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저난상(鳳翥鸞翔) : 절묘한 서법(書法)을 일컫는 말
- 동진(東晋) 도연명(陶淵明)과 당(唐)나라 왕유(王維) 등의 시를 쓴 서첩
1. 봉저(鳳翥)
시운병서(時運并序), 도연명(陶淵明)
일(一)
매매시운 목목량조(邁邁時運 穆穆良朝)
습아춘복 박언동교(襲我春服 薄言東郊)
산척여애 우애미소(山滌餘靄 宇曖微霄)
유풍자남 익피신묘(有風自南 翼彼新苗)
계절이 끝없이 지나가는 온화한 좋은 아침인데
봄옷 입고 말없이 동쪽 교외로 나서네
산을 씻은 아지랑이가 남아 집이 희미하고 하늘은 어렴풋한데
남쪽에서 오는 바람이 있어 저리도 새순이 왕성하네
사(四)
사신사석 언식기려(斯晨斯夕 言息其廬)
화약분렬 림죽예여(花藥分列 林竹翳如)
청금횡상 탁주반호(清琴橫床 濁酒半壺)
황당막체 개독재여(黃唐莫逮 慨獨在余)
새벽이나 저녁이나 이 집에서 이야기하고 쉬는데
꽃과 약초가 줄지어 있고 숲과 대나무가 그늘과 같네.
맑은 거문고를 평상에 놓고 탁주가 반병이니
황제와 요임금이 따라올 수 없이 나 홀로 있어 슬프네
답방삼군 륙장병서(答龐參軍 六章幷序), 도연명(陶淵明)
방위위군삼군 종강능사상도 과심양견증(龐爲衛軍參軍 從江陵使上都 過潯陽見贈)
일(一)
형문지하 유금유서(衡門之下 有琴有書)
재탄재영 원득아오(載彈載詠 爰得我娛)
개무타호 낙시유거(豈無他好 樂是幽居)
조위관원 석언봉려(朝爲灌園 夕偃蓬廬)
은자가 사는 곳에는 거문고 있고 책도 있네
타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며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네
어찌 다른 좋은 일 없겠냐마는 즐거움은 이 그윽한 집이네
아침엔 밭에 물주고 저녁에는 쑥대 집에 누워 자네
* 형문(衡門) : 두 개의 기둥에다 한 개의 횡목을 가로질러서 만든 허술한 대문(大門)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
음주(飮酒) 5 : 도연명(陶淵明)
結盧在人境(결로재인경) 사람 사는 곳에 오두막을 지었지만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 끄는 소리 말 울음소리로 시끄럽지 않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어찌 그럴 수 있나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절로 외딴 곳이 되는 법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 기운은 해 저물어 아름답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새들은 짝 지어 돌아오누나!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가운데 참뜻이 있어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말로 드러내려다 할 말을 잊고 말았네!
<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 : 謙齋 鄭敾 21.9cm × 5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유연견남산도(悠然見南山圖) : 謙齋 鄭敾 21.9cm × 6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음주(飮酒 七) 7, 도연명(陶淵明)
추국유가색(秋菊有佳色) 가을 국화 색깔 아름답기 그지없어
읍로철기영(裛露掇其英) 이슬에 젖은 그 꽃잎을 따네
범차망우물(汎此忘憂物) 이 세상 시름과 걱정 모두 술잔에 띄워
원아유세정(遠我遺世情) 세상 모든 정 모두 떠나 보내리
일상수독진(一觴雖獨進) 술잔은 비록 홀로 비우고 있거니
배진호자경(盃盡壺自傾) 잔 비우니 술병은 저절로 기울어진다
일입군동식(日入群動息) 해지면 온갖 움직임은 멎고
귀조추림명(歸鳥趨林鳴) 둥지로 돌아오는 새 숲을 향해 우는구나
소오동헌하(嘯傲東軒下) 동편 튓 마루에서 휘파람 불며 거닐어 보니
요부득차생(聊復得此生) 또 다시 산다하여도 이렇게 살아가리라
문래사(問來使), 도연명
이종산중래(爾從山中來) 그대 산중으로부터 왔으니
조만발천목(早晩發天目) 아침 늦게 천목산에서 출발 했으리
아옥남산하(我屋南山下) 내 집 남산 아래
금생기총국(今生幾叢菊) 지금 몇 떨기 국화 자라고
장미엽이추(薔薇葉已抽) 장미 잎은 이미 피어나고
추란기당복(秋蘭氣當馥) 가을 난초 기운 마땅히 짙으리
귀거래산중(歸去來山中) 산중으로 돌아가면
산중주응숙(山中酒應熟) 산중엔 술 응당 익었으리
자각봉하(紫閣峰下)
* 도연명이 팽택현의 현령으로 있을 때 고향 마을로부터 심부름꾼이 오자, 그에게 고향 소식을 물으면서 은거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 도연명(陶淵明) : 365년 ~ 427년 추정 >
- 위진남북조시대 동진(東晋) 말 ~ 남조(南朝) 송 초 -
□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심양(浔阳) 시상(柴桑, 현 장시(江西)성 주장(九江)) 사람으로 자는 원량(元亮)이고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다. 집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화원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긴 시인 도연명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는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사 대분열기에 남조의 동진과 송이 교체되는 시기를 살았다. 그의 증조부 도간은 대사마 벼슬을 지낸 동진의 명사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태수를 지냈다. 그러나 도연명 대에 와서 가세가 기울어 힘든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도교와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들을 외고 다닐 정도였다. 좨주(祭酒, 국자감의 우두머리)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참군(參軍, 참모)을 거쳐 팽택현령(彭澤縣令)에 임명되었으나,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시 <귀거래사>를 썼다.
□ 따스한 인간미, 담담한 기풍이 깃든 시풍
시골로 은거한 그는 직접 괭이와 삽을 들고 농사를 지었고,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다. 그는 직접 노동하면서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도 생활에서 나오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은 당시의 선비들이 즐겨했던 유희문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멸시에 가까운 평을 받았지만 당나라 이후 육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풍은 당나라 때의 맹호연, 왕유, 위응물, 유종원, 백거이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죽은 뒤 ‘정절(靖節)’이란 시호를 받아 ‘정절선생’이라 불리었고, 양나라 소명태자는 『문선』에 그의 시 9편을 수록하여 그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과 같은 산문과 『도연명집(陶渊明集)』을 남겼고, 유명한 괴기소설집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첫댓글 초서 공부하기에 좋은 서첩인데 이렇게 아름답게 글씨를 쓸 수가 있나? 이 서첩에 겸재공의 그림이 같이 소장되어 있었다면 금상첨화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