 남남이다. 어디서 떠돌다 나타난 지도 모른다. 여자에 데어 벗겨진 나는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다 멋대로 사니 그렇고 그런 사람이다.
한번 정자집에 가 본 적이 있다. 문설주가 떨어져서 삐걱거린다기에 고쳐줬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오늘은 친구 집에 갈 일이 생겨 못 나가요.”
마치고 들어가니 빨래하고 있다. 내 집 문을 어찌 열고 들어왔다. 어지러운 집 안을 깨끗이 치우고 반찬거리를 만들어놨다. 저녁상을 차렸다. 벗어놓은 옷을 제때 씻어야지 오래 뒀다고 뭐라 한다. 반찬도 가게에 가면 많은데 골고루 찾아 먹잖고 편식이라며 꾸중이다. 귀찮아서 대충 라면으로 넘기면 안 된다고 마누라처럼 잔소릴 했다.
“일 보고 지나치다가 들렀어요.”
집으로 데려 주는데 살래살래 걷는 게 귀태가 났다. 팔짱도 살짝살짝 끼면서 애교 띤 웃음이 멋스러웠다.
‘무엇에 홀렸나.’
고희를 넘긴 나이에 이게 뭔가 이정수는 고향 생각이 자꾸 나 견딜 수 없다. 몸도 전만 못하다. 당뇨가 와 혈당 수치가 높아만 간다. 어떨 땐 당화혈색소가 10 가까워 위험 수위를 넘어선다. 위장도 변변치 못해 자주 체한다. 십이지 궤양이 있어 쓰릴 때마다 약을 먹는다. ‘꼭 오세요’ 하던 금련의 생각이 났다. 부모도 돌아가시고 형제도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다. 맞이 노릇 못하니 버린 모양이다. 집안에 망나니다. 어릴 때부터 말썽이더니 끝까지 애를 먹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주책이고 늙어서도 철딱서니 없다.’
돌아가고 싶어도 쉴 집이 있나. 아는 친척이 반겨주겠나. 난감하다. 이대로는 마냥 안 되잖나. 어찌해 봐야 할 것 같았다. 하늘이 더 높아만 뵈고 아득하다. 살던 곳엔 다시 들어가지 않는데도 그곳이 자주 생각났다. 정들면 고양이라 해도 여긴 아니지 않은가.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다 떠돌이 방랑 신세가 되었다. 이러다 병들고 죽으면 누가 알아봐 주나.
소각해서 강이나 바다, 산기슭에 뿌릴 것이니 세상에 살던 이정수 모습은 그만 간 곳 없어라. 정신이 번쩍 들어 마음을 정하게 됐다. 잠시 만나 의지했던 윤정자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향길에 올랐다. 갖고 갔던 돈도 다 소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비렁뱅이 탕자를 맞아 암소를 잡을 사람이 없다. 흰 머리털 날릴 부모가 안 계시니 허전하다. 남처럼 살아온 형제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몫의 재산이 있을까.’
그래도 금련에게 한갓 희망이 깔렸다. ‘오세요’ 한 말이 맴돈다. 그걸 믿고 싶다. 아내는 날 몸서리를 내겠지만 명옥과 순길이는 덜 하겠지. 가냘픈 줄을 잡아본다. 젊을 땐 내랍시고 살다가 늙바탕이 어려워진다.
많이도 바뀌었다. 그때가 옛날이다. 너무 변해 어디쯤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시청과 법원, 여자고등학교 등 아는 건물들이 다 어디 가고 없다. 영도다리 외에 늘씬한 다리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높이 치솟은 용두산 전망대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동대신동 낯익은 집들을 살폈다. 순길과 명옥이 뛰놀던 집 앞을 찾아봤다.
여러 날 어정거리다가 용기를 내 들어갔다가 당장에 쫓겨났다. 물바가지를 덮어쓰지 않아 다행이다. 딸 아들에게도 찾아갔지만 거들떠보지 않았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져 옴을 느꼈다. 뒷산 언덕을 올라 중구 일대와 영도구, 서구를 휘휘 둘러봤다. 눈에 익은 구덕산과 천마산, 봉래산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다. 북항과 남항, 외항이 출렁이며 들어오고 나가는 배들로 붐볐다. 하릴없이 마냥 멍하다가 터덜터덜 걸어 내려 남포동과 자갈치를 다녔다. 그 많은 지나치는 사람 중에 어쩌면 이렇게 아는 사람 없을까.
‘곰장어 구이를 먹자.’
석쇠에 꾸물거리는 자갈치 길거리 가게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말끔히 정리해서 깔끔하고 단장한 부두로 바뀌었다. 비실거리고 맴돌면서 달포를 보냈다. 지하철을 타고 노포동 종점까지 갔다 오길 여러 번이다. 차장이 ‘오라이’하며 두드리던 만원 버스가 안내원 없이 냉난방으로 한산하고 안락해졌다. 정류소마다 편한 의자가 있고 앉으면 엉덩이가 따뜻하다. 오는 것이 화면에 나타났다. 저게 맞을까 대충이제 했는데 정확하다. 지하철과 버스 도착을 알리는 방송도 나온다. 미국보다 편리한 사회 서비스다.
‘내가 들떠 돌아다니던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나.’
금련도 늙어가는가. 여기저기 쑤셔 성한 데가 없다. 자꾸 슬프고 불안한 생각으로 울적한 마음이 차오른다. 바삐 지나면서 여기까지 온 줄도 몰랐다. 자녀도 다 커서 저 앞가림을 할 수 있다. 이제는 그 지겨운 잡화상을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중개소에 내놨다. 마칠 때마다 문고리를 잡고 어루만지면서
‘고맙데이 고마워’
그동안 아이들도 제각기 저금해 모아 합쳐 작은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게 됐다. 은행에 빌린 모자라는 건 살면서 갚아나가기로 했다. 바로 옆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세 칸에 따로따로 들어가 살 수 있다. 비좁은 데 거처하다가 좀 작긴 해도 속이 후련하고 탁 트인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우중충한 단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아파트가 다닥다닥 붙어 올라서
‘벌집같은 집이라 했는데 살아보니 근사하다.’
‘겨울 춥고 여름 더웠던 엉성한 단독에서 어찌 살았나.’
자녀가 집을 마련하니 세상에 이런 날도 오나. 길거리 가게와 거처를 팔아 먼저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바쳤다. 빚을 모두 갚아버리고 명옥과 순길에게 1억씩 주어 저금하게 했다. 더 모아 결혼해서 각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종잣돈이 되게 했다. 그동안 빌리고 아쉬운 소릴 했던 일들을 돌려줘야 한다. 도움받은 것들이 쌓였는데 하나하나 나서서 되돌려야 했다. 모임에서 분할만 냈지 선뜻 먼저 다 내보기는 어려웠다.
‘지금부터는 내가 모두 내련다.’
사람들이 놀란다. 어찌 된 일이냐고. 어딜 가거나 아무리 많고 비싸도 누가 먼저 낼까 봐 들어가면서 영수증을 받아 챙겼다. 선물을 가져오면 더 좋은 것으로 사 안겨줬다. 사람이 확 바뀌었다. 지난날 아등바등하던 금련이 아니다. 비록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하진 못했지만 딸 아들과 행복하게 한집에서 사는 게 이만저만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장사하느라 내 머리는 헝클어졌다. 예쁜 물감을 들여 곱게 단장해 봤다. 옷도 말쑥하게 입고 다녔다. 퇴임했어도 권사 직분을 충실히 했다. 전보다 더 노상 전도 활동에 힘썼다. 평생 선교에 온 심혈을 기울이는 안 권사와 함께 평일을 정해 나가 거리에서 찻잔을 돌리고 전도 용지를 안겨드렸다.
“따뜻한 차 한잔 드시고 읽어보세요.”
추웠던 세상이 포근한 양달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말수 적고 무뚝뚝한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묻어나왔다. 입가 언저리에 비로소 웃음이 번진다. 그러나 늙음을 어찌할 수 있겠나. 뼈마디마다 들쑤셔 아니 아픈 데가 없다.
‘자주 병원에 가 처방전을 받았다.’
제대로 못 먹고 쉬지 못해 몸을 빨리 부서지게 했다. 좋은 때가 왔어도 누릴 수 없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명옥이와 순길이 장성해서 함께 지나는 일이 꿈만 같다. 내일 눈을 감아도 난 여한이 없어라.
감독에게 다가가
“일할 수 있을까요.”
일하던 사람 아닌 것 같은데 험한 공사장에 나오겠냐고 물었다. 이정수는 아파트 작업장에서 철봉 지주대를 모아 한 곳에 쌓아놓는 일을 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자녀 집을 두고 늙은 몸을 움직여나갔다. 여름철은 아무렇게 끼니 때우고 공사장 구석에 자리 깔고 눈을 붙였다. 갈아입을 옷 가방이 전 재산이다. 안거나 베개로 삼았다.
당뇨약을 타와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소주와 막걸리가 싸기도 하지 이러니 술꾼이 늘어나는가 보다. 공사 현장을 정리하는 날품팔이 막노동 뒤에 둘러앉아서 술잔을 비우는 재미가 기막히다. 취해 떨어져 자면 어슴푸레한 새벽에 깨어난다. 담배를 피워물면 연기가 맛나다. 후 내뿜으면 속엣것이 다 날아간다. 깔삼한 여인과의 쓰잘데기없는 짓거리와 학비 보내겠다는 빈말이 옹기종기 흩어졌다. 회한이 서려 둘둘 말린 연기가 치뺀다.
“아버님 어머님 용서해 주셔요.”
또 산소를 찾아갔다. 일이 없거나 궂은날은 쉰다. 그때 잘 가는 곳이 고향 뒷산 무덤이다. 아침저녁 문안 인사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부모 모시듯 했다. 잔디에 앉아있으면 참 편하다. 미국에서 교회 예배드리고 나면 안정되듯 고향에선 묘소를 찾으면 안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정말 부모님이 못난 자식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다. 여러 해 공사장에 벽돌 나르는 일을 하고 부두에서 비릿한 고기 상자를 나르는 것이 모두 익숙해졌다.
아내와 자녀가 내치고 반색하지 않아 당황했다. 그래도 가까이에서 훈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게 즐거움이다. 언젠가는 굳은 마음이 누그러지겠지. 매일 힘든 일을 잘 이겨낸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변함없는 반석 같은 나의 가족이다. 그냥 이리 살아도 좋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만 해도 가슴이 따스하다.
겨울이 오니 차가운 날씨에 지나기 어렵다. 먹고 자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저절로 자라던 곳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얘들아 봄에 또 올게.”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이순길 앞으로 왔다. 뜯으니 순길 이름의 은행 통장과 등기필증이 들었다. 등록금에 보태쓰라는 간단한 인사말의 글씨가 보인다. 주소는 진해라고만 적혔다. 소인은 웅천으로 찍혔다.
“무슨 등록금을 ---.”
가게를 찾아왔을 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드릴 걸, 왜 왔으며 몸은 어떤가. 물어나 봤으면 좋았을 걸 뒤늦게 걸린다. 가족 선산이 있는 웅천 앞 괴정이다.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이다.
수도 주위는 바닥 흙을 빨아올려 매립해 어촌이었던 곳이 드넓은 육지로 변했다. 부산신항 확장 부두가 들어설 예정지로 작은 골짝 골짝에는 아파트 단지와 주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한참 찾아 산을 오르다가 조부 무덤 아래 산불 예방 초소에서 쉬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사람이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이씨가 자주 찾아와서 쉬었다가 가곤 했단다. 요즘은 이곳 초소에서 교대로 일한다며 저 아래 바닷가 사는 집을 가리켰다. 얼굴이 닮아 이정수 아들임을 당장 알아챘나 보다.
“이 아래가 동생들 한데서 되돌려받은 장남 몫의 땅이라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는 잡풀 하나 없이 정갈하다. 돌아가신 부모를 정성껏 보살피는 뒤늦은 시묘살이 효자 아버지 모습을 보게 됐다.
산길을 내려 밭둑을 걸으니 길섶에 쑥이 쑥쑥 고개를 들고 냉이가 뿌연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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