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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앞서 맡고 있는 직책 소개 부탁드린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이다.
언제부터 나눔의 집에서 일했나?
2001년 2월 1일부터 있었다.
원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지?
나는 원래 일반 직장 생활과 대학원 학업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다. 사회 복지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연이 되어 이 곳에 오게 됐다.
인상 깊었던 점은 당시 나눔의 집에서 일본 여성분이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왜 가해국인 일본 사람이 피해자인 할머니들 곁에서 일하고 있나?’ 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첫째로 할머니들을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했고, 둘째로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일본인들이 많이 오는데 통역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교통편이 힘든데 당시에는 출퇴근이 거의 불가능해서 숙식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인보다 저렴한 노동력에 숙식하며 할머니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본인이 일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때 우리가 말로만 “역사, 인권” 하지 실제로 발 벗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
그러던 와중에 관계자가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처음에는 아픈 역사의 산증인이신 할머니들을 마주 대하기가 겁이 났었다. 게다가 당시에 할머니들이 조금 거칠었다. (웃음) 그래도 고민 끝에 이 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을 때 할머니들이 좋아했다. 왜냐면 워낙 가부장적인 시대에 살던 분들이라 아무래도 여자보단 남자가 당신들을 위해 일을 할 때 믿음을 주신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에 살고 계시는지?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할머니들이 계신가?
아니다. 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고백을 해서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전에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가 오키나와부터 훗카이도까지 일본 답사기를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었다. 사실 김학순 할머니 전에 오키나와에 사는 배봉기 할머니가 먼저 증언을 했었다.
아사히 신문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기사화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윤정옥 교수님은 할머님들이랑 나이가 비슷하다. 그 당시에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집대상이던 윤정옥 교수는 결혼 상대가 있음을 이유로 빠져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징용,징병으로 끌려갔던 많은 남자들은 돌아오는데 본인 또래의 여자들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던 윤정옥 교수는 조사에 나선다. 오키나와는 면적이 작은 섬인데도 불구하고, 150여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윤정옥 교수는 오키나와부터 훗카이도까지 답사하면서 조선인들을 비롯한 조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90년도부터 한겨레에 연재했다. 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는 사회 운동이 되었다. 할머니들 스스로 의식이 있고, 힘이 있었으면 나서서 사회 운동을 했을텐데 당시만 해도 할머니들은 본인들이 당한 일들이 인권 침해인 줄 몰랐다. 당시만해도 운명론을 믿었던 할머니들은 그냥 운명인 줄 알았다.
(사진 출처 : 여성 신문)
그 당시 사회학이나 여성학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의기투합을 해서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을 찾아가 증언을 부탁했다. 왜냐하면 관련 자료 대부분을 일본이 폐기했고, 남아있는 자료는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증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던 인권 운동가들이 할머니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네가 뭔데 내 뒤를 캐느냐”, “내 과거를 알아서 팔아먹으려고 하느냐” 하며 혼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만들어낸 것이 증언집이다.
인권 운동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이 이렇게 노력하여 이뤄낸 첫 결과물은 증언집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 행동을 계획했다. 바로 집회를 여는 것이었다. 정대협은 소셜 액션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어떤 문제를 사회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동을 해야 힘이 생긴다고 여긴 전국 여성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체가 ‘정대협’인 것이다. 정대협이 이뤄낸 세 번째 업적은 ‘나눔의 집’이다.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는데 잘 나서지 않고, 사회 운동을 해도 일본이 꿈쩍하지 않자 싸움이 길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하면 매춘부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할머니들이 결혼 했다가도 이혼당하고, 가족 없이 혼자 살고 했다. 지금이야 여성들이 일할 곳이 많지만 그 당시엔 오갈 곳 없는 여성들이 할 일이 막일밖에 없었다. 배봉기 할머니만 해도 남양주에 있는 비닐하우스 촌에 가서 하루 날품을 팔아 하루 연명하고. 집이 없으니까 고압선 밑에 움막을 지어서 생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아, 할머니들의 쉼터를 만들어야 하겠다’ 해서 탄생한 것이 나눔의 집이다. 92년 5월에 나눔의 집 건립 위원회를 수립하고 전 국민에게 1억원의 모금액을 받아 만들었다. 처음엔 그 1억원으로 서울에 전셋집을 구했었다. 하지만 전셋집이 조그맣다보니 당시에 거주 신청을 했던 17명이 생활하기에 알맞지 않았다. 또, 주변에서 매춘부 시설이라며 반대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할머니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 서울 서교동에서 시작한 ‘나눔의 집’은 혜화동, 명륜동을 거쳐 95년 12월에 지금의 위치에 정착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시설이 갖춰진 게 아니라 주변이 다 논이었다. 할머니들이 처음에는 안 오려 했었다. 그래서 사회 운동 단체, 보호 시설 등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역사관을 만들었다.
이 역사관은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하는 세계 최초 인권 테마 건물이며, 한·일 시민들이 같이 모금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이 건물을 보고 벤치 마킹한 것이 부산과 서울, 대구, 중국 람경, 상해, 일본 도쿄, 대만 총 8곳이 있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있는 역사관이 제일 크다. 당시에 20만명이 끌려갔다고 추정하는데,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추했는데, ‘할머니가 있던 위안소에 피해자가 몇 명 있었어요?’ 하면 ‘우리 그 쪽에, 열 명 있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 하는 대화를 토대로 추정한 값이다. 그리고 당시에 일본군이었던 사람들의 양심 선언도 있었다. ‘나는 몇 부대 소속 누구인데, 어디 위안소에 몇 명이 있었다.’라는 증언을 바탕으로 학자들이 추정한 결과가 20만명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신고한 분이 240명밖에 안 된다. (신고 인원이 적은) 이유가 뭐냐면 현지에서 많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신고한 분들 중에 살아계시는 할머니들은 스물 일곱 분뿐이다. 그 중 여덟 분의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에 머물러 계시다.
나머지 할머니들은 어디 계시나?
각자 지역에 계시다. 댁에 계시는 분도 있고, 너무 고령이다 보니 대부분 병원에 계시다.
흉상들은 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인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대표로 김학순 할머니의 전신 동상이 세워져있고 나머지 분들은 흉상으로 제작되어 있다.
할머니들이 평소에 나눔의 집에서 어떤 활동을 하시나?
그 전에는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다. 수요 시위에도 참가하시고, 국내외 청원에도 발 벗고 나서시고, (‘위안부’와 관련된) 그림도 그리고, 토요일에는 방문객들한테 증언도 하고 다양하게 활동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93세이다 보니 활동을 못하시고 대부분 병원에 가 계신다.
그렇다면 만약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이 곳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아마 기념 추모소로 남을 것이다. ‘위안부’ 역사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할머니들이 거주하시는 공간은 아마도 다른 여성 인권 피해자에게 개방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할린 강제 이주자’나, 아니면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자녀분들로 예상한다. 자녀분들의 경제적 상황이 나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계획은 역사관 앞 부지에 여성인권 센터를 짓는 것이다. 인권 센터를 지으려는 이유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여러 나라를 다니다가 외국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역사’가 아닌 ‘여성 인권’에 초점을 맞춰야 해결될 것을 직감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홀로코스트’ 센터가 50개가 넘고, 센터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세계인들이 홀로코스트는 기억하면서 ‘위안부’는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이 ‘센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더라도 인권 센터나 역사관을 통해 이 문제가 잊히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수요시위에서 일본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맞다. 일본은 이 문제를 역사에서 통째로 사라지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같은 전범 국가인 독일의 경우 총리가 무릎 꿇고 사과를 했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지속적으로 역사에 관한 교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교과서 어디에도 ‘위안부’ 문제가 없는 것과 지난 2015년 합의에서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언급한 것이 증거다. 단편적인 예로 일본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당인 공산당의 대표가 고려대학교에 강의를 와서 “해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도쿄에 소녀상을 설치해도 되겠나?”라는 내 질문에 “그것은 일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안 된다.”라고 대답한 일화를 들 수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덧붙이자면, 일본은 해외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다. 2013년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에 소녀상이 세워질 때도 일본은 철거를 주장하며 국제소송까지 걸었다. 결국 우리나라가 소송에서 이겼고, 소녀상은 철거되지 않았지만 일본이 이러한 액션을 취한 것은 경고이다. 앞으로 해외에 소녀상을 건립할 때마다 귀찮게 굴 것이니 하지말라는 경고이다. 우리나라에 소녀상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봤자 꿈쩍하지 않던 일본 아니었나. 일본은 소녀상을 보고 세계인들이 ‘위안부’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많은 생각이 드는데, 우리 같은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민간 교육을 확대하자는 차원에서 ‘피스 로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었다. 한국과 일본 청소년들이 할머니들이 끌려갔던 길을 다니면서 설명을 듣는 내용이었다. 결국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학생 모집단계까지 갔었다. 그 때 일본 학생은 금방 정원이 찼지만 한국 학생들은 참여율이 저조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가 주최한 다른 활동에서도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회성으로 그치더라. 아마 입시 때문에 바빠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활동에 참여할 사람을 구하려고 벌이는 사업이다.
방문객을 봐도 그렇다. 봉사시간을 얻으려는 중고등학생의 비율이 높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는 거지만 그래도 와서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가한다. 하지만 대학생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취업 문제로 바빠서 참여율이 저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사람들이 오는데, 그 사람들은 지속으로 온다. 사회 분위기가 달라서 (우리나라는 항상 바쁘니까) 그렇다고 여기고 있지만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학생들이 비판적인 의식을 키웠으면 좋겠다. 문제의 본질을 알고, 현재 대응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았으면 한다. 무조건 ‘나쁘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묻기 위해 대사관 직원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들은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이 문제가 해결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내가 반박했지만 그들은 공소시효까지 덧붙이며 말을 막았다. 그들의 주장은 오류투성이지만 도무지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재 일본의 주장이 이렇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목소리를 많이 내줘야 한다.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 일본과 싸워야 한다.
내가 너무 많은 얘기를 한 것 같다.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려줘서) 감사하다.
학생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와준 것 같아서 나도 고맙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하다.
안녕 게녀덜
막이슈 맨날 눈팅만하다가 글쓰려니까 쫌 떨린다ㅎㅎ
오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자
수요시위가 1400회를 맞은 날이기도 해
그래서 혹시나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있을까봐
고민하다가 작년에 학교 과제때문에 했던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님 인터뷰 전문을 들고왔어
진행도 정리도 자체적으로 한거라 다시 읽어보니까 부족한게 많닼ㅋㅋㅋㅋㅋ
그래도 공유하고 싶은 내용들도 많고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날이니까 한번씩 읽어보면 좋을것 같아서 올려
문제있으면 댓글부탁해
첫댓글 공유해줘서 고마워~
글 고마워 반성하게 된다..
잘읽었어 올려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글 올려줘서 고마워 잊지않을게
잘읽었어!
잘 읽었어! 인터뷰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