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의 밤이다. 저 멀리 높은 아파트 들이 불빛을 밝히고 있다. 마치 먼 외계에서 이제 막 도착한 미확인 비행 물체 같다. 그 위의 암적색 하늘이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눈 아래 젖은 숲들이 웅크리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가로등 불빛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도 숲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따금 나무들 사이로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질주 음이 촉수를 뻗쳐 온다. 밤도 축축하게 젖고 나도 젖는다.
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밤의 중심에서 섬섬옥수 하나가 슬며시 뻗어 나와 내 지친 어깨를 쓰다듬는다. 세상일에 찌든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밤의 손에서 유아기의 젖 냄새가 풍긴다. 그 비릿함 속으로 온몸이 스르르 녹아든다. 유년의 투명한 풍경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다듬이질 소리도 아슴하게 밀려온다. 밤의 속성은 모성이고 안온한 자궁 속이다. 숲 아래에서 웃음소리 하나가 후드득 일어난다. 그 웃음은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