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1장 3-6절, 2장 8-10절
은혜와 믿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들 중에 대표적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생산성입니다.
저와 이종우 목사님, 그리고 정수화 목사님이 각각 쇠를 각각 5만원어치씩 샀습니다. 나는 이것을 1주일 동안 기계로 깎아서 나사못을 1000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0만원 벌었습니다. 이종우목사님은 저보다 더 부지런하고 기술도 좋아서 같은 시간에 5천개 만들어서 5십만 원 벌었어요, 그런데 정목사님은 지혜가 있고 성격이 세밀하셔요. 그래서 단 3일 동안만 일했는데 정교한 엔진부품을 만들어서 500만원 벌었습니다. 이것이 생산성입니다.
노동생산성, 서비스생산성, 업무생산성, 자본이나 토지생산성, 생산성 본부. 생산성 혁신운동, 아무튼 생산성에 목을 맵니다. 경쟁사회에서 밀려나게 되고 결국 도태 됩니다. 그래서 생산성에 목을 맵니다. 그리고 생산성을 걸고 무한경쟁에 돌입했습니다. 피곤한 인생을 삽니다.
둘째로, 사람들이 소유의 많고 적음을 성공과 실패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많은 것, 값비싼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었어 = 성공입니다. 밍크코트 입고 루이비똥 메고 벤츠타면 성공한 여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소유하거나 비싼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시장 옷 입고 모닝타면 실패자입니다. 많은 것, 값비싼 것을 쉽게 누릴만한 만족한 지위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열등의식에 시달립니다. 세상적가치관이요. 피곤한 일입니다.
셋째로 비교의식입니다.
이웃과 비교함으로 피곤한 삶을 만들어 삽니다. 항상 타인을 의식하게 되고, 경쟁을 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실패자요 열등한 사람입니다. 소유와 이런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가치조차도 인간 존재와 인격, 삶의 내용과 질이 아니라 생산성과 소유로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지위로 판단합니다. 혹시 가족까지 이런 시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성공하라고 닦달질 하지나 않습니까? 비인간화시키는 가치관, 욕망이 본질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한, 감사도, 만족함도,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성경은 욕망을 무저갱 같다고 가르칩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그래서 피곤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효율적인 생산성, 정당하고 적절한 소유와 지위까지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은 꼭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물질을 유일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복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탐닉하고 추구고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유일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고 그것들을 만드는 일과 소유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자신의 존재의 본질도, 하늘의 신령한 복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러한 삶에서 뒤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가 신령한 모든 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기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엡 1:18).
오늘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복입니다. 이웃을 복 받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복을 받았습니까?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본문 5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예정하시고 선택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천국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I. 예정과 선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예정과 선택입니다, 그 내용은 구원입니다. 무조건 그냥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을 구원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여기서 먼저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하여 전제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정과 선택은 구원의 사건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란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란 측면에서 구원의 사건을 본 것입니다.
우리 오자홍 목사님이 구원 받았습니다. 예정론 입장 (장로교 교리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예정하고 선택해주셔서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편에서 오 목사님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이란 입장 (즉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에서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오 목사님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 목사님이 구원 받은 것은 하나입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다 같이 에베소서 2장 8절을 읽읍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1)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인하여 받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정과 선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2)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믿고 영접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감동해주시는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는 믿는 자가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예정된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II. 예정과 선택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입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2-13) 야곱은 사랑하신 것은 야곱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은 내 의지나 소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 : 12-13)”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가 생기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계획하시고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이것이 내가 받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4절),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5절) 예정과 선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자격, 조건을 따지지 않고 우리를 택하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이것은 결코 변하거나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큰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꽉 잡고 살면 엄청난 축복입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정과 선택, 믿음으로 구원 받는 뒤에는 반드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III. 예정과 선택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여졌기 때문에 선택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선택한 것입니다. 왜 거룩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려면 우리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히12:14)
거룩이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아무도 꾸짖을 수 없는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씻음 받을 때만 거룩해집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거룩이 무엇입니까? 보혈로 씻음 받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하나님 사랑 하고 이웃 사랑하며 즉 하나님 안에 사는 삶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하나님 소유가 되거나, 하나님 안에 있으면 거룩해집니다. 성물, 성전, 성도라고 합니다.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일군으로 직분을 받는 일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는 삶이 거룩입니다.
IV. 예정과 선택은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케 하려고 선 택한 것입니다.
‘선함’이란 단어는 거의‘agape'와 같은 말입니다. 이웃과 관련된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는 인간을 선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십니다. 그는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함께 내리십니다. (마5:45)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읍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을 하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김삿갓이 한 마을을 지나다가 초상집에 들렸는데 글을 모르는 상주가 김삿갓에게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벼슬은 무엇을 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어떤 업적을 남겼습니까?" 글쎄요. 잘한 것 있었습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거듭니다. "잡숫는 것 참 잘 잡쉈습니다." 김삿갓이 붓을 들더니 비문에 「다죽다먹」이라고 써주었습니다. 그래서 비문에 “다죽다먹”이라고 섰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꾸로 읽어보세요. “먹다죽다”입니다. 인분 제조기로 살아서는 않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 18-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미국대통령 오바마는 그의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우리 인간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가고 미국은 세계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협력과 기도와 헌금과 봉사로 지난 16년 동안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근로자들을 섬겼습니다. 굶주릴 때 먹여주고, 헐벗을 때 입혀주고, 학대당할 때, 가쳤을 때 돌아봐 주었습니다.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의 친구와 보호자였습니다. 슬픔과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주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선행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라, 때가 되면 거두리라(갈 6: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행한 선을 주께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선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가 선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가 선한 삶을 살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거룩한 삶이, 사랑에 감사하여 선행으로 보답하는 삶이 예수 안에서 거저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입니다.
거룩한 삶이, 사랑에 감사하여 선행으로 보답하는 삶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다같이 읽읍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