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그리운 장마 <br> <br>박정원 <br> <br> <br> 처절처절 내리는 빗물에 거미줄이 젖는다 거미줄을 지키는 거미도 젖는다 <br>달개비도 야윈 몸을 축 늘어뜨린다 장독대의 봉숭아가 젖는다 회양목을 휘휘 <br>감고 돌던 나팔꽃도 젖는다 아직 피지 않은, 시집가서 온 삼년 소식 없는 누나 <br>의 과꽃이 젖는다 멍석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가 젖는다 날아다니던 고추잠자리 <br>날개도 젖는다 담벼락이 젖는다 호박잎도 호박꽃도 젖는다 황토물이 흐르는 <br>개울 건너 순이네 나락이 젖는다 논두렁을 지나 감나무집 초가지붕도 젖는다 <br>밥을 짓는지 잿빛 저녁연기도 젖는다 동네 초입 둥구나무가 젖는다 둥구나무를 <br>지나 학교운동장이 젖는다 교실이 젖는다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 안에서 소년이 <br>치는 풍금소리가 젖는다 갑자기 물비린내가 나더니 미루나무가 세차게 몸을 떤다 <br>은사시나무이파리도 덩달아 몸을 뒤집는다 미꾸라지 몇 마리 학교운동장에서 <br>파닥거린다 그 소리 위에 소리 옆에 소리 밑에 소리 속 뿌리까지 젖는 마지막 <br>몸부림, 어스름 6시의 땅속이 젖고 젖어 마침내 그대로 멈춰버린 그림, 내 생애 <br>최고의 날은 늘 젖어 있었다 한번 젖은 눈은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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