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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옷과 가죽 옷 사이
창 3:6-7, 21 요 4:5-14
사람이 사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의식주(衣食住)라고 대답합니다.
그 세 가지 중에 옷(衣)을 제일 먼저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거리가 중요하고
집 장만하기가 힘든 줄 알면서도 옷을 먼저 말하는 것은 왜일까요?
사람이 사회에서 사노라면 굶거나 집이 없는 것은 숨길 수 있어도
벗은 것은 당장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옷은 체면을 차리고, 명예를 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은 왜 명예와 체면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일까요?
본문 창세기에 옷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과일을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이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서, 그 과일을 따서 먹고
자기 남편에게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창 3:6,7)
옷은 인간 최초의 작품인데 그것이 죄의 꼬리에 매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자마자 두 가지 본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이 부끄러움 곧 수치심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
이 부끄러움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열등감이나 자존심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동기였던 바람 즉 ‘하나님처럼 되기’가 좌절되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구덩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공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슬하에 있었을 때 인간은 부끄러움 자체가 없었습니다.
비록 옷을 입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두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영광의 광채가 사라지고
부끄러움 때문에 움츠린 채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만든 이파리 옷을 입고서도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여전히 ‘벗었으므로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나뭇잎 치마는 부끄럼을 가리는 효용가치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사람의 삶은 온통 잎으로 옷 만들기 씨름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생활에서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 전반에서 자존심과 수치심을 가리려는 몸부림이 심각하게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이파리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라는 이파리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로 이파리 치마를 두르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리고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저지르는 죄와 실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뿌리내린 원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내면 그리고 밖에서 겪어야 하는 고뇌와 절망 그리고 허무의 뿌리가
첫 인간의 이파리 옷 만들기에서 뻗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이파리 옷’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삶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파리 옷’을 입고 떠는 인간을 불쌍하게 여겨 옷을 바꿔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1절
이파리 옷이 죄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죽 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가죽 옷과 이파리 옷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재질이 다르다. 약하고 질기다. 싸고 비싸다.......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질문 의도에서의 정답은 ‘누가 만들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파리 옷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고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가 되어서 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가죽옷을 위해서 한 생명이 죽었고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은 복음신앙입니다.
여기에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7절의 이파리 옷이 율법이라고 한다면
21절의 가죽옷은 하나님 은혜를 말합니다.
저희 또래가 어렸던 시절,
설날에 새 옷을 입는 것은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습니다.
설빔으로 입었던 새 옷과 새 신발이 어린 마음을 구름 위로 붕붕 띄워 주었습니다.
어떤 분이 설날에 새 옷을 입고 겪었던 일을 글로 써놓았는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세배를 마치고 새 옷을 자랑하고 싶어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살얼음판에서 놀다가 그만 얼음구덩이 빠졌습니다.
새 옷을 버렸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한테 혼날 일이 무섭습니다.
궁리 끝에 검불과 삭정이를 모아 불을 피워 말립니다.
뒤로 돌아서서 말리다가 불똥이 튀어 옷에 구멍이 났습니다.
새 옷에 불구멍이 났고 마음에는 더 새까만 구멍이 뚫렸습니다.
날은 저물어 오돌오돌 떨다가 어쩔 수 없이 풀죽은 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피해 부엌의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어머니는 엉덩이를 몇 차례 때리시고는
버린 옷을 벗기고 언 몸을 따뜻한 물로 씻기신 다음 방으로 들여보내셨습니다.
불구멍 난 옷을 빨고 기워 다시 입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참으로 포근합니다. 믿음의 언어로는 은혜입니다.
아이는 버린 새 옷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사랑과 배려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수록 엄마에게 빨리 달려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해결해 보겠다고 뭉그대다가 안 되면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과정을 거칩니다.
죄를 짓고 부끄럽습니다.
부끄럼을 감추려고 이파리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이파리 옷은 해가 뜨면 말라서 부스러집니다.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사람만 가죽옷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도 이파리 옷에서 가죽옷으로의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 믿었을 때,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 믿음’ 이 좋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인가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첫 믿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부담감이 짐이 됩니다.
‘나는 도저히 기독교인답게 살기 어렵다’ 고 절망하여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죄인에게는 낮선 단어입니다.
죄책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처벌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죄책감이 큰 사람은 자기를 처벌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의지는 실패와 사고로 위장돼 나타나기도 합니다.
실패와 사고를 통해 자기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임상 심리에서는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의 내면에 어떤 죄책감이 있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지은 죄를 면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적인 설교에 감동을 받습니다.
‘네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서 헌신, 충성하라’는 말에 ‘아멘’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율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요구에 충실하자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율법주의가 체질인 남편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밥이 되다, 질다. 반찬이 짜다. 싱겁다. ...
그것도 못하냐?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고...
아내는 그 요구를 다 들어줄 능력이 없습니다.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난합니다.
요구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하고 또 요구하고.......
율법적인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요구합니다.
그 요구하는 것을 우리말로 ‘바가지’라고 합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체질적으로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에 근거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이야기 합니다.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받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무의식 깊은 데에도 스며듭니다.
죄책감에서의 해방은 열등감과, 자존심에서도 해방을 가져옵니다.
이제는 체면 때문에 누구를 의식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새 옷을 버린 아이의 엄마는 엉덩이를 몇 번 때렸지만
은혜의 하나님은 나대신 독생자를 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면,
나무라지 않고 그냥 웃어주시는 하나님을 뵈면서 살면 됩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자기 자랑,
‘자기 의’가 깨어져야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는데 ... 그 열심이 힘써서 복종치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등이 가려워서 좀 긁어달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콕 집어서 긁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근처를 긁습니다. 그렇게 긁으면 긁을수록 가려운 데가 더 가렵습니다.
‘거기 말고 옆에...’ 하면 가려운 데를 살짝 비켜 지나갑니다.
근처를 세게 긁을수록 화가 납니다.
‘거기 말고...’
‘긁어 주는 데 왜 화를 내요?’
콕 짚어 긁지 못해서 괴롭게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이 잘못인 줄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섬기려 하면 섬길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섬길 대상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면 자기본위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줄을 모르면
자의 의를 내세우면서 화를 내는 것이 죄인 줄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탄식했습니다.
"우리의 의(義) 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야 64:6)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인간이 선을 베풀고, 인간이 의로운 행동을 해도(그것으로 옷을 삼아도)
하나님 보실 때는 더러운 옷 같다고 말합니다.
그 더러운 옷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에는 더러운 옷을 ‘더러운 걸레’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을 닦은 걸레 같은 ‘인간의 의’를 가지고
독생자를 희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선한 일을 하면 부끄러움과 가책이 없어질 줄 알지만,
그것은 더러운 걸레 조각을 걸치고서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의는 ‘시들어 부서지는 잎사귀 같으므로’ 결코 부끄러움을 가리지 못합니다.
사람의 공허함을 생수(성령님)로 씻어내야 합니다.
아담의 ‘이파리 옷’이 범죄로 인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문제였다면
우물가의 목마름은 범죄로 인해 뚫린 인생의 공허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시자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느냐’고 핀잔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나에게 물을 구했을 것이고
나는 생수를 주었을 텐데...’ 하시자
‘이 우물은 조상 야곱의 우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
‘이 물을 먹은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이 야곱과 예수님을 비교하여 따지자
예수님은 물과 생수를 비교하시면서 여인을 은혜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목마른 인생의 갈증을 해갈할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이 물을 먹은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
세상 물의 특성은 ‘다시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을 마시면 순간적으로 목마름이 없어지지만 곧 다시 목이 마릅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목마름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목마른 인생이어서
마른 목을 축일 무엇인가를 찾는 구도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 주시어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인은 다섯 번이나 남편이 바뀌었지만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공허의 실상을 모른 채,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허탈감만 커집니다.
공허를 채우려는 반복 행위는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상의 습관이나 트라우마,
정서조절과 관계의 어려움으로 다양한 중독 현상을 보입니다.
중독(Addiction)은 의존증 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공허한 마음이 술을 부르고 술은 술을 부릅니다.
손가락 다섯을 잘라내고도 도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낚시, 바둑, 각종 게임, 운동... 등도
그것을 반복해서 정상생활이 어렵게 된다면 모두 중독입니다.
종교인은 종교로 중독되고
착한 일을 해야만 안심이 되는, 착한 일 중독도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믿으면 중독이 해소됩니다.
술 담배를 끊게 되고, 나쁜 습관이 바로잡히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성령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39)
사람의 원죄 증상인 목마름.
수치심과 자존심, 허탈감과 허무로 인한 공허는
세상 그 무엇이나 사람의 어떤 몸부림으로도 해갈될 수 없습니다.
오직 배에서 강처럼 솟아나는 생수(성령)로만 해결됩니다.
성령님은 다른 무엇에 중독된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진정으로 성령님을 따라 살면 다른 무엇에 끌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모든 것들이 시시해 보일 것입니다.
생수를 마시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충만하게 임하여 계시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성령님은 인생의 목마름에서 생겨난 모든 중독을 해소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근본적인 갈증을 해소시켜 주실 때,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상태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사단은 상태를 가지고 신분을 공격합니다.
네가 그 모양이면서 하나님의 자녀란 말이냐?
그러나 우리는 상태에 상관없이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독교는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인간은 또 만들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도 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는 것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파리 옷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가죽옷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하여 빛과 소금이 못 되고,
기도생활을 다 못하고, 전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부족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 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죽옷을 즉 ‘그리스도를 옷 입고’(갈 3:27)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은혜의 하나님 품에 안겨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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