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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저 예뻐요?
시 139:7-14 엡 2:8-10
여러분, 제가 예쁩니까?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예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살아오면서 저한테 예쁘다 하는 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늘그막에 예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린이 집에서의 일입니다.
어린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마치자마자 다섯 살배기 정훈이가
“할아버지 예뻐요.” 라고 했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머뭇머뭇 대답할 말을 찾다가
“어디가 예쁜데?” 하고 물었습니다.
“머리가요.” 하면서 볼을 가리켰습니다.
얼굴을 머리라고 하는 정훈이지만, 그 아기의 예쁘다는 말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할아버지 예쁘다.”고 같은 또래 가은이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디가 예쁘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고맙다고 만 했습니다.
저는 아기들 덕분에 예뻐지고 있나봅니다.
아기들이 예쁘다고 하니까 분명 예쁜 것이겠지요?
한창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추워요?”
“아니...”
뜻밖의 물음에 또 한 번 대답이 궁해져서 예선이를 보았습니다.
예선이가 걱정스레 내가 입은 재킷을 살피듯 보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선생님이 “할아버지 입으신 옷을 더운 옷이 아니야.” 하고 일러주자
끄덕끄덕했습니다.
아기들을 만나러 갈 때는 옷을 차려입습니다.
그날도 더운 날씨였지만 예의를 차리려고 재킷을 입었습니다.
“이 재킷은 여름옷이야.”
찬찬하게 설명하면서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습니다.
그러자 은주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멋있다.”
재킷을 벗자 드러난 분홍 줄 체크무늬 와이셔츠가 보기에 좋았나 봅니다.
“고마워요.” 하면서 제 마음이 발그레해졌습니다.
얼굴은 더 많이 발그레했을 겁니다.
그날 함께 한 노래며 율동이 신바람이 났습니다.
동화 구연도 생기가 넘쳤습니다.
자칫 저의 은퇴가 사회와의 결별이 될 뻔했었습니다.
목회 마무리 무렵에 크게 바라던 꿈이 깨져버려서 실의에 빠졌습니다.
거기에 은퇴가 덧불려져서 심한 자존감 상실증을 앓았었습니다.
지기들한테 배신당하고, 사회로부터 쓸모없어 버려졌다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마음 둘 데가 없었습니다.
못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몹시 싫었습니다.
그러는 나를 하나님께서 어린이집으로, 그리고 천안외국인교회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아기들과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차츰 ‘나’를 만났습니다.
아기들 덕분에 ‘예쁜 나’를, ‘멋진 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존감도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쁘게 낳아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9:14)
하나님은 우리를
신묘막측(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게 낳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대충 만들거나, 심심풀이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모방해서 짝퉁으로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공교한 솜씨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본문 시 139:14-18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속 내장을 창조하시고,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오묘하고 주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정이 머무는 자리가 머리인지 가슴인지... 잘 모릅니다.
히브리 언어에서는 정서와 감정의 자리가 내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 어디엔가 정서도, 감정도, 지성도 담아 두셨습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모양과 성질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손수 정하신 매뉴얼을 가지고 계획대로 지으셨고,
태어나서 살아갈 계획도 세우셔서 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정성과 공을 들이신 것입니다.
이에 감격한 시인이 외쳤습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어떤 주석에서는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림을 정성껏 그리다보면 그림하고 정이 듭니다.
제 그림을 내줄 때는 딸을 시집보내는 듯 애틋한 심정을 느끼곤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말로다 할 수 없을 만큼 공을 들여 창조하신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감상용이 아닙니다.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만큼 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도 나를 모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경지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가치와 미적 수준을 최상에 두셨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는 만큼 나를 알고 사람을 압니다.
사람을 보고서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예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사람을 예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대학 교육학 교수였던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는
“우리시대의 모든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상상도 못할 만큼
귀하게, 곱게, 존귀하게 지어주시고
아가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진흙이라고 했습니다.
진흙은 깨지기 쉽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 64:8a)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4:8)
어느 날, 고흐가 창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서
그 사람의 가슴에 ‘Breakable’(깨지기 쉽다) 는 글자가 있었습니다.
앞을 지나쳐 뒷모습이 보였을 때 등에도 글자 있었습니다.
‘Be Careful’ (주의)
고흐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맞아, 사람은 깨지기 쉬우니 조심해서 대해야 하는 거야!”
진흙인 인간은 잘 부서집니다.
잘 깨지는 것을 ‘유리 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유리그릇은 한 번 깨지면 못쓰게 됩니다.
깨진 유리 조각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도 합니다.
유리보다도 더 약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기분 따라 깨지고, 실수해서 깨지고, 실망해서 깨집니다.
서운한 말 한마디에도 금이 가고 깨집니다.
깨진 마음은 아프고 다른 사람도 아프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자존감을 소중히 하십시오.
저는 은퇴를 전후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자존감이 깨졌고, 자칫 은둔형 외톨이가 될 뻔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가 국내에서만 1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은둔형 외톨이의 증상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생긴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집단 따돌림으로 무능력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고,
게임 중독으로 인해 사람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싫든 좋든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악한 환경이 자존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러 갔을 때 다윗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삼 16: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어린 나이에 양치기로 지내면서
형들에게 무시당하는 외톨이였습니다.(삼상 17:28)
그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설 때 무엇을 의지하고 나갔던가요?
칼과 창이었습니까? 아니면 방패였습니까? 투구였습니까?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나아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나님의 용사이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존감으로 골리앗 앞에 나아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존감으로 다윗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자존감을 해치는 어떤 약점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약점을 보완해서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그 약점을 무엇으로 보완하려고 하십니까?
세상적인 것들로 보완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약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모셔 들이세요.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뻐하신다.”
“하나님은 더 예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입니다.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토기장이 이신 하나님 손에 진흙인 우리가 있습니다.
진흙 스스로 예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쓸모 있는 무엇으로 바꾸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진흙인 우리에게
온갖 공을 다 들이셔서 예쁘고 값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깨지고 부서진 흙 쪼가리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서십시오.
예쁜 꿈을 꾸고 예쁜 일을 하면서 사십시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선한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픽션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식당 뒤에 개들이 있었습니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고 나서 음식 찌꺼기를 던져 주면,
그것을 먹으면서 맛이 어떤지 평가하곤 했습니다.
그 요리사는 개들이 자기 음식솜씨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개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요리사의 솜씨는 점점 좋아졌습니다.
나중에 그 요리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식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식당의 요리사는 누구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까?
개들의 평가가 아니라,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정성을 다하여 지으신,
그리고 우리를 믿어주시고 선한 기대를 가져 주시는,
하나님 기뻐하실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어울려서 살아갑니다.
그 어울림이 관계를 이루는데
관계라는 것도 유리처럼 서로 아끼지 않으면 곧잘 깨집니다.
어린 아기들이 ‘할아버지 예뻐요.’ 하는 한마디가
늘그막에 입었던 저의 상처를 치료했던 것처럼
작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모여서 예쁜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웁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 기뻐하실 선한 일입니다.
아기들 덕분에
성도님들 덕분에
예뻐져서 행복합니다.
멋있어져서 참 좋습니다.
더 예뻐지고 더 멋있어져야 하겠습니다.
아기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예뻐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쁘면 하나님께서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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