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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드린 기도
시 1:1-6 시편 133:1-3
설날은 즐겁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그 만큼은 아니어도 민족 명절의 정서는 여전한 듯합니다.
오늘 우리는 혼란스런 사건들에 파묻혀서 설날을 맞았습니다.
나라의 지도력이 내동댕이쳐지고, 촛불과 태극기가 마주 삿대질을 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주변 나라들에게 휘둘려서 나라의 품격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립니다.
경제, 안보, 교육 ... 나라의 구석구석이 세 파 네 파로 찢겨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울한 마음으로 맞은 설입니다.
그래도 설은 새해를 즐겁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설 즐거움을 문고리 삼아서 나라 안팎에 행복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소원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설날에는 세배로 부모님과 어른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어른은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하면서 한 식구로서의 관계를 다집니다.
차례를 지내는 데에도 조상과 자손이 함께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상님들을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조상님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라는
신앙적인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례나 제사의식을 숭배가 아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추모의식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조상님이 자랑스럽고 선조의 후광을 입어 고마울 수는 있어도
조상님 잘 섬겨서 복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해를 입는다는
미신적 생각은 청산해야 합니다.
복은 조상님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본문은 행복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본문의 ‘복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행복하더라는 시인의 체험적인 고백으로
시편 전부의 전재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즐거워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해야 합니다.
행복과 하나님 사랑은 정비례합니다.
하나님 없는 그 누구, 그 무엇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행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라하’와 헬라어 ‘마테로이’가 무려 499번 나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에 대해 관심이 얼마나 크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행복을 위하여’ 행할 바를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 (신 10:13)
축배를 들 때 ‘위하여!’ 하는데,
일찍이 하나님께서 ‘너희 행복을 위하여!’를 외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신 33:29) 하시고
여러분을 행복한 사람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누리기만 하면 행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을 마음 주머니 속에 가득 넣고 다니다가
어떤 일,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하면서
행복한 말을 하고 행복을 확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행복한 사람으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탁하면 행복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4)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목마를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성도가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을 사모하여 하나님이 말씀을 묵상하고 살면
시냇가의 나무가 과실을 풍성하게 맺듯이 모든 일이 잘되어 갈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웃음 지은 얼굴이 보면 저절로 즐거워집니다.
제가 초상화를 그릴 때 표정 있는 얼굴을 즐겨 모델로 삼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얼굴을 그릴 때 만족할 만한 작품이 되곤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에겐 표정이 있다」-정연아 저- 라는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성공하는 표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비안 리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역 오디션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다른 여배우들이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얼굴로 갔는데
비비안 리는 못내 아쉬웠지만 웃으면서 돌아섰습니다.
바로 그 웃음을 본 심사위원들이 ‘잠깐, 바로 저 웃음이야!’ 라고 소리쳐 불렀습니다.
환경이 나를 웃게 할 때 까지 기다린다면 웃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환경을(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웃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으로 돌보고 계시니까요(眷顧)(벧전 5:7)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로 사는 성도가 되어
‘항상 기뻐하는’ 삶을 누리실 것입니다(살전 5:16).
믿음과 평안은 정비례합니다.
큰 믿음일수록 큰 평안을 누립니다.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모든 일이 잘되어 가시기를(형통) 축원 드립니다.
연합하여 동거함이 행복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설날은 ‘함께 하는 자리’ 라서 즐겁습니다(시편 133:1-3).
부모 자녀, 형제자매, 일가친척이 함께해서 즐겁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본문 6절에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고 했습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사람,
당 짓고, 나누어서 물고 뜻을 줄은 알아도
서로를 감싸주고 받아주는 사람들의 축에는 들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불행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이 말씀은 감탄사입니다.
"얼마나 좋고 보기에 멋있는가!" 하는 감탄사입니다.
함께 살다보면 티격태격 다투는 일도 있고, 속상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식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는 찬송은 진리입니다.
본문에서 "연합하여" 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연합"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귀(악마)를 뜻하는 'devil'은 헬라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인데
그 말은 '동강내다, 떼어내다'라는 뜻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떼어놓고 갈라놓아 행복을 깨뜨립니다.
오늘 사단은 이 나라의 정치를 파당내고, 교육 이념을 갈라놓고, 노사를 동강내어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선하고 아름답게, 연합하는 행복의 삶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연합을 이루는 역할(piece maker)을 기쁘게 감당하십시오.
시 133편에서 형제가 연합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보배로운 기름’과 ‘헐몬의 이슬’에 비유했습니다.
연합의 기쁨은 ‘기름 같이’ ‘이슬 같이’ 서로를 배려할 때 가능합니다.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다’(시133:2)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사장의 성별의식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출30:22~33).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실 때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 수염에서 옷깃까지 흘러서 온 몸 전체에 퍼졌습니다.
기름은 허물 많은 죄인에게 부어져 성스런 직분자로 변하게 합니다.
기름은 허물을 씻어서 깨끗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되게 합니다.
기름을 상처에 발라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에게서 흘러내렸듯이
오늘은 성령님의 충만으로 성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믿음의 사람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거룩하게 된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고 치유하는 힘(은사)을 갖습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만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어울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친구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어울리고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의 행복이 됩니다.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시 133:3)라고도 표현했습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해발 2,815m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가나안 땅 사람들은 헐몬 산에 눈이 많이 쌓이면 풍년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은 헐몬산 눈이 녹아내린 물입니다.
또, 지중해 연안에서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헐몬 산을 지나다가
해가 지면 헐몬산에 막혀 냉각되어서 이슬로 가나안 땅에 내립니다.
이 밤이슬이 메말랐던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서 생명력을 갖게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서로 동거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기쁨은
마치 밤에 내리는 이슬처럼 인생 갈증을 해갈해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이슬 같은 만남은 서로를 행복하게 합니다.
메마르고 목마른 인생에서 촉촉한 이슬로 만난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과 이슬처럼,
서로를 살맛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관계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와 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하는가,
얼마의 사랑으로 깊이를 더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보시고
‘참 멋있다. 너희들 사는 냥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감탄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감탄의 말씀 시편 133편의 마침이 참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고 만족하셨으면 복을 명령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하라고 ‘명령’ 하셨으니 우리들의 행복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을 갓 받고 처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뒷면에 ‘초보운전’이라는 표지를 붙입니다.
그런데 ‘초보운전’이란 말 대신
애교스럽게 ‘어린 운전자가 타고 있어요.’ 라고 써 붙이는가 하면
‘초보운전, 미치겠지요? 저는 환장하겠어요.’라고 해서 웃게 만듭니다.
그런데 ‘실력은 초보, 건들면 람보’ 라는 협박성 문구도 있었습니다.
설이라는 이름은
새로 시작해서 ‘낮 설다’에서 온 것,
새롭게 시작되니 조심하고 근신한다는 의미의 옛말인 "섦다"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설’은 그 의미들이 다 포함된 말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께서 설날 다치거나 울면 일 년 내내 다치고 울게 된다면서
싸우지 말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초보운전처럼 서툽니다.
어제를 살고 오늘을 시작하고 보면 여전히 새잡이입니다.
현재의 일도 조심스럽거니와 미래의 일은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근신의 연속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솥밥을 먹고 사는 식구라 해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은 더욱 모릅니다.
기분 따라 다르고, 경위 따라 다릅니다.
당신도 나도 살아가는 실력은 초보이므로 자칫 람보가 되지 않게
함부로 건들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를 대할 때에는 저희 할머님의 표현을 빌리면,
‘깨진 바가지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인생의 달인은 없습니다.
내가 서툰 것처럼 마주한 사람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남편 노릇, 아내 노릇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 노릇도 자녀 노릇도 친구 노릇도... 서툽니다.
서툰 사람끼리 서로 양보하고 참아주고 섬겨주어야
비로소 연합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명절문화는 성경의 정신과 연결되는 면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웃과 연합하여 행복하게 살면 그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서 경천애인을 실현하게 됩니다.
2017년 설날에 본문 말씀을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저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행복을 명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형통하게 하시고
평화를 만드는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서 감탄하실 만큼 아름다운
연합하는 가정, 교회, 나라를 가꾸어
행복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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