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태종 야율덕광.(902-947)
그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둘째 아들로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 이어 거란의 제 2대 황제로 즉위, 거란 제국(契丹 帝國)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거란의 명군주이기도 하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대진국 정벌 도중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926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947년까지 21년간 황위에 머무르면서 국내외에서 여러 치적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야율덕광 그가 세상을 떠난 나이는 마흔 여섯, 어찌 보면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많지도 적지도 않는 나이인데, 그는 왜 갑자기 죽었을까?
이제 그 의문을 풀어 보고자 한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에 의하면 야율덕광 그는 947년 여름, 살호림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사의 기록과 당시 여러 정황을 살펴보아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으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 요사를 토대로 하여 거란 태종 야율덕광 죽음의 의문을 풀고자 조심스러운 가설을 세우면서 그 의문을 하나씩 이 글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여, 거란 태종 야율덕광 즉위 후의 요사 기록들을 중심으로 하여 필자 나름대로 추리해본다.
947년 3월 상주에서 머무르던 거란군 수백명이 한족(漢族)들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거란 태종 야율덕광은 손수 대군을 지휘하여 상주를 공격한다. 상주 전투.
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던 거란 태종 야율덕광은 거란 황도 상경임황부로 회군하던 중 살호림에서 갑자기 급사하고 만다.
이에 거란의 술율태후術律太后(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모후이자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부인)는 급히 국상을 준비하는 한편, 거란 제국의 차기 황제로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동생이자 야율아보기의 셌째 아들 야율이호(耶律李胡)를 즉위시키기 위해 급히 상경임황부로 회군한다.
상경임황부에 돌아온 술율태후는 거란 황제의 죽음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야율이호,강묵기(姜默記),고모한(高模翰) 등 몇몇 최측근들과 함께 극비리에 국상을 준비한다. 하지만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항주를 지키던 영강왕 야율올욕-야율원-(耶律兀欲-耶律院-)에게도 전해지고 만다. 여기에 등장하는 영강왕 야율원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큰 아들이자 거란이 대진국(발해)를 정복한 뒤, 대진국 옜 땅에 건설한 거란 분국 동단국(동쪽의 거란국,東丹國) 황제
야율배(耶律倍)의 아들이다.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조카가 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 소식을 부관으로터 전해듣자 국상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임황부로 올라가려 하나 술율태후와 야율이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알수 없지만 군대를 급파해 그의 상경을 막았다.또다른 설로는 항주가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상경을 막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러자 그는 대노하여 항주를 야율마답(耶律摩遝)과 야율충(耶律忠) 두 사람에게 수비하라 한뒤, 측근장수들을 거느리고 기습적으로 상경임황부를 강타한다. 야율마답은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사촌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상경임황부를 공격하여, 점령한 그는 우선 군사들을 보내 술율태후와 야율이호를 별궁에 유폐하고, (일설에는 이 두 사람을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묘에다 가두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것은 알수 없음.) 자신의 반대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마침내 영강왕 야율원은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거란의 제 3대 황제 세종이다.
거란 세종 야율원, 그는 이렇게 피를 부른 가운데 즉위하며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황제로 즉위하자 얼마뒤, 자신의 숙부 야율이호를 참수하고, 자신에 맞서는 반대파들을 대거 학살한다.
그리고 군권을 장악 중이던 거란의 개국공신 강묵기를 불러, 군권을 거두어 만약의 상황을 차단하는 한편 정사령 한휘연(韓暉然?)과 한고지(韓古支?) 등 또다른 개국공신들 역시 불러 들인다.
그러나 정사령 한휘연과 한고지는 어떤 이유인지 알수 없지만 계속 기용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그 이유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거란 역사상 첫번째 혁명은 적지 않은 피를 뿌린 가운데, 이렇게 마무리되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드는 부문은 남아 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았는데, 이제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어 보고자 한다.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죽음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거란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 글에 적는다.
926년 대진국 정벌 도중 야율아보기가 세상을 떠나자, 술율태후는 부여성에서 여러 거란 장수들과 거란 황족,거란군들을 불어 모은 가운데 손수 말 위에 오른다.
그리고 두 필의 말을 준비해 야율아보기의 두 아들 태자 야율배와 야율덕광을 말에 오르게 한뒤, 거란군에게 말하기를 "나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하고 아낀다. 두 아들 중 누가 거란 제국을 이끌어 가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말하자 술율태후의 의중을 읽은 강묵기 등 몇몇 장수들과 황족들이 야율덕광이 타고 있던 말을 지목했고, 이 결과 야율배는 태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거란 분국 동단국의 황제가 될수 밖에 없었고, 야율덕광은 거란 황제로 즉위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보아 야율덕광과 야율배의 갈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거나, 이 때를 분기점으로 양 측의 갈등이 깊어졌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서기 928년, 대진국 유민들에 의해 후발해국, 정안국 등 여러 대진국 후국들이 속속 건국되는 등 대진국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저항이 요원의 불곷처럼 크게 번지자 거란 태종 야율덕광은 동단국의 황도를 거란 제국의 5경 중 하나인 동경요양부로 강제 천사하기로 생각하고, 군대를 보내어 동단국 황도 상경용천부(홀한성)를 불태우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한 끝에 동단국 황도를 강제 천사시킨다.
동단국 황제 야율배는 이 사건 뒤 얼마되지 않아 후당(후당 명종의 치세기?)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후당에 망명한지 6년 뒤인 서기 934년, 후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니 야율배의 나이 이 때가 겨우 39세였다.
일설에는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자객을 보내어, 제거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아무튼 동단국 황도의 강제 천사는 이는 야율배가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패했다는 의미로도 볼수 있는 사건이 아닌지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본다.
아무튼 이 설이 사실이라면 야율배의 아들 야율원은 거란 태종 야율덕광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몇 가지 역사적 사실 등을 토대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면 야율배와 야율덕광은 사이가 좋지 못한 관계였으며, 술율태후 역시 야율덕광과 야율이호를 야율배보다 더 신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이들간에 피비린내나는 정쟁이나 권력 다툼도 벌어졌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을지 모른다.
결국 이것이 거란 최초의 역성혁명이란 비극을 부른 이유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 때문에 거란 태종 야율덕광에게 자객을 보내 살호림에서 거란 태종 야율덕광을 제거하고, 국상 참여를 근거로 황제 자리에 오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느 기록에는 영강왕 야율원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엇고,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 보자면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아들들이 어린 상황이라 차기 황제 자리는 야율원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술율태후가 야율이호를 밀어주려 하자 이에 반발한 영강왕 야율원이 결국 극단적인 극약 처방을 한 것이란 말인가?
역시 진실은 알수 없다.
아무튼 거란 태종 야율덕광, 그는 과연 요사의 기록대로 병사했던 것일까?
아니면 거란 세종 야율원의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인가, 그 모든 의문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잘 알수 없지만 초기 거란사의 의문 중 하나라고 보여진다.
이 의문을 풀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가설은 차후 기회되는 대로 조금씩 요사와 대요국지,거란국지 등을 참고해서 앞으로 수정 및 보완할 계획입니다.
추신:거란사(요사)를 공부하다 생긴 의문을 바탕으로 제 가설과 추측을 넋두리 비슷하게 좀 적어보았습니다.
급히 쓰다 보니, 글의 두서가 없ㅁ는 듯 합니다.
추신2: 여담이지만 거란 세종 야율원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야율마답 역시 야율원에게 제거됩니다.
이유는 군사요충지를 적에게 빼았겨서 군법으로 참수되었다고 하지만, 또다른 추측으로는 야율마답의 정치적 보복 등을 두려워해서 야율마답을 제거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 봅니다.
야율원이 거란 황도 상경임황부로 상경 당시, 항주는 야율마답과 야율충,한림학사 서대목?(徐大穆?) 그리고 이한(李澣)과 거란황족 소한(蕭翰) 등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야율마답이 패하여 황도로 돌아오자 거란 세종 야율원이 화가 나서 독주(독이 든 술)를 강제로 먹여서, 죽였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적 바랍니다.
좀 더 공부해서 수정판을 올릴때 참고할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오래 전에 다른 카페 등에도 올린 글이지만 이 곳에도 한번 더 올려봅니다. 보잘것 없는 글이라, 죄송합니다.
대단하신 글이군요...隱居野人님은 역사추리소설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분이시군요..부럽습니다.앞으로도 이런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시기를 기대합니다..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