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선인장(어울문학동인 제14집)/
어울문학동인
날씨가 좀 풀린 듯하다.
오래간만에 오랜 지인들과
아침 겸 점심식사 약속을 했다.
지난여름 내내 분주하게
사느라 거의 반 년 만에 이루어진 회동이었다.
흘려버린 시간들이 무색하게
우리는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알 게 모르 게 맘속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환한 햇살 속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나의 주변엔
이렇게 내게 에너지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
한때는 어울문학동인도 내게
끊이지 않는 에너지를 나눠주던 귀한 인연이었지만 이젠 그저 흘러간 한 시절의 옛사랑처럼 씁쓸하고 쓸쓸한 기억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거르지
않고 매년 내놓는 동인지를 받으면 기쁘고 반갑다.
손끝에 박힌
가시 찾아 더듬는 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더 무서운 법이다
한 마디 툭
던져놓은 그녀
[page12
전은희
‘손바닥
선인장’일부]
작년의 동인지 ‘냉담’에 실렸던 시들에 비해 올 해는 많은 시들이 무척
달라졌다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아무쪼록 내년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발전된 모습을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해본다.
여당
골수분자이자 박정희 신봉자였지만
집에선
재야인사였던 아버지
(중략)
나를 김선생이라
부르며 용돈을 요구하던
촉 닳은 만년필
외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page24
김미옥
‘정치적인
아버지’일부]
어울문학 동인들 중 가장 선방을 하고 있는 시인이
김미옥 시인이 아닐까싶다.
근래들어 그녀의 시들은
세련된 언어와 탄탄한 사고를 바탕으로 변모하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새내기
시인이 아닌 본인의 영역을 다진 시인으로 우뚝 서리라고 믿는다.
비워낸
속으로
다시 고이던
눈물
우물
속으로
다시 고이던
슬픔
오랜
시간
털어내지 못한
비밀이었다.
[page40
박영옥
‘우물’일부]
숲길은
구좌에서 한 천
년쯤 걸어갑니다
가끔
낡은 사유의
가지를 긁적이는 허구를 지나
바람
속에서
또 이따금
돌담집 개 짓는 소리
[page95
심응식
‘비자림을
지나며’중
일부]
전은희,
김미옥,
박영옥,
심응식 시인의 시들은 무척
다르다.
그러나 다르면서도 일변
비슷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서 차별화면에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박영옥 시인의
시는 예전의 시와는 전혀 새로운 시를 만나게 되어서 놀라웠다.
박영옥 시인의 변화가
어디까지일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싶다.
대낮에도 별이
반짝였다
비 오는
날엔
아이들
눈동자보다 반짝였다
고개 쳐들고 볼
필요 없었다
[page45
박기을
‘을왕리에서5-수정산 소풍을
회상하며]
박기을 시인은 인천문협 시낭송회에서도 뵙고
송년회에서도 인사를 나눴다.
활발하게 협회 활동에
참여하시는 것 같아서 반갑다.
박기을 시인의 시는 이미
나름의 어떤 색깔과 패턴이 정해진 것 같다.
이 점이 시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듯 하지만 반대로 시의 정체를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봐야 하는 걸
알면서도 외면한다
가끔은 그러고
싶다
모터가
타버리기나 퓨즈가 끊어지거나
전구가 터지거나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너로부터
깜깜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page56
김민채
‘지금은 정전
중’]
나는
온몸이
입이다
바람이 꽂히는
자리마다 퍼런 물집이 잡히고
시간을 삭힌
말들이 불에 탄 듯 뜨거워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몸부림친다
[page63
유정옥
‘목어’중
일부]
자신마저 속이는
데 주저함이 없어지는 동안
발길이
흩어졌다는 걸 몰랐다
이제
다시
화려했던 시간이
저물고 있다
[page78
원하일
‘장미’중
일부]
지나간 바람
되돌아오길 바란 날들이여
다음 쪽으로
넘기며
이제는
안녕
[page90
임경순
‘봄까치
꽃’중
일부]
김민채,
유정옥,
원하일,
임경순 시인은
‘시문학’출신의 시인들이다.
어울문학의 큰 자산 중
하나는 위의 네 분과 더불어 김미옥 시인까지 ‘시문학’출신의 시인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문학’의 중요시론 중 하나인 ‘하이퍼 시’에 근접하기까진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시문학 출신 다섯 시인들의 시는 다듬어지고 연습된 은유와 메타포가 있다.
그 은유와 메타포가 조금
더 견고해졌으면 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기대를 해본다.
풍랑이 지나간
바다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
기억
뜯어먹으며
거대한 몸집으로
헤집고 다닌다
종일 물고기
뛴다
[page72
이서영
‘그리움’
중
일부]
그런
거다,
이별은
버리기 아쉬워
만지작거리는
소싯적 낡은
인형 같은 것
형제도 친구도
추억도
애틋하던 남녀의
사랑까지도
결국은 모두
놓고 가야 하는 것
[page102
최재형
‘이별연습15-산새’중
일부]
어울문학동인의 초창기 구성원들의 조건은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와 연이 닿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조건이
여전한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방송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두 분이 이서영 시인과 최재형 선생님이 아니실까 생각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 몇 년
방송대 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우리나라 문단에서 두드러졌다고 본다.
매년 굵직한 신춘문예에
당선작을 배출하고 유명한 문인들의 출현도 심심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두 분께서도
방송대 국문학과의 위상을 한 단계 높여줄 멋진 동문이 되시리라 기대해본다.
귀를
기울이니
둠,둠,둠
작은 북소리가
들려
(중략)
불룩한 엄마 배
안에
아기가
있어
내 동생이
있어.
[page29
신현창
‘엄마
배’
일부]
아마도 어울문학동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년
멤버가 바로 신현창이 아닐까싶다.
그의 동시는 매우 단순하고
쉽게 당연하게 읽힌다.
그러나 돌아보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며 쉬운 것일수록 쓰긴 더 어려웠다.
쉽게 읽히도록 쓰기 위해서
작가는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고 사물을 좀 더 세밀하게 바라보아야 하며 쓸 데 없는 미사여구를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나는 신현창 시인이 꾸준히
발전하여 동시인으로서 빛나는 시를 많이 쓰게 되기를 바란다.
눈 내리던 날의 인천문인협회 송년회를 잊을 수
없다.
잠깐만 얼굴을 비추고 또
서둘러 되돌아오느라 미련이 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송년회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어울문학동인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인데 내 미련함이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도 털어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함께 깨달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마음 따위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버렸다.
이글은 순수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쓴 것임을
부기해두고 싶다.
그들 중 누구도 나의 글에
이러니저러니 하지 않기를 바라는바 독자의 감상에 작가가 끼어든다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일임도 그들이 알 터,
그 또한 쓸 데 없는
짓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