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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0-14절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란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자”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받을 무서운 심판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분이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와 심판에서 구원 받고, 지옥 갈 데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아 몸이 찢기고, 피 흘리시며,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 인격적으로 만난 다는 것은 죄, 아직도 해결 안 된 죄, 계속 짓고 있는 죄를 예수께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 아직도 이 죄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 구원해주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간절하게 구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죄를 다 해결받기 바랍니다. 용서 받고 그 죄를 끊어버리는 권능까지 받기 바랍니다.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대속한 주만 보이도다.’는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시매는 헬라어로 ‘에스케노센’인데 그 뜻은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와 함께 살기위하여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바랍니다. 마음속에서, 가정과 삶속에서 에녹과 같이 항상 그분을 모시고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생명의 주’로 오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10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성도여러분. 2017년 여러분의 삶의 질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주신 생명, 더 풍성한 생명으로 사셨습니까?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입니까?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삶이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풍성한 삶이었습니까?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세상에는 밤과 낮이 있는데, 무엇으로 밤과 낮을 구별할 수가 있나?’
한 제자가 대답하기를 ‘저기 오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때에는 밤이고 구별할 수 있으면 낮입니다.’ 다른 제자가 말하기를 ‘저 멀리 서있는 나무가 보리수인지 혹은 망고 나무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이 바로 밤이고 저것이 무슨 나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것이 낮입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저 원수 같은 놈이라고 생각이 들면 밤이고, 이 사람이 분명히 내 친구지 라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낮이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저녁 도둑 몇이 들어와서 빵을 훔치다가 프랜시스의 제자들에게 들켰습니다. 제자들이 ‘이 도둑놈들아, 일해서 처먹지 아니하고 도둑질해서 먹다가 우리 선생님의 빵까지 빼서 먹으려고 왔느냐?’고 소리치며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빵을 먹이고 돌아오라’
그래서 이 제자들은 밤새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도둑을 만나서 그 빵을 먹였습니다. 그 도둑들이 감동하고 죄를 회개하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용서해 주고, 악을 도리어 선으로 갚고, 평화를 이루고 사랑으로 사는 것이 풍성한 생명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신 풍성하고 밝은 낮에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시려고 오신 예수를 영접하기 바랍니다. 풍성한 생명이신 그분을 모시고 삽시다. 내년 성탄절 때는 “주님, 내 삶의 잔이 넘쳤나이다.”라고 간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살기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게 사람입니다. 옛날 중국의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 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은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살았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밭가는 노래 - 격양가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밭을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우리도 한번 불러볼까요? 다 따라서해! (우리가 땀흘려 벌어머꼬 사는데 , 주님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 여러분, 이게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방이 없는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모두 “방이 없어요, 방이 없어요.”하고 거절했습니다. 방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을 돈 될 만한 다른 손님들에게 다 내주었기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만한 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굽니까? 죄와 지옥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시려고 찾아오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방이 없다고 영접치 않는 겁니다.
베들레헴에서 겨우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구간에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 안방은 자신이 거하고, 옆방은 자식들, 그 옆은 돈 많이 낸 사람이 사용하고, 뒷방은 사업차 자주 들리는 손님에게 내 주고 정작 예수님께는 마구간 밖에 드릴 방이 없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어서 오세요”하고 반갑게 모셔 들일 방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 마음의 방에 자존심, 성취욕, 명예, 재물, 취미활동을 모셔서 그래서 정작 예수를 모실 방이 없지 않습니까?
설령 모시더라도 마구간에 모셔 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나 아닌지요? 베들레헴 동네이야기가 어데 남의 일입니까? 격양가 부르는 백성의 이야기가 남의 일입니까?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음은 성경에서 알려주시는 그대로 ‘그렇습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라고 했는데 영접이 무엇이죠?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접입니까?
영접이란, 첫째로, 항아리에 물을 부면 담기는 것 같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접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내가 너의 구주가 되어주마, 죄에서 건져 주마, 생명을 주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 순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둘째로 주님을 영접한다 하는 것은 그를 나의 목자로, 나의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말씀, 인도하심을 순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십디까?
오늘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던지,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납득이 가도 따르고 안가도 따르고, 이해가 되도 따르고 안 되도 따릅니다. 말씀에 전적인 순종, 그것이 바로 주를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그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해 봅시다. 이 말씀 따르면 돌로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힌 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평생 미혼모가 되어서 홀로 아기를 키워야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침하기 전에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려 마리아에게 상처주지 않고 가만히 결혼을 끊기 위하여 생각하다가 깜박 잠들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씀했습니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영접입니다. 마리아같이 요셉같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를 영접하시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내 중심 최고의 자리에, 왕좌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중심은 ‘나, 나, 나’입니다. 내가 모든 사물의 중심에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하여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까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를 시도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왕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요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기를 도와주는 분이며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뜻은 내 중심으로 살던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나의 중심으로 모시는 겁니다. 내가 왕 노릇하는데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 나의 지식을 예수의 생각, 예수의 지식으로 바꾸는 겁니다, 나의 감정도, 나의 의지도, 나의 가치도 예수의 것으로 바꾸는 겁니다. 우리의 심령을 예수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유리병들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이것 맛보세요. 오렌지주스와 자몽주스입니다.
오렌지주스가 담겼으면 오렌지주스가 나오고 자몽주스가 담겼으면 자몽주스가 나옵니다. 다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난 유대인들이 스테반을 돌로 때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이 맞아죽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소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제가 기분이 괜찮을 때는 예수사랑, 예수평화를 따르는 척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속상한 일이 있으면 이런 상황에선 가식 없이 내 속에 들은 것들이 정확하게 튀어나옵니다.
지난 목요일인가 금요일인가 회사에 내려갔습니다. 선재가 고지서를 줍디다. 보니, 지난주일 예배드리러 가서 인도에 주차한 것 사진 찍어서, 주차위반 하셨으니 벌금내시라는 딱집디다. 구청으로 전화 걸어서 막 소리쳤어요. 선재가 제발고정하시라고 말리는데도 한참 분풀이를 했어요.
그러다가 아차! 내가 아들 앞에서 큰 실수 했구나, 그리고 교회 앞에 주차했으니 그 공무원도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일 것 다 알았을 텐데 큰 실수 했구나, 내 정신 돌아온 겁니다. 얼마나 창피 하던지, (선재야 미안하다)
그런데 여러분, 스테반은 돌 던져 자기를 죽이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 안에, 마음의 방에 예수로, 그 사랑으로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하신 기도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탄절에 우리 진짜로 예수를 영접합시다. 예수를 영접한 척 말고 진실하게 예수 영접합시다. 매순간 우리의 삶속에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를 영접합시다.
이렇게 예수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심령에 예수 사랑으로, 평화로, 기쁨으로 가득 채웁시다. 예수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생명, 예수 사랑, 예수 평화, 예수 기쁨, 예수 축복을 우리 이웃의 잔에 넘치게 부어주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 된 성도들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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