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야만적인 8.18도끼만행사건 43주년 추모식이
2019년 8월 27일 JSA 지역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한, 미군 관계자와 유족은 물론
당시 중대장 김문환(육사 26기)님과
광화문 동화광장에서 구국활동에 여념없는
일파만파 김수열(육사 33기)회장 일행이 참가하여
한.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
8.18도끼만행사건 43주년 추모식(19.08.27)
김문환 대위
전시실 표시
위
하얀색 헬멧을 쓰고 북괴군 놈들과 일전을 벌이는 이가 당시 김문환 대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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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북한군(北韓軍)은 미군장교(美軍將校) 2명을
도끼로 찍어죽이는 야수와 같은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이들은
같은 민족, 동족(同族)이라 할 수
없다!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까지
만들었던
북한을 경계하며,
한미동맹을 우려한다!
"우리는 자유(自由)와 행복을
보장하는
안정된 한미연합의 국방태세를
원한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
"북한의 위장평화(僞裝平和)
쇼에
속아
국군
무장해제(武裝解除),
국가안보를 무너뜨리는 문정권을
규탄한다."
소리장핵[笑裏藏核]
'김정은 웃음 속에 핵폭탄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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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경비구역(JSA) 인근 상황도
▲ JSA내 제3초소에서 바라본 전망. 왼편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유엔사 관할 초소와 북측 초소가 보인다.
◆ 사건 개요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당시 UN군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약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여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 없었고, 북한군에 의한 미군의 납치를 우려하여 이날 가지치기 작업을 수행한
것이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15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11시경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몽둥이와 UN군측 노무자들이
나무 밑에 두었던 도끼 등을 휘두르며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미군대위와 소대장 바레트 미군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명, 한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휴전협정 조인 이후 23년만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 캠프보니파스 대위를 공격하는
북한군
▲ 유엔군을 계속 공격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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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한반도는 즉각 긴장상태로 달아올랐다. UN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던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 : 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하고, 미군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미루나무 절단 작전 때에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까지 올라갔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로 인민군과
예비군격인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북풍 1호(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긴급참모회의를 열고, '워싱턴특별대책반'을 구성하여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고, 1976년 8월 21일 아침 7시에 강력한 무력시위를
동반하여 전격 단행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무력시위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다. 그야말로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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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나무 절단작전'과 판문점의
분단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는 태권도 유단자로 구성된 한국군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투입되었고, 1사단
수색대도 참여하였다. 당시 특전사 장병들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담당하였다.
작전 종결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북한의 유감표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이후 북한군과 UN군사령부는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 제446차
비서장회의에서 판문점 '공동경비'를 군사분계선에 따라 '분할경비'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
2002년 한국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짧은 방한 기간중 특히 비무장지대(DMZ)에서 불과 100m 떨어진 미군 초소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북쪽 건너편 ‘평화박물관’을 바라보는 부시 대통령에게 미군 부대장이 “저곳에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 북한군이 사용했던 도끼가 전시돼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내가 저들을 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혀 잘못이 아니었군(No
wonder I think they’re evil)”이라고 했다. 또 기자들이 “북한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뜬금없이
“우리는 준비가 돼 있다(We’re
ready)”고 했다.
▲ '돌아오지
않는다리'-79년 8월 18일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넘어왔던 다리.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통해 출입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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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미루나무 도끼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들의 추모비.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의 남측 지역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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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서 희생된 보니파스 소령
가족
(2015년 8. 18.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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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산역에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친필사인이 된 철로 목책이 전시되어 있고 연설문 전문도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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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수만도 못한게
저들입니다"
8·18도끼만행 산증인
곽희환씨 (국방일보 1999/08/18(수)
“어느덧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잔악한 북한군의 만행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 몸이 떨려옵니다.”
전세계를 전율케 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북한군의 만행을 지켜
보아야했던 곽희환씨(64·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게 세월은 결코 `약'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닙다. 야수만도 못한 게 바로 저들입니다.”
60년 제대하자 마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노무자로 취직한 곽씨는
당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하던 노무자 5명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우리 작업반의 도끼를
빼앗아 인솔책임자인 미군 대위의 머리를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북측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후 20여년동안 노무자로 근무했지만 곽씨는 당시의 충격으로
심장병과 당뇨를 얻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곽씨는 “저들이 스스로 변화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우리군이 강력한 국방력을 구축할 때 저들의 야욕을 꺾고 대망의 통일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길지 않은 짧은 인터뷰를 마치며 곽씨는 이것 하나만은 장병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우리의 敵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北韓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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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절단작전에 참전했던 어느 특전맨의
회고
약 2시간 30분 동안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용맹스런 특전용사들의 민첩하고 과감했던 작전수행은 가히 한편의 입체적인 드라마였다고 자부한다.
만약
당시 북괴군이 경계선을 침범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고 잔인한 보복을 가했을
것이다.
당시
여단장으로서 미루나무 제거작업을 총지휘했던 前육군참모총장 박희도님께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라는 생생한 회고록을 출간하여 더욱 감회가
새롭다.
박희도님은 출판기념회에서 전쟁 일보직전까지
내달은 작전을 회고하면서 필사즉생의 각오로 걸어온 군인의 길 가운데 가장 특별한 감회와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었다며 화약고의 도화선 같은 현장에서
생명을 걸고 부하들과 임무를 완수했던 상황을 우리들의 지표로 삼아 산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이렇듯 군인으로서 최고의 임무는 어떠한 적의 도발로부터도 목숨
바쳐 조국을 수호해야 하는 것이다.이를 위해선 직속상관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아래 골육지정으로 굳게 뭉친 최정예 특전부대임을
재인식하고, 「충성」, 「명예」, 「단결」로 언제 어디서 어떠한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굳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월남 참전, 그리고 지금까지 특전사
생활, 군인의 길로 들어선지도 어느덧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 최정예 특전맨이
될것이다. http://www.blackberet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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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일파만파
단톡, 오마이뉴스, 주간동아, 국방일보등 인터넷 게시글 편집) (그림출처 :
일파만파,
https://blog.naver.com/joo99416/220827747382, 뻘글 집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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