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27절
복음에 합당한 생활
본문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합당 = 악시오스 ‘일치하다’ 즉 복음에 일치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까?
“너희가 한 마음으로(같은 영안에’ ‘그리스도안에’) 서서” -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나 한 생명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 영적으로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28절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일 -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겪는 환난과 핍박 그리고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보는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달게 받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일까요?
먼저 복음이란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I.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고 7개월 되었을 때 너무 힘에 겨워 건강이 악화되어 죽게 되었었다고 합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앉아있을 수도 없고, 눌 수도 없어서 이불 받치고 지냈답니다. 부모님을 잘 아는 의사가 말했습니다. 산모를 살리려면 지금 빨리 낙태시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죽습니다. 엄마가 건강 찾으면 아기는 다시 낳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습니다.” 그리고 63년 전 오늘. 어머니의 그 사랑으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건만 어머니가 목숨 걸고 나를 낳아 주신 그 사랑을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랑에 의하여 물로 태어났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내 영혼이 죽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받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 속에 있었건만 그리고 목숨 바쳐 나를 낳아 주셨건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 내가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죽을 각오로 나를 낳으셨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심으로 나를 낳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 그분의 피로 내가 태어 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치 해가 불덩어리인 것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호세아 11장 4절에서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줄은 어떤 줄입니까?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신 어떤 것으로도 결단코 끊어지지 않는 줄입니다.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줄입니다. 그 사랑의 줄로 하나님에게 나를 묶어주셨습니다. 그 질긴 사랑, 그 뜨거운 사랑, 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그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II. “나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실어하는 죄인입니다. 선한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나조차도 나에게 절망하는 나입니다. 이런 나 자신을 사랑하고, 끓어 안고, 섬기고, 위하고, 스스로 화장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서 헛것을 사는 나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죄인인 나입니다. 본질상 진로의 자식인 나입니다.
이런 구제불능인 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아버지여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이 사람이 알지 못하나이다. 이 사람을 용서하소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면서 나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지옥으로 버려지기 위하여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나의 바로 앞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2천 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으로만 알았는데, 지금, 지옥입구에 매달려있는 바로 내 앞에서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으로 던져버림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엘리엘리 나마사박다니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니이까?” 하시며 나를 위해 대신 버림당해 주셨습니다.
나의 존재, 나의 인격, 나의 생각과 하는 짓거리를 보면 반드시 저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신 저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내 죄를 다 멸하시고 버림당하는 것도 멸하시고, 저주당하는 것도 없애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나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지옥, 바로 그 앞에서 내 대신 십자가 지고 죽고 버림당하시는 예수 사랑! 이것이 복음입니다.
(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303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1,33-3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이것이 복음! 복음입니다!
지난 6월 30일 오후 3시경, 이불을 정리하고 베개위에 성경책을 놓고 그 앞에 앉았습니다.
평소엔 귀에서 가을밤에 풀벌레 소리가 나는데 갑자기 모든 소리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주 오래전 그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무릎 꿇고 “주여 말씀하옵소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책망이나 저주하시는 말씀을 하실까봐 매우 두려웠습니다. 얼마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나를 잡고 게신 사랑의 손길이 떠올랐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 제 안에서 예수님께서 살아주세요. 그리고 저는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살게 해주세요.”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너를 축복하겠다.”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책망 받을 줄 알았는데 너무 의외의 말씀이었습니다. 큰 망치로 되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손길 ( 그 사랑 때문에 나를 놓지 못하고 꽉 붙들고 계신 대자대비한 사랑의 손길), 그리고 너를 위해 죽임당한 십자가의 예수만 나타내라.”
그 사랑 때문에 나를 놓지 못하고 꽉 붙들고 계신 대자대비한 사랑의 손길 그리고 나를 위해 죽임당한 십자가의 예수!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III.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삼아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자녀 된 우리들에게 몽땅 다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광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십니다. 자녀라면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입니다(롬 8: 16,17).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누리는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나는 아멘 하고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수에 가면 비행장 뒤 바닷가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을 죽인 그 원수 안재선을 찾아가 용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 애원하여서 사형당할 그를 살렸습니다. 그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신학교를 보냈습니다.
그는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도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주홍글씨에 묶여 방황하고 좌절했습니다. “어느 누가 사람을 죽인 자로부터 복음을 듣고 싶어 할까?” 죽을 때까지 견뎌내야 할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그 고난의 가시 밭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신학을 포기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하여 여수 앞바다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사업을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일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과거와 애양원, 손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 숨겼습니다. 그는 48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아들에게 신학하고 목사 되라고 유언하고 죽었습니다.
안타가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같은 목사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값졌을까요?
내가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죄인입니다. 목사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목사님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입니다.
이 복음을 눈물로, 그 뜨거운 사랑의 감격으로 전했다면 얼마나 주께서 영광을 받으셨겠습니까. 목사님의 신앙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귀중히 쓰임 받았겠습니까?
안재선, 그분의 삶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로 생각나게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복음을 그냥 주셔서(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용서 받고, 새 생명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 영생복락을 얻었습니다.
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