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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저를 버리지 마세요.
사 7:14, 마 28:20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을 때,
어떤 집에서 아들을 낳으려다가 내리 딸 다섯을 낳고,
여섯 번째는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믿었지만 낳고 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너무나 속상한 나머지 젖을 물리지 않고 방구석에 밀어놓았습니다.
하루가 지나 이틀이 되었을 때, 울고 있는 아기가 불쌍해서 젖을 물렸습니다.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이르렀을 때
주책없는 친척 하나가 그 이야기를 해서 딸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기뻐해 주는 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큰 병이 생겼습니다.
엄마를 미워하게 되고,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괴로워하다 못해 목사님을 찾아가서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이 위로의 말을 하다가 물었습니다.
"그 방구석에 밀쳐져 있었던 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어요?"
그녀는 부르짖듯 말했습니다.
"엄마,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목사님께서 말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런 말을 하셨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이 부르짖음을 어린아이의 말로 표현하면
"아빠,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세상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방 한 칸 빌려주는 이가 없어서 마구간에서 나셔야 했습니다.
헤롯왕은 군대를 풀어서 예수님을 죽이려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고,
군중들에게 많은 모욕 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했던 제자들로 부터 버림받고,
십자가에서는 사랑하는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저 역시 경험한 바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배신당했을 때의 상처는
참으로 크고 아픕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아픔이 있거든
하나님께 "하나님, 저 아파요! 제가 버림당했어요." 하고 아뢰십시오.
버림당한 아픔을 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품어주시고, 약속하실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마 28:20)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5)
예수님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아예 이름으로 삼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임마누엘'은 히브리어의 '함께'라는 '임'과 '우리와'라는 '마누'와
'하나님'이라는 '엘'이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주의 탄생을 계시하시면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로 지으신 것은
결단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실 때 이미 작정하신 일이고,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사 7:14).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
이것이야말로 기쁜 성탄 소식이며, 성탄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사람들 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궁중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이 사는 마을 권세가의 집에서 나지 않았습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 천하디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비록 거적을 둘렀을망정 사람 사는 방에서 태어나는데
어찌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마구간에서 나신단 말입니까?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오는 마구간의 모습은 깨끗하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신 당시의 유대 마구간은
성탄카드의 그림처럼 기둥과 지붕이 있는 근사한 마구간이 아닙니다.
당시의 마구간은 대개가 굴을 파서 만든 움막이었습니다.
거기는 짐승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발 딛기도 힘들 만큼 짐승의 분비물이 널려 있고
역겨운 냄새가 나서 도저히 아기를 낳을 자리로는 마땅치 않은 곳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사람들 곁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면서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변명하고 있지만,
이 말에서 구세주를 맞이할 마음이 없는 세태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여행객들이 아무리 북적거렸다 한들
마리아와 같은 사정 딱한 임산부가 몇 이나 있었겠습니까?
딱한 산모를 위해 여관방 하나 양보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진통이 시작된 산모를 어떻게 마구간으로 가게 버려둘 수 있단 말입니까?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돈 때문에 각박해진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업신여기고 냉대하는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들은 성탄의 기쁨을 모릅니다.
그래서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사건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일어납니다.
버림받은 사람에게서 일어납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서 일어납니다.
아픔과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실패와 좌절을 당한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아기 예수는 태어나십니다.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도 괴롭고 힘든 사람,
누군가 살며시 다가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손잡아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복된 성탄의 아침이 밝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요?
내가 울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고,
내가 배고플 때 배 고품을 나눌 수 있고,
내가 사랑에 목말라 할 때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고,
인생길이 외로울 때 동행해 줄 수 있어야
비로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그리 하시려고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 버림받고 슬퍼하는 사람들 곁으로 찾아와 계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성탄을 기뻐하며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리막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상처받은 예언자’라 불리는 헨리 나우웬은 인정받는 하바드 대학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명예와 보수를 다 팽개치고 메사추세츠의 작은 정신 지체자 시설에 들어가서
장애자들의 음식 먹기, 세수하기, 옷 입기, 심지어 용변을 지도하고 있을 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리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교수는 대답 대신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를 아는 길이 무엇인가?’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오르막 길’에서가 아니라, ‘내리막 길’에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답했습니다.
나우웬 교수는 ‘나는 줄곧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세계 최고의 하버드대학에서 권위 있는 교수가 되고,
세계적인 저술가가 되기까지 올라가는 길만 추구했다면서
“나는 그동안 작은 성공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을 달려왔다.
어느 날 우연히 정신지체 청년 곁에 앉게 되었을 때,
이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서만 예수를 알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에서만이 진정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느낌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생존경쟁의 오르막길에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남을 제치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외로운 사람들 곁에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 버림받은 사람들 곁으로 가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성심으로 섬겼던 보디발 장군에게 버림받아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모세도 자기 동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부모와 형제들, 장인인 사울에게 버림받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버림당한 사람들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꼽아보면 모두 한때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버림받아본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픔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고로 당신이 버림받은 경험을 했다면 낙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귀히 쓰시기 위해
'버림받음'이라는 시련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버림받아본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보살피는 치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8)
작년 말에 몇 가지 사정으로 전에 섬기던 교회로 나가야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센터장님께서 누군가 “오 목사님이 우리를 버리는 거예요?” 라 하더라고
들려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쿡 - 찔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로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작게는 개인 사정에 따라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원로목사의 오고 가는 것이
‘누군가를 버리는’ 행위로 느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형편을 정리하고 여기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가를 알면서도
자칫 누군가를 버려서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버려진 종에게 오셔서 함께 살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누군가를 버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도
하나님은 이 모습 이대로 품어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여전히 "사랑하는 자여!" 하고 다정스럽게 불러줍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당신도 남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모두 좋아할 때에는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에 만족하다가
그만 진실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는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오셔서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주심과 같이
나도 낮은 자와 함께,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성탄절에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자리에
임마누엘의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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