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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허락하심
정 수 화 목사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10:28-31)
(본 설교는 자칫 예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강조하여 극으로 빠졌던 어느 목사의 흐름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그의 고난관(觀)과는 다소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밝히는 바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고난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저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만 국한시켜 본다는 점과, 또 그 관계의 연관성이 누구에게나 절대적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본 설명 중에 그 관계의 폭이 넓게 얘기가 되어도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불가피한 인용일 뿐 그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분명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있을 만큼 우리를 빈틈없이 보고 게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윗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 해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피해를 입을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시편 23편에서 고백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위험과 불안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그게 믿음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된 우리는 자녀가 학교에서 와야 할 시간인데도 연락도 없이 제 시간에 오지 않는다거나, 늦은 시간에 귀가를 하게 되면, 부모로서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도 사건 사고가 많다보니까 부모된 입장에서는 외출을 하는 자녀들에게 늘 걱정스런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해주게 된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마음을 갖는 데에는 물론 믿음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도 의외의 충격적이고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기에 믿음 약한 성도들일수록 그런 마음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직접 야곱에게 너를 지켜주고 너와 늘 함께 하겠다고 말씀했다. 그런데도 야곱은 지독한 사기꾼을 만나 20년간이나 어려움을 겪었다. 귀하고 귀한 외동딸이 성폭행을 당해 그 딸이 평생을 홀로 살아가는 모습을 부모로서, 쓰라린 마음을 갖고 지켜봐야만 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하지만, 그 말씀을 의심케 하는 일들을 보거나 아니면 직접 겪는다면 우리 대부분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애매모호한 그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모호함에 대해 크리스찬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유(類)의 의아심을 덮어둔 채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 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잎사귀에 의심의 해충이 번질 우려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답을 성경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해가 되던 되지 않던 발생하는 모든 일,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되어 진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다. 값싼 참새의 생명조차도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하물며 이보다 엄청난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치 않으시겠느냐? 그런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길흉, 생사,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유발시키는 일체의 일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떨 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허용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본다면 우리가 모호하게 생각하는 의문점들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다음 두 가지에 의해서 있게 된다.
첫째. 우리를 테스트(시험)하기 위해서라든지 또는 연단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곤 한다.
동방에서 신앙이 가장 좋기로 알려진 욥이 당한 극심한 고난을 생각해 보자. 산울로 두를 만큼의 엄청난 소유물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그의 자녀들, 아들 일곱과 딸 셋 모두가(“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자녀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은지라”, 욥1:19) 집도 아닌 바깥에서 기둥에 깔려 객사했다는 것인데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겠는가! 자녀가 부모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면 부모는 평생 가슴에 못이 박힌 채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욥은 한 명도 아니고 10명이나 되는 자식 모두를 먼저 떠나보내는 큰 아픔을 겪는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욥의 온몸에 악종이 퍼져 육체의 고통까지 겪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정겹게 함께 살아왔던 아내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욥과 욥이 섬겨온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난다. 또 이렇게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욥에게 절친한 친구들이 찾아왔지만, 끔찍한 이런 일들이 욥이 죄를 지어 그렇게 된 거라고 몰아, 회개를 촉구한다. 이런 경우는 경험하지 못한 우리라도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걸까? 사랑의 하나님이 맞나? 할 정도로 인간이해의 maximum을 초월할 만큼이나 처절한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욥1:11,12을 보면 일련의 이런 일들이 욥을 시험(test)코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하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너의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연단의 측면도 다르지 않다(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의 광야생활, 졸지에 노예로서 이국땅에서 힘겨운 삶을 시작해야 했던 요셉, 사울왕에게 쫒겨 수년간이나 도망자로 광야를 전전하며 피해 다녀야 했던 다윗, 옛 로마 경기장에서 짐승에게 온 몸이 찢겨가면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고통 속에 죽어간 믿음의 사람들…). 이런 사실들을 상기해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성숙이나 또는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고자(cf.욥 42:10-17) 시험이나 연단의 차원에서, 도무지 인간의 이성과 감정으로는 원망스럽기만 한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둘째.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허용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윗은 자기의 충복인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아 자신의 처로 삼은 일로 인하여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분명한 자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삼하 12:13). 그런데 그러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질적인 죄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허락하심이 있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일 (우리야의 처를 빼앗아 다윗의 처로 삼은 일) 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삼하 12:14)
이 말 대로라면 주님 스스로도 원하지 않으시는 허락하심이 우리의 죄로 허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실례는 불신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연단이나 시험이 아닐 경우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없다는 법칙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후자의 실례에서 좀 더 살펴봐야 할 내용은 죄의 결과로 일어난 시련의 아픔이 다윗의 자녀에게도 미쳤다는 점이다.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일주일 만에 아비의 금식과 간곡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죽고 만 것이다.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우리야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삼하 12:14,15,18)
죄 지은 당사자에게 죄의 대가가 돌아가야지 왜 애꿎은 자녀에게까지 고통이 전달되는가 하는 점은 우리에게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왕상 11, 12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이와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부모 자녀간의 세대에 제한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해 준다. 출애굽기 20:5,6과 신명기 28:18 등은 범죄의 영향이 자녀는 물론 삼사 대까지 이어짐을 말하고 있다(“…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선조의 죄의 영향이 후대 세대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다는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 조심스러움이 있다. 아울러 실례를 든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구약의 사건이다. 즉, 은혜시대가 아닌 율법시대의 인과응보적 차원에서 해석이 가능한 사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이와 유사한 현상은 은혜시대인 지금의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외면하기도 어렵다. 일례로 까닭 없이 나의 자녀가 사고를 당하거나 사랑하는 가족 중 갑작스레 큰 변을 당한 모습에 심적 쓰라림을 같이 겪어본 사람들은 그 일의 발발 원인이 간혹 내 범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나마 우리의 의아스런 사건에 대한 궁금증은 안개 속에서 물체를 보듯 어렴풋하게나마 그 해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와는 반대되는 현상에서도 이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명기 28:11에서는 주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살 경우 자신과 그의 소생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을 것을 말해주고 있다(“…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네게 복을 주시고 또 네 몸의 소생과 가축과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실 것이며…”). 이에 대하여 이를 관찰한 다윗은 그 현상을 시편 37:25에서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지금에 있어서도 다윗이 목격한 바가 그대로 우리에게 목격되고 있다. 신앙생활이 성실한 자 같지 않은데도 하나님이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그런 자들이 결국에는 깊은 은혜의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기도의 배경이 든든했다든지, 기도의 지원을 많이 받은 결과라 볼 수도 있지만 그 영향 못지않게 대대로 심어온 신앙의 산물도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그의 가족과 가문의 신앙을 보면서 수긍이 가기도 한다.
실례>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간증에서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가 평생을 기도로 사셨음에도 교인이 몇십명을 넘어보지를 못했고,, 교회의 어려움으로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하다가 17일 만에 운명하심. 그래서 주변에서는 목회에 실패한 아버지로 ….그 또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안 해 본 일 없이 온갖 고생을 하다 보니 나중에 하나님에 ‘님’자를 빼고 ‘하나’로 부를 정도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신의 삶으로 지냈다고 함. 그런 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가 됐고, 사랑의 교회에서 청년목회만 했던 그가 단독목회를 하려 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함.
“이목사, 고생은 아버지 때 다하셨고, 이제 이목사는 그 열매만 따 먹기만 하면 될거야.”(아버지가 목회하실 때 그 교회에서 여전도사로 평생 주님을 섬겨온 전도사님이 해준 말), “이제 너의 힘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셨다는 말씀) 그리고 나서 엄청난 축복이 임하기 시작하는데, 성도들이 매주 수 십 명씩 찾아들기 시작하여 지금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함.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
“부모가 믿음의 씨앗, 의로운 씨앗을 뿌렸는데도 그가 사는 동안 열매가 없다면, 자식 대에 하나님이 이자까지 붙여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 같다.”고 간증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구약의 왕들 중에 악한 왕의 자식 중에서도 의로운 왕이 나오기도 했고, 그 반대로 의로운 삶을 살던 왕의 자식 중에서도 못된 왕이 나오기도 했다. 또, 에스겔 18: 19,20(“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것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을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과 같이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말씀도 버젓이 있지만, 다윗이 목격하고 고백한 말이나 우리 주변에서 목격되는 현상들을 볼 때 묘한 이런 현상을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故옥한흠 목사님도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런 현상은 부모 때의 의의 삶이 자식 대에 미친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말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이 일리가 있다면, 연단이나 시험이 아닐 경우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그 열매가 내 시대에 맺히지 않는다면 나의 자식 대에는 분명 그 열매를 맛볼 거라는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식으로 특별히 우리 부모 세대가 죄와는 거리가 먼, 말씀 따라 사는 의의 삶을 확고히 살아감으로 우리교회를 출입하는 자녀세대들로 하여금 복 누리는 삶이 되게 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천안외국인교회 주일설교(2016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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